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들은 살아 있었다(1)
베를리아 리들턴이 므시아를 장악한 이후로 므시아의 일원들은 그녀에게 숭배에 가까운 감정을 보였다. 그런 이들에게 원작의 남주인공과 조연들의 행태가 달가웠을 리가 없었다. 재스민이 굳이 존칭을 붙이지 않는 게 그러했다.
“…걔들이 왜?”
베를리아도 딱히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럴 만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같은 건 없었으니까. 솔직히 원작을 읽을 때 카를로스가 제일 싫었지만 두 사람도 딱히 좋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모처럼의 메리쉬와 첫 데이트를 나가려는 때에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들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아서 안으로 들이진 않았습니다.”
고로 리들턴 저택 안으로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고 대문 밖에 서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전하는 재스민의 얼굴은 평온해서 베를리아는 어쩐지 웃음이 나와버렸다.
누가 보면 제국의 후작과 기사단장이 문전박대를 당했다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리라.
“그냥 갈까요?”
베를리아와의 데이트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메리쉬가 앙큼하게 물어왔다. 물음 같았으나 그 목소리에는 분명 그렇게 하길 바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베를리아가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그 녹안을 마주하며 잠시 고민했다.
웬만하면 그 눈동자가 바라는 대로 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데이트를 아주 잠깐만 미루기로 했다.
“…잠깐 시간 내도 괜찮겠어, 메리쉬?”
“베릴이 원한다면요.”
베를리아의 말에 짧게 한숨을 쉰 메리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제 말에 반박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이 뺨에 짧게 입을 맞춰주었다.
사실 그녀가 두 사람 말 따위 굳이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본디 그들은 이 건국제 기간에 베를리아가 아닌 안젤라를 찾아갔어야만 했다.
그녀가 굳이 두 사람을 만나기로 한 이유는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다.
“어쩐 일이야?”
뒤늦게야 느긋하게 리암과 데니안을 응접실로 들인 베를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축제에 섞여들 셈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은 평범한 차림이었다. 물론 그들을 위해서 치장을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할 말이 있어서…”
“사과하러 왔습니다.”
리암과 데니안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는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좋아, 기사단장 당신부터 해.”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베를리아가 턱짓으로 데니안을 가리켰다.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것조차 황궁이 아니라면 그럴 필요 있겠는가. 처음부터 그 예를 갖췄던 이유도 아직은 귀족으로 머물 필요가 있기 때문일 뿐 그 이상은 없었다.
잠시 베를리아를 보며 멈칫거리던 데니안은 하녀가 와서 그가 앉을 자리 앞에 찻잔을 내려 주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리암은 어리둥절해 보였다. 그는 멀뚱멀뚱하니 잠시 베를리아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동안 리들턴 백작에게 보였던 제 행동들에 대하여 사죄하겠습니다.”
데니안이 망설임 없이 허리를 접어 고개를 숙였다. 비교적 낮은 테이블까지 이마가 닿을 만큼 깊숙이.
그런 데니안 론델을 베를리아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세상 만물이 그렇듯이 시간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다만 변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을 뿐이었다. 인간이 그랬다.
베를리아는 자신이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은 갖지 않았다. 스스로 변하는 것조차 어려운 인간이 누군가를 어찌 변화시키겠는가.
“왜?”
그래서 베를리아는 물었다. 그녀는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과 다르게 행동했지만 그건 애초에 누군가 변하기를 바라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카를로스나 리암, 데니안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고 있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행동했기에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애초에 쉽게 바뀔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을까? 그에 대한 그녀의 답은 당연히 부정적이었다.
‘나랑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베를리아 리들턴에 그녀가 빙의해서 변하게 된 것도 그리 긴 날이 지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데니안이 보이는 행동인 그녀가 예측한 바를 벗어나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7황녀가 죽을 거라는 걸.”
데니안은 순순히 자신이 스스로조차 기만했음을 인정했다. 지금의 베를리아, 어쩌면 친구였을지도 모를 이전의 베를리아 리들턴에 대한 사과였다.
“미워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게 너였어.”
데니안 론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것에 놀란 건 리암이었다.
“데니안!”
“미안했습니다, 베를리아 리들턴.”
이게 소설이었다면 ‘데니안 론델은 기사로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사죄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따위로 서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소설을 보는 타자가 아니라 이곳에 존재하는 당사자였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베를리아!”
“시끄러워, 리암 로베르.”
툭 하니 던져놓는 말에 제가 더 움찔한 리암이 너무하다는 듯 제 이름을 불러 재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싸늘히 경고할 뿐이었다.
“너희는 날 죽이려 했어. 그런데 사과 따위로 뭘 어쩌라는 거야?”
누구도 베를리아의 목숨을 구명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는 제 목숨 구명할 이 하나 곁에 두지 않은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행동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를리아 리들턴의 행동이 어쨌건 그들이 한 행동은 없던 게 되지 않는다.
후회는 그래봤자 후회다. 지난날은 바뀌지 않는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로 인해서 베를리아 리들턴은 매 순간을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죽으라고 한다고 죽음을 택한 것은 원작 속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그러나 모두에게 버림받은 시점에서 그것이 과연 온전한 베를리아만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데니안과 리암은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 보이는 행동들에 대하여 침묵했다. 심지어 베를리아 리들턴이 죽을 뻔했던 순간조차도. 그건 진짜 베를리아에게 있어 그저 침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 세계의 누구도 모르겠지만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죽었다. 죽임 당했다. 카를로스도 리암도, 데니안도 최소한의 책임을 회피할 순 없었다.
“아니면 이번에도 그렇게 될지는 몰랐다고 부정할 셈이야?”
“나는 정말로 네가 죽길 바라지는…!”
베를리아의 얼굴에는 화려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와 상반되는 서늘한 말에 리암은 얼굴이 질린 채 외쳤다.
“제 목숨을 대가로 주겠습니다.”
데니안이 리암의 말을 끊고 그조차도 이미 준비해왔던 것처럼 말을 이었다.
“너 미쳤어?”
리암이 기어코 베를리아와 데니안의 사이를 가로 막아섰다. 기사의 목숨은 오직 그 주군의 것이었다. 그런데 감히 황태자의 기사가 다른 이에게 제 목숨을 주겠노라 하다니.
“아까부터 너, 말이 많은데.”
쾅!
“윽…!”
베를리아의 심기가 불편해지기도 전에 메리쉬가 나타나 리암의 목을 짓눌러 벽에 처박았다.
리암은 마법사였다. 그러나 이 저택에서만큼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리들턴의 저택은 흑마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마력을 짓누르는 검은 기운을 이겨낼 만큼 리암은 강하지 못했다.
“베…를, 리아.”
리암이 하얗게 변한 얼굴로 자신을 보든가 말든가 베를리아는 조용해진 상황에 만족했다.
“계속해 봐.”
“제가 그대를 한 번 죽일 뻔했으니 리들턴 백작님께서 원하실 때 한 번 제 목숨을 바치죠.”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고?”
베를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다. 원작에서 우직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으로 서술되는 데니안 론델다웠다.
‘네 악독함에는 진절머리가 나.’
‘…데니.’
‘내 이름도 입에 담지 마라.’
‘…제발, 데니안.’
세상은 성녀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된 그녀의 요람 같았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성녀를 그들에게서 떨어트려 놓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친구도, 사랑도 모두 한 사람에게로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내가 잠깐 미쳐서…’
베를리아가 처음 성녀에게 못된 짓을 했을 때 그녀에게서 가장 먼저 돌아선 건 데니안이었다. 그는 정의로웠고 우직한 성격이었으니까.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에게 매달렸다. 적어도 그들이 함께해 온 세월이 그녀에게 한 번의 기회 정도는 더 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끊어낸 그 한마디로 베를리아 리들턴의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었던 것인가가 증명되었다.
[데니안은 감히 그 가녀린 사람에게 모진 짓을 한 베를리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안젤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찾아들었다.]
그 순간에 데니안에게 중요한 것은 안젤라 애거스틴 뿐이었다.
[“그대로 가 봐. 성녀가 어떻게 되는지.”]
[베를리아 리들턴은 끔찍하게도 끝까지 제 죄를 뉘우치지 못한 채 그를 협박했다.]
[“이런 짓을 또 벌인다면 그 전에 내가 널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다.”]
그렇게 말한 그는 두 번 다시 베를리아 리들턴을 사적인 자리에서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 때마다 데니안은 성녀의 곁에 있었다.
데니안 론델은 소설 속에서도 한번 결정하면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건 성녀에게 악행을 벌인 베를리아 리들턴에게서 등을 돌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원한다면.”
회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베를리아가 벽면에 장식된 검을 빼 들었다.
그녀가 그것을 들고 데니안에게 다가갔다. 그동안에도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데니안…!”
푹!
리암의 목을 긁고 겨우 흘러나오는 비명이 응접실을 울렸다. 그대로 베를리아가 든 검이 데니안의 심장에 박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