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누가 누가 이기나(3)
“응접실로 오라고 해.”
베를리아를 따라 몸을 일으킨 메리쉬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발견한 그녀가 픽 웃으며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잠깐만 다녀오자.”
“베릴이 인기가 너무 많아서 곤란합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잘생긴 얼굴로 진지하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메리쉬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설이는 마음이 자꾸만 피어났다. 눈앞에서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노라면.]
안젤라 애거스틴은 절대적인 원작의 여주인공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복수로 시작한 메리쉬의 악행조차도 잠시 주춤하게 될 만큼.
그러나 여주인공의 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주인공뿐이었다. 그래서 메리쉬는 끝내 파멸에 도달한다.
“그냥 여기 있을래, 메리쉬?”
그런 말을 꺼낸 건 충동적인 일이었다. 어쩐지 메리쉬가 안젤라 애거스틴과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안젤라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닐 테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드문 일이었다. 메리쉬는 항상 베를리아의 뒤에서 그녀의 그림자로 존재해 왔으니까.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 아니었고 안젤라 에거스틴은 여전히 이 소설 속의 하나뿐인 여주인공이었다.
‘그 앞에서 너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베릴?”
자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그 시선에 메리쉬가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베를리아가 상념에서 깨어나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살풋 메리쉬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손이 그의 몸을 눌러 도로 자리에 앉혀 놓았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메리쉬.”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암녹색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긴 머리칼이 드리운 장막 속에는 오롯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자안과 녹안이 마주치자 베를리아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메리쉬의 입술을 비껴간 자리에 쪽 소리를 내며 입 맞추었다.
“갔다 오면 상 줄게.”
“베릴.”
순간적으로 그 눈동자에 가득 차는 욕망이 좋았다. 메리쉬의 부름에 부러 다시 한번 입술이 아닌 곳에 쪽 소리를 내며 짧은 키스를 내린 베를리아가 그를 떠나 방을 벗어났다.
“별일이네요, 성녀님.”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젤라 애거스틴이 쇼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긋한 차가 눈앞에 놓여있었는데도 그녀는 어딘가 긴장한 것처럼 자신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저를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에 뵈어요. 베를리아 님.”
베를리아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성녀는 격의가 없었다. 좋게 말하자면 그랬다. 그러한 행동을 허락한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나 공평했으니까. 늘 사랑받기만 한 이 특유의 오만이었다.
“제가 성녀님께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허락했던가요?”
웃음을 거둔 베를리아의 얼굴은 아주 빠르게 싸늘해졌다. 기본적으로 온화한 상은 아닌지라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순식간에 전환되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저질렀네요.”
잠시 입을 꾹 닫았던 성녀가 사과했다.
안젤라는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베를리아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저 베를리아 리들턴이 침묵으로 참아왔던 것뿐이었다. 카를로스와 리암, 데니안이 안젤라와 잘 지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안젤라와 잘 지내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진짜’ 베를리아가 안젤라에게 이름을 허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네요. 두 번은 없길 바랍니다.”
아무렇지 않게 상석에 앉은 베를리아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원칙적으로는 성녀가 상석에 앉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그녀는 황태자가 오더라도 딱히 이 자리를 비켜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 오만하고 당당한 자태를 보던 성녀가 머뭇거렸다. 차를 홀짝이며 지루한 시간을 감내하던 베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이 없다면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만. 저는 바빠서.”
안젤라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했다. 당연히 누구도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왜 그대가!”
찻잔을 내려놓는 베를리아의 모습은 곧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듯 보였다. 안젤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왜, 황태자비 후보에 오른 거죠?”
질끈 눈을 감은 안젤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곧 언뜻 결연하기까지 한 그 푸른 눈이 베를리아를 응시했다.
“풋.”
“…베를, 리들턴 백작님?”
노골적인 웃음을 터트린 베를리아로 인해 안젤라가 의아함을 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그 결연함이 우스웠다. 그래서 웃었다.
“아니, 웃겨서요.”
그리고 그것을 그녀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 청아한 푸른 눈이 굳어버리는 것 또한 동시에 일어났다.
“그렇잖아요, 왜 황태자한테 안 묻고 그걸 나한테 물어요?”
“그거야 리들턴 백작님은 언제나….”
베를리아의 물음에 안젤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천사 같은 사람. 물론 그 노력은 인정하다. 그런다고 사실 생각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언제나 카를로스한테 사랑을 구걸했기 때문에요?”
노골적인 베를리아의 말에 놀란 안젤라가 빠르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 변명.
“…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얼굴에 쓰여 있네요.”
담담하고 단호하게 말한 베를리아가 다시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였다. 뭐, 딱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그걸 들켰다고 한들 상관은 없었다. 사실 원작에서 베를리아 리들턴이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건 맞는 말이니까.
“그런데 내가 구걸했다고 한들, 날 황태자비 후보로 올린 게 황태자이면.”
느긋하게 목을 축인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바라봤다. 그 보라빛 시선이 어쩐지 무거워서 성녀는 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거기 가서 물었어야지. 선택한 건 황태자인데.”
“전….”
“왜, 못 묻겠어요? 그 정도도 못 물을 사이야?”
안젤라의 눈동자가 격랑 속에서 마구 흔들렸다. 왜였을까. 그녀는 차마 카를로스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도 참 별거 아니네.”
베를리아가 잔인한 결론을 내려놓았다. 그것에 발끈한 안젤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우리 사이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럼 나한테 무슨 소리를 듣기를 바라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베를리아가 그 가녀리고 애처로워 보이는 얼굴을 바라봤다. 누구라도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작은 사슴 같은 그 두 눈을.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길 만큼 그녀의 심성이 곱지는 않았다.
“내가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무릎 꿇고 매달려서 그 남자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를 얻어냈다, 이런 거?”
“…카를에게 일방적으로 집착하던 건 그대가 맞잖아요.”
정곡을 찔린 듯 안젤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차마 베를리아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물론 들으라는 의도가 듬뿍 담겨 있었다.
“푸핫…!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 남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행할 만큼 자기희생 정신이 강하다고?”
그거야말로 희대의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다. 원하는 바가 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대가를 지불하는 건 희생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건 거래라고 하는 것이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늘 카를로스 에덴버를 원했고 그 대가로 그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 주었다. 먼저 거래의 기본을 어긴 자, 누구인가?
“하지만…”
그래도 안젤라는 카를로스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게 썩 아니꼬웠다.
“그래, 그렇다면 사실을 말해 주지.”
“…그대는 수도 없는 거짓말을 해 왔잖아요.”
말한들 못 믿겠다는 뜻이었다. 정말 단체로 코미디라도 찍는 건지. 제 연인이라는 남자에게 진실을 물을 자신이 없어서 결국 여기로 찾아온 주제에.
“그건 알아서 하고, 난 황태자 따위 더 이상 원하지 않아.”
손을 휙휙 내저은 베를리아가 성녀에게는 잔인할 진실을 꺼내놓았다. 안젤라가 어떤 충격을 받던 알 바 아니었으니까.
“황태자가 나를 황태자비 후보에 올린 것? 이봐, 성녀님. 그걸로 인해서 엿 먹은 건 나야.”
베를리아가 황태자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던 그 당시의 불쾌함을 잔뜩 담아 이야기했다. 안젤라는 믿을 수 없다고 했으면서도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딴 자리 따위 안 줘도 난 잘났거든.”
끝까지 오만한 얼굴로 베를리아가 독과 같은 특유의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필요 없다고. 어때, 설명됐어?”
***
안젤라는 베를리아가 황태자비 후보에 자의로 든 것이 아니란 이야기를 듣고서도 우길 수 있을 만큼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모르던 성녀는 결국 그렇게 돌아갔다.
“늦으셨어요, 베릴.”
그리고 베를리아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허리에 메리쉬의 팔이 감겼다. 풀썩. 자연스레 침대 위에 앉혀진 것은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결국 황태자의 일이었네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목덜미에 제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메리쉬 또한 초인적인 육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베를리아와 안젤라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행히도 메리쉬는 안젤라에 대해서는 일절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베를리아는 안도했다. 그리고 만족했다.
그가 베를리아에게 굳이 카를로스의 존재를 상기시킨 안젤라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멍청한 것이 혹시라도 베릴에게 매달린다면.’
메리쉬는 이 제국의 황태자를 아무렇지 않게 멍청하다고 평하면서도 카를로스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베를리아의 평생을 쥐고 흔든 존재였다. 솔직히 베를리아의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기 그지없었고 그렇기에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되도록이면 평생 카를로스의 존재에 대하여 잊고 살기를 바랐다. 그런 판에 굳이 황태자를 떠오르게 할 성녀가 베를리아를 찾아왔다. 당연히 안젤라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메리쉬는 언제라도 카를로스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 갚아줄 것이 있다고 했기에 참는 중이었다.
‘그놈은 항상 베릴 덕에 목숨을 연명하는군.’
메리쉬가 속으로 카를로스를 비웃었다. 그 멍청한 자는 인정하지 않지만 황태자는 늘 베를리아 덕에 그 목을 부지하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귀찮은 일이었지.”
베를리아의 손이 상냥하게 제게 달라붙은 메리쉬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 손길에 메리쉬의 기분이 막 풀리려던 찰나였다.
쾅쾅!
현관의 도어 노커를 두들기는 소리가 베를리아와 메리쉬의 귀에 들려왔다. 곧 밖에서 확성 마법을 사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를리아 리들턴 백작, 당장 입궁하시라는 황명입니다.”
황제의 명이었으나 누가 베를리아를 불렀는지는 자명했다. 메리쉬는 방금 들었던 생각을 정정해야만 했다.
‘그냥 죽여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