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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21)화 (21/148)

21화. 누가 누가 이기나(4)


 

“너에게 황태자비 후보로서 자격을 증명하길 요구하는 서류들이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앞에 두꺼운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그 작태를 비웃었다.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쓸데없이 황명으로 자신을 불러들이더니 고작 그가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황명에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베를리아는 짜증이 치밀었다.

“네 능력을 증명할 것을 요구….”

“엿 먹어.”

그녀의 불편한 심기도 모른 채로 카를로스는 다시 설명하려 들었다. 그것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베를리아가 말을 끊고 욕설을 내뱉었다. 지껄이는 말이 참으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어린 날에는 저놈도 눈치 좀 보고 자랐을 텐데. 황태자로 곱게 다뤄지면서 어디에다가 눈치란 눈치는 싹 다 팔아먹은 모양이었다. 저딴 것을 설명이라고 하고 있는 작태를 보면.

“뭐… 뭘 어째? 이 상스런….”

베를리아 리들턴은 평민 중에서도 뒷골목 출신이었다. 그녀의 양아버지인 네멘 리들턴은 일부러 연고가 없고 그중에서도 독해 보이는 아이들을 주워왔다.

그러니 사실 베를리아에게 욕설이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의 그녀에게는 현대인의 기억도 있지 않은가. 다만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이 항상 카를로스 에덴버의 앞에서는 그 말을 조심했을 뿐이다.

저런 게 뭐가 이쁘다고. 그녀가 구시렁거렸다.

“상스러운 게 양심 없는 것보단 낫지 않아?”

물론 카를로스가 제게 저러는 것도 짜증이 났다. 그렇지만 베를리아가 그의 말이 우스운 데는 다른 이유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거기 있는 지들은 뭐 잘났다고 그 자리에 올랐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생각하기에 귀족들은 제게 증명을 요구할 자격 따위 없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오른 게 보통의 인간들과 무엇이 특별하게 달라서였단 말인가? 혈통을 운 좋게 잘 타고났다는 것, 그 외에 뭐가 있어서?

‘아를레나 공작씩이나 되면 몰라.’

그 언니는 혈통이 아니었어도 뭔가 되었어도 됐을 사람이다. 그러나 모든 귀족이 그렇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모든 재벌이 그랬듯이.

“아니면 내가 만만해?”

베를리아가 삐뚜름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물었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드러나는 눈빛이 꽤 살벌했다.

귀족들은 베를리아 리들턴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늘 항상 카를로스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망설임 없이 자신을 바짝 엎드려 낮추었다.

“그러면 안 될 텐데.”

그러니까 요는 저를 우습게 보는 작자들을 잡아 족칠 능력이 없어서 그랬던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제게 저런 것 따위를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다른 일반 귀족 영애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을 정도 이상의 것을.

“다 잡아서 살려만 놓기 전에 헛수작 때려치우라고 전해.”

죽이지 않아도 인간을 괴롭힐 방법은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사실 베를리아 리들턴의 머릿속에는 그런 것이 매우 다양하게 들어 있었다. 뒷골목에 살다가 마탑에서 금지한 흑마법을 다루던 남자의 밑에서 자랐으니 그쯤이야.

“넌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나.”

단정적인 어조였다. 대놓고 그따위 것은 싫다는 듯 막 나가는 태도를 보이는 베를리아를 향해 카를로스가 내놓은 말이었다.

“내가 왜?”

뭘 믿고 대체 그딴 걸 확신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것처럼 어조에는 불퉁함이 가득했다.

“…넌 나를 사랑하니까.”

그래서인지 대답을 하는 황태자의 말투에는 이번에는 조금 망설임이 들어갔다. 물론 그렇다고 그 대답이 베를리아의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뭔 개소리야.”

그녀는 욕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카를로스의 앞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고 있자면 믿을 수 없겠지만 정말로. 그냥 황태자가 자꾸 그녀의 입에서 욕이 나오도록 만들 뿐이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벌써 잊었어?”

저게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나.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베를리아의 태도는 점점 더 망설임이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 여기까지 귀찮게 행차해야 하는 엿을 먹은 모든 이유가 저기 있었다. 어찌 말과 행동이 곱게 나가겠는가.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카를로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는 하냐는 것처럼.

어차피 그녀가 황태자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구구절절 늘어놓아봤자 들어먹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당연한 거 아냐? 너보다 메리쉬가 훨씬 더 잘생겼어. 그리고.”

노골적으로 카를로스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보던 그녀가 일견 야릇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몸도 훨씬 더 좋아.”

그 말과 그 미소는 은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굳게 악다문 황태자의 턱이 조금 떨려왔다.

“헛소리.”

베를리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방금 한 말을 부정하는 건지 정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일지 몰랐다.

“믿지 말던가, 솔직히 이제 네 생각 같은 거 관심 없어.”

그렇게 말한 베를리아가 돌아섰다. 헛소리는 누가 하고 있는 건지. 하여간 마주하기만 해도 피곤한 상대였다.

“잠깐, 베를리아 리들턴!”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제게서 멀어지려 하는 그녀를 황태자가 붙잡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사이로 메리쉬가 나타나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또 네놈이…!”

메리쉬의 키는 황태자보다 컸고 체구 또한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온전히 그녀의 모습을 가려냈다. 그게 카를로스의 분노를 부추겼다. 그의 손이 사정없이 메리쉬를 치워내기 위하여 움직였다.

“접근하지도 마.”

그러나 메리쉬의 존재는 굳건했다. 물론 카를로스도 쉽게 산 인생은 아니었다. 다만 네멘 리들턴의 아래에서 온갖 일을 다 해야 했던 메리쉬와 같을 수는 없었다.

“봤지? 내 애인이 너보다 잘난 거.”

가볍게 그런 카를로스를 비웃은 베를리아가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서야 메리쉬는 지키던 자리를 벗어나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 뒤로 커다란 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닫혔다.

***

“황태자가 베릴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녀의 뒤를 따르던 메리쉬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요즘 이렇게 종종 자신을 드러내고 베를리아와 걷고 싶었다. 원래는 그림자인 메리쉬가 그렇게 행해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요새 들어 자주 베를리아와 함께 걷는 것을 즐겼다.

“난 남 주기에는 너무 아깝고 잘난 사람이거든.”

그런 그의 어조에 메리쉬를 돌아본 베를리아가 다정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장난스럽게 손가락 끝부터 스치다가 곧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단단히 서로에게 얽혀들었다.

“쟤는 멍청해서 그걸 이제야 안 거고.”

카를로스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사랑에 답해 줬다고 해도 사실 그녀가 원작에서처럼 악녀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었다. 베를리아는 애초에 태생적으로 선하게 키워진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악했다고 할지라도 황태자에게 아까운 인물임은 선명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에게라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었으므로.

“난 내 가치를 아는 사람이 좋아.”

그녀는 카를로스가 저러는 이유를 알았다. 원래 살던 세계에는 계륵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즉 본인은 갖기 싫지만 남도 주기 싫다는 도둑놈의 심보인 것이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제 것일 때는 그 가치를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 가치의 모든 것은 황태자를 위해 쓰일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다 좋은 건 아니고.”

자신을 보는 그의 표정이 심각했던 탓에 베를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메리쉬에게 그녀는 너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가치를 몰라보다니 혹시 실명이라도 한 것인가 싶을 만큼.

그러니 메리쉬의 입장에서 카를로스 에덴버는 눈과 귀가 전부 멀었음이 분명했다. 아니면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던가.

“네가 좋다는 말이야, 메리쉬.”

쪽,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춘 베를리아가 화려한 웃음을 피워냈다. 귀족들은 여인의 이런 행동을 지양하는 편이었지만 뭐 그런 것 따위 그녀의 안중에 없는 일이었다.

“저도 베릴이 좋아요.”

그녀의 행동 하나에 금세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단 메리쉬가 답했다. 그는 베를리아의 애칭을 허락받은 이후로 그 무엇보다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 모습이 썩 귀여워서 베를리아가 연이은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 뒷모습을 날 선 시선이 놓치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

갑작스럽게 황태자비에 대한 논제로 귀족들 사이가 소란스러웠지만 사실 준비해야 할 건 따로 있었다. 곧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건국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어때, 메리쉬?”

베를리아는 들떠 있었다. 솔직히 소설로만 보던 이런 화려한 축제를 즐길 일이 언제 또 있었겠는가. 당연히 그녀로서는 처음 겪는 이 세계의 축제에 마음이 설렐 수밖에 없었다.

메리쉬는 그녀가 제게 내미는 옷들을 보며 조금 난감하고 어색한 표정이었다. 지금 베를리아가 고르는 옷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메리쉬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옷은 입어보질 않아서.”

“데이트하는 건데 매일 입는 검은색 옷은 그렇잖아.”

므시아의 은밀한 일들을 처리하고 베를리아의 그림자로 살았던 메리쉬의 옷차림은 죄다 검은색 일색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카를로스를 황태자위에 올리는 것에 집중하면서 제대로 즐길 틈도 없었다. 화려하거나 다채로운 옷을 입기에는 하는 일들에 너무 번거로웠다.

“잘생겨서 그런가, 다 잘 어울리네.”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베를리아 때문에 메리쉬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서 그녀는 말에 거침이 없었다. 예를 들어 저번에 했던 몸이 좋다던가, 같은.

“메리쉬?”

홀로 그가 생각에 빠지자 그녀가 메리쉬를 불렀다.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건네는 옷을 빠르게 받아들었다.

“전 베릴이 좋다면 다 좋아요.”

“물론 그 대답도 좋지만.”

물론 그녀는 베를리아 리들턴이라면 절대적으로 여기는 메리쉬를 좋아했다. 처음에 그를 제 남자로 만들기로 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렇지만 인간의 관계라는 게 한쪽의 의견만으로는 항상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관계를 쌓고 싶은 것이었지 전과 같이 개를 기르듯 주종의 사이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네가 스스로 좋다고 느끼는 것도 생겼으면 좋겠어.”

베를리아가 덧붙이자 메리쉬가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왔다. 쪽, 짧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늘 무표정하던 그는 점차 이런 미소를 자주 짓게 되었다.

“제가 좋다고 느끼는 것, 바로 제 앞에 있지 않습니까.”

그 시선이 온전히 베를리아만을 향해 있었다. 메리쉬가 말하는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저는 지금 베릴로 충분합니다.”

정말로 그랬다. 뒤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사람인데 그보다 더한 것이 있을 줄 몰랐다. 그것을 베를리아가 알게 해 주었다.

늘 자신에게 다른 세계를 열어 주는 것은 베를리아였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 말은 베를리아의 마음을 충족시켰다. 그래서 그녀는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어느 날에는 원하지 않더라도 메리쉬의 세계가 넓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전을 즐기는 것 또한 좋을 거 같았다.

똑똑똑.

두 사람이 모두 외출 준비를 마쳤을 즈음 전속하녀 재스민이 방문을 두들겨왔다. 베를리아가 들어오라고 허락하자 문이 열렸다. 제 주인을 마주한 재스민이 말을 전했다.

“리암 로베르 후작과 데니안 론델 기사단장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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