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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9)화 (19/148)

19화. 누가 누가 이기나(2)


 

쾅!

“그럼 지금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안젤라를 황태자비 후보에 올리란 것이냐?”

상대의 추궁에 짜증이 난 듯 카를로스가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성녀를 황태자비로 맞아들이는 건 귀족 영애들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황태자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였던 신전과의 사이가 베를리아 리들턴이 끼어들면서 애매해진 이때 사이를 이 이상 벌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네게는 안젤라가 있잖아! 베를리아가 아니라!”

카를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리암 로베르는 분노하고 있었다. 늘 유하게 구는 그가 평소와 달리 이성을 챙기지 못하는 꼴만 봐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쩐지 의심이 갔다.

“지금 날뛰는 건 누구 때문이지?”

황태자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리암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소리쳤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만약 안젤라가 알면 어떤 기분이겠어!”

잘못 생각했던가, 곧바로 흘러나오는 리암의 대답에 황태자가 미심쩍은 기분을 뒤로 미뤄놓으며 답했다.

“어차피 그 여자가 황태자비가 될 일은 없어.”

카를로스의 대답이 단호했다. 근본이 평민이었던 여자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행실도 딱히 귀족에 어울리는 것들은 아니었다.

자신들에게 푸른 피가 흐른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를 귀족들이 그런 여자가 자신들의 위에 오르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그럼 왜 굳이 베를리아 리들턴을 황태자비 후보에 올린 것이지?”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카를로스와 리암의 설전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기만 하던 데니안이었다. 황태자와 로베르 후작의 고개가 단번에 그에게로 돌아갔다.

“지금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사나운 표정을 지은 카를로스가 데니안을 바라봤다. 그와 담담히 시선을 마주하며 데니안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원래 세웠던 계획은 그게 아니었을 텐데?”

본디 황태자파에서 준비해 놓은 것들은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추천하는 순간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원래는 적당히 흠이 있는 이를 최종 후보로 낙점되도록 유도하여 황태자비 간택 자체를 완전히 무산시킬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물론 조사도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귀족들은 황태자를 두려워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가 존재감도 없던 약소국의 왕녀를 어미로 둔 4황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현재 카를로스는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였다. 그 점이 귀족들에게 하여금 그를 반대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황태자파 외의 가문에 속한 황태자비가 후계자를 낳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렇게 되면 귀족들은 황태자를 제거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황태자비가 필요했다. 지금의 귀족들에게 황태자비 자리란 그런 의미였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후보에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적당히 보잘것없는 가문의 영애를 황태자비 후보로 내놓았을 것이었다.

“너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졌어.”

그런데 베를리아 리들턴은 적당한 상대로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평민 출신인 것과는 별개로 이미 이 나라를 뒤흔들만한 재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대강 구색에 맞추어 유서 있는 가문 중 자작가나 남작가 영애들로 채워졌을 후보들이 모두 백작가나 후작가의 영애로 채워지게 되었다. 솔직히 카를로스가 이 일이 무산되기를 바랐다면 최악의 상황인 셈이었다.

“말해 봐, 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카를로스.”

데니안의 회색 눈이 무겁게 카를로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미안하군. 내가 이성적이지 못했어.”

두 사람의 추궁에 두 손을 들어 보인 카를로스가 순순히 시인하는 듯 보였다. 그가 담담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를 계속 자극하는 행동에 화가 났었다. 단지 그뿐이야.”

마치 대수롭지 않은 분노로 인한 치기였다는 것처럼 황태자가 말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데니안이 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지금 내게 믿으라고?”

그 속에는 빈정거림까지도 담겨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놀란 것은 카를로스뿐이 아니었다. 리암이 데니안을 놀라 바라봤다. 데니안 론델. 그는 지금까지 쭉 충직한 황태자의 신하였다. 그를 지키는 첫 번째 기사였던 그날부터 내내.

“데니안.”

그런 그를 말리려는 듯한 리암의 말도 무시하고 데니안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진짜 충동적으로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카를로스가 데니안을 아는 만큼 데니안도 카를로스를 알았다. 황태자는 절대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는 뜻이다. 의도적으로 그런 선택을 했다던가 혹은 베를리아에 한해서는 그 이성조차 쓸모가 없었다던가.

어찌 되었든 방금 카를로스가 단순히 그뿐이라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소리였다.

“대체 내게 무슨 소리가 듣고 싶은 거지?”

데니안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듯 카를로스의 목소리도 다시 사나워졌다. 카를로스는 솔직히 자신이 이번에 충동적이었다는 걸 인정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그림자라던 남자가 그를 자극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상 그보고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라는 것인지, 저를 추궁해 오는 데니안이 거슬렸다.

“다시 베를리아를 네 근처에 두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게 무슨 소리야?”

“데니안 론델!”

기어코 내뱉어진 데니안의 말에 리암이 멍하게 물었다. 카를로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황태자는 진심으로 불쾌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싸늘해진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그딴 헛소리나 지껄일 거라면 나가.”

리암이 그 멍한 얼굴로 이번에는 황태자의 쪽을 바라봤다. 그의 반응이 어쩐지 유독 격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자신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것일까?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그들에게 있어 베를리아 리들턴이 너무 쉬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도, 리암도, 데니안도 누구도 베를리아에 대해 어렵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네 인생은 베를리아가 없었던 시간보다 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지.”

오늘따라 황태자의 충직한 기사단장은 그만하라는 황태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선 데니안은 여전히 자신이 할 말을 이어서 했다.

“게다가 그녀는 힘과 재력, 능력도 갖추고 있어.”

데니안 론델은 베를리아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면서 그가 그녀를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베를리아가 선하지 않은 것은 여전한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절대 무능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악하다. 그것을 그녀의 전부로 취급했다. 그러나 해 온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기에는 그녀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냈다.

“…헛소리할 거라면 사라지라고 했을 텐데?”

“안젤라보다 베를리아가 더 유용하다고 생각이 든 게 아닌가?”

데니안이 공기 중에 날카로운 말을 던져 넣었다. 그 목소리에는 망설임이라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데니안은 자신의 의심이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데니안 론델은 우직한 사람이었다. 덮어 놓았던 것이 거둬지자 데니안은 더 이상 그 무엇도 외면할 수 없었다.

“데니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성난 외침은 리암의 것이었다. 카를로스는 입을 다문 채로 잔뜩 굳은 무표정으로 데니안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베를리아 리들턴한테 완전히 넘어갔군.”

곧 서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황태자는 마치 데니안이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듯이 그 말을 아무것도 아닌 양 취급해버렸다.

“안젤라하고 베를리아 사이를 재고 있다니 그런 말이 어딨어.”

카를로스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던 리암도 데니안을 중재시키려는 듯 말을 더했다. 데니안의 시선이 이번에는 리암을 향했다. 그 회색 시선에 왠지 움찔하게 된 리암의 금안이 그를 피해 굴러갔다.

“사실 너도 그렇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보며 데니안이 기운 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말하자면 고고하게 살고 싶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지켜가면서. 그러나 이제야 인정한다. 그도 그저 그런 인간일 뿐임을.

“…그게 무슨 말이야.”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죽이기로 했을 때, 너나 나나 모르지 않았어. 안 그래?”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마녀재판에 넘긴 것은 데니안과 리암에게 상의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가 갑자기 카를로스의 곁에 보이지 않음으로서 두 사람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곁을 비울 리가 없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건 카를로스뿐이니까.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데니안도 리암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그녀는 모두가 악하다고 말하는 존재였고… 무엇보다 그들의 기대를 벗어났으므로.

“그런데 이제 와 리암, 네가 베를리아의 편을 든다는 건 분명 원하는 게 있기 때문 아닌가?”

지금까지 베를리아는 늘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사람이었다. 데니안은 이제 그것을 인정했다.

데니안은 베를리아를 미워했다. 왜? 베를리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7황녀를 살려 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리암은 베를리아를 포기했다. 왜? 베를리아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카를로스뿐이었고 그리하여 리암이 원하는 애정은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미안해, 데니안.’

그들은 늘 베를리아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7황녀를 제거하는 일에 있어 카를로스의 명을 거스르지 못한 것은 데니안이나 베를리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데니안에게 사과했다. 데니안은 그 이유를 알았다. 베를리아가 바란 것은 늘 그들이 그녀의 곁에 있는 것뿐이었다.

‘네 자리는 내가 준 거야, 데니안 론델.’

베를리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데니안도, 리암도 그리고 카를로스도. 그 누구도 그들이 이 자리까지 오는데 그녀의 역할이 주요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베를리아에게 많은 것을 받아놓고 그녀가 원하는 것 하나를 주지 않았다. 그건 착취였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카를로스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번에는 그쪽으로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아?”

데니안이 리암에게 말했다. 이래봤자 위선이고 뒤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더는 감히 베를리아를 착취할 수 없었다.

“데니안 론델!”

쾅!

그만하라는 듯 황태자가 아까보다 더 세게 책상을 내리쳤다. 정말로 일순 화가 치민 듯 그의 손에는 오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오라로 인해 단단한 원목의 책상에 금이 가 있었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그런 반응과는 다르게 리암의 금안은 한없이 길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역린이라도 깊숙이 찔린 것처럼.

“물러가라, 기사단장. 이 이상의 발언은 허용하지 않겠다.”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데니안에게 명령했다. 그제야 기사단장은 비로소 고개를 숙여 제 주군의 뜻에 따랐다.

“태자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직선적인 눈빛만은 똑같았다. 황태자의 손에서 부서진 조각들이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

“베를리아 님, 성녀가 찾아왔습니다.”

하녀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다는 말에 베를리아가 잠시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메리쉬의 위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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