27화. 뱀은 먹이를 통째로 삼킨다(3)
“당신은 좀 기다려요.”
리리카를 바라보던 베를리아가 말했다. 그가 들고 온 선물이라는 것이나 이 저택의 위치를 이렇게 쉽게 찾아온 것이나 의문투성이였다. 다만 그것을 저 두 남자의 앞에서 물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뿐.
“그럼요, 얼마든지요.”
리리카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차까지 따라 마시는 모습이 누가 보면 그가 이 저택에 자주 드나든 줄 알 법했다.
그 행태를 바라보며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응접실에 있는 네 명의 사내가 온통 베를리아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중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사실도 매우 불쾌했다.
“넌 왜 왔어.”
오만하게 다리를 꼰 베를리아의 시선이 리암을 향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카를로스가 쾅 의자의 손잡이를 거세게 내리쳤다.
“지금 나보다 로베르 후작을 우선하겠다는…!”
“당당히 정문으로 오지도 않은 불청객, 그럼 쫓아낼까?”
베를리아가 그 목소리를 차분하게 끊어냈다. 평온하고 즐겁게 맞이할 수 있던 아침을 방해당한 사람으로서 카를로스를 온건히 대해 주고 싶은 마음 따위 없었다.
황태자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쫓아내겠다는 그녀의 말이 절대 허튼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변한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 후 단 한 마디도 괜히 꺼낸 적이 없었으니까. 적어도, 카를로스 에덴버에게는.
“…나는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카를로스의 침묵을 기다렸다는 듯 리암이 말을 꺼냈다. 변했다. 원래의 리암 로베르였다면 그래도 먼저 황태자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치미는 위화감을 카를로스는 이제 더 이상 쉬이 넘길 수 없었다.
“해.”
“여기서…?”
쉬이 떨어진 베를리아의 대답에 도리어 리암이 망설이며 되물었다. 그가 어쩐지 카를로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굳이 시간을 따로 내줘야 해?”
말끝은 의문형이었으나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베를리아의 의도를 읽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구태여 따로 자신의 시간을 할애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것. 그게 적나라해서 리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리암이 망설이며 카를로스를 바라봤다.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리암 로베르는 카를로스가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말 안 할 거면 말고.”
“…이번 연회에서 나와 파트너가 되어줘!”
순간 응접실에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건국제는 5일 동안 열리는 커다란 축제였다. 왕실에서도 당연히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회자 되는 피날레는 마지막 날에 열리는 황실 연회였다.
“리암, 너 미친…”
“싫어.”
일그러진 표정의 카를로스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려던 참에 베를리아가 그 말을 끊어냈다. 그리고 나온 답은 당연히 단호한 거절이었다.
“…혹시 이미 파트너를 구한 거야?”
리암 로베르의 질문에 어째서인지 황태자의 시선까지 따라왔다. 정말 같잖은 것을 묻는다는 듯 제 머리칼을 빙빙 꼰 베를리아가 툭 내뱉었다.
“아니, 그냥 너랑 하기 싫어.”
리암의 입이 다물렸다. 그로서는 꽤 고심해서 꺼낸 말을 이렇게 단칼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긴 원작에서 그들은 거절하는 역할이나 했었지 누구에게 거절을 당해보길 했겠는가. 그 거절당하는 역에 베를리아 리들턴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 그녀를 꽤 불쾌하게 만들었다.
[“안젤라, 나와 파트너가 되어 주겠어?”]
얘도.
[“앤지, 나와 함께 연회에 가줬으면 한다.”]
얘도.
[“제가 성녀님을 에스코트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걔도, 모두 그들의 눈에는 안젤라 애거스틴 뿐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을 보라지, 또 연회에 혼자 온 꼴을 봐.’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 외의 파트너를 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이의 에스코트를 받느니 차라리 혼자 연회에 참석했다. 모두의 비웃음을 살 것을 알면서도.
[‘카를, 내 파트너가…’]
[‘베르리아 리들턴, 내게 그런 걸 바라지마.’]
거절, 거절, 거절. 그런 베를리아 리들턴의 청을 카를로스 에덴버는 단 한 번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뒤에 홀로 남은 베를리아 리들턴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은 리암 로베르나 데니안 론델이나 매한가지였다.
“리암을 거절하면, 너와 함께 가려는 자나 있나?”
카를로스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내는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왜? 관심이 없으니까.
[‘리들턴 백작님,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십시ㅇ….’]
[‘꺼져.’]
베를리아 리들턴은 귀족적으로 거절하는 방법 따위 몰랐다. 그저 카를로스 에덴버가 아닌 다른 사내들이 제게 관심을 보이는 게 못마땅했고 귀찮았다. 그게 그런 요청들을 하나같이 일부러 매몰차게 거절한 이유였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의도대로 매우 무례한 거절을 일삼는 그녀에게는 곧 누구도 청을 건네지 않았다. 그리하여 베를리아 리들턴은 더더욱 고립되었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건 어쩌면 베를리아 리들턴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카를로스 에덴버.”
그러나 요는 그녀를 고립시킨 자 중에 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베를리아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설마, 저 자를 데려오겠다는 것은 아닐 테고.”
업신여기는 듯한 카를로스의 시선이 메리쉬를 향했다. 황실 연회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귀족뿐이었다. 설령 호위기사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황실 기사가 아닌 이상 신분을 엄격히 따졌고 귀족인 기사를 호위로 둘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그것으로도 부류가 나누어졌음은 말하자면 입 아플 일이었다.
“왜 안 되는데?”
황태자의 시선에 심기가 꼬인 베를리아가 서늘하게 답했다. 비웃음을 머금은 카를로스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감히 어딜.”
베를리아는 터지려는 비웃음을 참아냈다. 그녀로서는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재고 있는 꼬락서니가.
“그것 참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말이네.”
가볍게 그것을 빈정거림으로 되돌려 준 그녀가 메리쉬를 보더니 미소 지었다.
“멜, 작위 하나 사줄까?”
“베를리아 리들턴!”
“베를리아!”
화난 카를로스의 외침과 놀란 리암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국의 황태자와 후작의 앞에서 범법을 논하는 베를리아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웠다.
“귀찮으면 그냥 법을 바꿔줄 수도 있고.”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왜, 못할 거 같아?”
황태자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자 베를리아가 그제야 진한 비웃음을 띄운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대하듯이 제 손톱 끝을 살피던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적당히 돈 좀 먹여 주고.”
쾅!
카를로스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라 그가 테이블을 내리치건 말건 베를리아는 제 할 말을 더했다.
“적당히 협박도 해 주고.”
“베를리아 리들턴!”
“내 이름이 베를리아 리들턴인 거 나도 알거든?”
시끄럽다는 것을 두 귀를 양손으로 막음으로써 표현한 그녀가 오만한 미소를 만면에 내걸었다.
“까불지 마, 카를로스 에덴버.”
원작에서 카를로스의 권력이 공고해지기 시작한 시점이 있었다. 그게 바로 베를리아 리들턴의 죽음이었다.
귀족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쉬쉬하던 므시아의 해체. 그것에 관한 진실이 어떠하든 므시아를 해체시켰다는 사실
은 카를로스에 대한 두려움을 귀족들에게 심어 놓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 자리에 멀쩡히 존재했다. 황실의 지하 감옥에 갇히고도 멀쩡히 살아나옴으로서 그녀는 제국을 뒤흔들 암흑가의 주인이 건재함을 증명했다.
그런데 황태자는?
“내가 없는 네가, 뭐라도 될 줄 알았어?”
원작을 읽을 때부터 빙의한 후까지 늘 품고 있던 생각을 그녀는 여과 없이 내뱉었다.
만약 그녀가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빙의한 시점이 지금보다 나중이었다면 카를로스의 처지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성검의 주인이 되고, 성녀와 결혼한 카를로스 에덴버라면.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둘 리가 없잖아?’
베를리아가 서늘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금의 황실은 어느 때보다 그 권력이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절대 나아질 수 없도록 주인공을 위한 전개를 죄 뒤틀어버렸다.
황실에서 황손을 많이 보려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현 황제는 나약했고, 핏줄로 황가에 얽힌 귀족들은 카를로스에 의해 그 관계가 모두 끊겼다. 즉 황가를 지지할 세력 자체가 완전히 와해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황제란 절대 혼자 해 먹는 자리가 아니었다. 당장의 경쟁자를 물리쳐도 그들에게는 결국 상대해야 할 귀족들이 있었다. 그 수많은 황위 계승권을 가진 후계들이 괜히 물 밑으로 그토록 이 수작 저 수작을 부려왔겠는가?
그러니 자신을 지지하는 파벌이 있음에도 황위 계승 후보들이 개싸움처럼 죄다 칼 들고 너 죽고 나 살자 덤벼들지 않는 것이었다. 훗날 황위에 올라 귀족들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황제가 즉위 전부터 다수의 귀족에게 반감을 살 수는 없으니까.
‘명분도, 회유도 없이 이루어진 계승.’
그게 황태자의 약점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모든 황위 계승권자의 죽음으로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다른 황녀와 황자를 지지하던 귀족들을 회유할 시간도 없이 일을 치른 건 그들을 무시한 처사였다.
마땅한 명분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지만 카를로스에게는 그것을 만들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카를로스는 귀족들에게 반감을 샀고, 정계는 유례없이 네 갈래로 나뉘어 버렸다. 황태자를 지지하는 귀족보다 그에게 반하는 귀족이 많은 지금, 만약 마땅한 황가의 핏줄이 있었다면 귀족들은 얼마든지 그를 갈아치우려 했을 터였다.
“나는, 이 나라의 황태자다!”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의 앞에서 당당해 보이기 위해 더욱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힘없는 외침은 늘 그랬듯이 무용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가 오만하게 선언했으나 그녀의 눈에는 그토록 하찮을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말을 간단히 밟아 누른 베를리아가 선언했다.
“나는 베를리아 리들턴이야, 카를로스 에덴버.”
선황은 지나치게 여색을 밝혔다. 그로 인해 황권은 여러 귀족가들에 갈기갈기 찢겨 그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랬던 시대에 존재한 암흑가의 주인이,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어떤 지위 같은 걸 갖다 붙이지 않아도 그 이름만으로도 설명이 되는 사람.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꺼져.”
귀찮다는 듯 휙휙 손을 내저은 베를리아가 오만하게 명령했다. 그녀야말로 진정으로 더없이 오만해 보였다.
짝짝짝!
그 순간 과열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 눈치 없는 소리의 주인공이 눈을 빛내며 웃었다.
“최고로 멋있었어요, 베를리아 양.”
손뼉을 치던 리리카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어찌 보면 참으로 대단한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