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누가 누가 이기나(1)
‘하, 이 썩을 새끼가.’
육성으로 내뱉을 뻔한 욕을 꾹 눌러 삼키며 베를리아가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다잡았다. 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당장이라도 망가트려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 이번에는 내가 엿 먹었네.’
귀족파 귀족들의 시선이 베를리아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에는 의심이 그득그득했다. 그럴 만도 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의 발치에 무릎 꿇고 매달렸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어제 메리쉬가 자리를 비우더니…’
메리쉬와 황태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베를리아의 곁을 비우지 않는 그가 어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카를로스를 대할 때의 메리쉬의 반응을 본다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베를리아가 원하지 않으니 죽이지는 않았지만.
“한 번 해보자 이거지?”
베를리아가 이를 악물고 웃었다. 그녀는 어쨌든 제국의 귀족이었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황태자의 말에 거부를 표할 수는 없었다.
“아를레나 공작님, 이번 발언은 제가 하지요.”
제 앞에 있는 공작을 향해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공작은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베를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설 수 있게 물러나 주었다.
“베를리아 리들턴, 발언하겠습니다.”
모두가 카를로스와 베를리아를 번갈아 보고 있는 그때 그녀가 손을 들어 이야기했다. 원래는 귀족파의 다른 귀족이 맡으려던 일이었다.
“…허한다.”
득의양양하던 그 얼굴에 미소가 조금 가셨다. 그 웃음을 마주할수록 부러 더욱 화사하게 입꼬리를 휘며 베를리아가 말했다.
“샤렌느 델타미아 영애를 황태자비 후보로 추천합니다.”
웃고 있던 카를로스의 얼굴이 다시 굳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베를리아가 오만하게 눈을 빛냈다.
대놓고 거절을 못 한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되지.’
귀족들의 반응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얼마 전까지도 죽이려고 했던 베를리아 리들턴을 제 황태자비로 올리려는 황태자. 그리고 그런 황태자의 말에 다른 여인을 들이민 베를리아 리들턴.
그 속에서 베를리아는 마치 카를로스가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저 홀로 미소 지었다. 그녀는 유유한 어조로 샤렌느 델타미아가 얼마나 황태자비 후보로서 적합한 상대인가를 피력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귀족파 귀족들은 자연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준비해 온 후보에 대한 모든 근거보다 베를리아의 한마디 한마디가 더욱 완벽했기 때문이다.
“…이상 최종 황태자비 후보에 대한 회의는 여기서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기나긴 회의가 끝나고 재상이 마무리 선언을 했다. 그 자리에서 결정된 황태자비 후보는 다섯. 귀족파의 샤렌느 델타미아, 황제파의 나타샤 뒤퐁, 반황태자파의 사만다 베네치노, 황태자파의 엠마 넬리, 그리고 베를리아 리들턴.
그리고 단언컨대 그 자리에서 얼굴이 가장 밝은 자는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
“어제 카를로스랑 뭐 했어?”
마차에 오른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물었다. 그의 체구 좋은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것을 보며 그녀가 픽 웃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메리쉬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앞에서는 순한 양으로 존재하는 법밖에 몰랐다. 그는 제 주인의 추궁에 안절부절못해서 그 녹빛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베를리아의 눈에는 그게 상당히 귀여워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메리쉬는 지금 꽤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제 나름 숨긴다고 숨겼던 모양인데 그녀가 빤히 알고 있으니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베를리아의 손이 뻗어졌다. 그 손이 그대로 메리쉬의 턱을 잡아 끌어왔다. 그 모습이 퍽 귀엽긴 했지만 제게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그 깜찍한 생각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내게 무언가를 숨기려 들거나, 나를 속이려 들지 마.”
“그런 게 아니라…!”
메리쉬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베를리아를 살폈다. 혹시라도 제멋대로 행동하여 그녀가 제게 화가 났을까 봐 불안한 눈빛이었다. 다급하게 변명을 내뱉다가도 감히 베를리아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쉬이, 깨물지 마.”
턱을 감싸고 있던 베를리아의 손이 그대로 올라가 검지로 메리쉬의 아랫입술을 간지럽히듯 매만졌다. 제 주인의 의도대로 힘을 풀자 이에 짓눌려 새하얗게 변해 가던 입술이 제 색을 되찾았다.
“넌 내 것이니까, 멋대로 상하게 하면 안 되지. 메리쉬.”
톡, 톡, 방금 그가 깨물었던 곳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베를리아가 미소했다. 메리쉬가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남자가 좋았다. 아주 당연히도 제가 그녀의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 사내의 태도가 생각보다 매우 흡족했다. 조금 엄했던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절로 부드러워졌다.
“네가 카를로스를 찾아간 걸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 한 마디에 길을 잃고 흔들리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뚜렷이 응시해 오는 그 시선을 똑바로 직시하며 베를리아가 속닥였다.
“카를로스 따위가 무엇이라고. 네가 하고 싶으면 해도 돼, 메리쉬.”
“…정말이십니까?”
“그럼.”
확인하듯 되묻는 메리쉬의 말에 베를리아가 웃으며 흔쾌히 답했다. 그대로 고개를 내려 부드럽게 입 맞춘 그녀가 덧붙였다.
“단, 내게 솔직하기만 하다면.”
“…지금도 솔직해도 되나요?”
제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자안을 홀린 채 바라보던 메리쉬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어왔다. 솔직히 그 늪과 같아진 눈동자 속에 담긴 바는 선명했다. 그러나 알면서도 베를리아는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이 남자의 욕망을 듣는 것은 카를로스를 괴롭히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정말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키스하고 싶어요, …베를리아.”
욕망이 성대를 느릿하게 긁어 올리며 기어코 튀어나왔다. 망설임 하나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누군가를 떠올리니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존칭 하나 없이 감히 주인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메리쉬에게는 어떤 금기를 깨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그가 깨고 나오려는 금기를 간단히 산산이 조각내주었다.
“베릴이라고 부르렴, 메리쉬.”
그녀의 고개가 숙여졌다.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훅 베를리아의 몸이 끌려갔다. 그녀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제 몸을 맡겼다. 그대로 메리쉬의 탄탄한 허벅지 위로 앉게 되자 딱 달라붙는 베를리아의 머메이드 드레스가 말려 올라가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가볍게 그의 몸 위로 제 몸을 안착시킨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밀착했다. 부드러운 여체가 엉겨드는 느낌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간단히 반으로 묶은 암녹색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것은 고작 메리쉬의 일부분에 닿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머리칼이 마치 그의 전신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아, 당신을 더 가지고 싶어.’
베를리아의 입술을 물었다가 핥았다가, 탐하고 또 탐하면서도 그가 생각했다. 메리쉬의 녹색 눈동자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늪이 제 욕망을 조금 더, 조금 더, 더 깊숙이 끌어당기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삼켜버리도록.
숨결을 섞으면 그것만으로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메리쉬는 자기 자신을 과신했다. 그의 욕심은 갈망하고 있었다. 아가리를 쩍 벌린 채로 언젠가 베를리아 리들턴, 그 자체를 삼킬 그 순간을.
‘…그러려면.’
그의 눈이 잔인하게 반짝였다. 베를리아를 이제 카를로스 에덴버 따위는 어찌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제 사라져도 되지 않아?’
메리쉬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제 생각이 꽤 만족스러웠다.
***
베를리아는 카를로스가 변수를 만들 경우를 대비하여 그에게 추천할 영애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샤렌느 델타미아를 알고 있었다. 으레 그렇듯이 로맨스 소설이라면 여주인공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대상 하나쯤은 필요한 법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등장한 게 샤렌느 델타미아였다.
그러니까 샤렌느 델타미아는 원작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악녀쯤 되는 셈이었다.
“왜 그대가 나를 추천한 거죠?”
다짜고짜 베를리아의 저택에 찾아온 샤렌느 델타미아가 물었다. 앙칼진 목소리는 절대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샤렌느 델타미아와 베를리아 리들턴의 사이는 원작에서부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귀족 중에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두 사람의 사이는 더더욱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녀들 모두 카를로스 에덴버를 마음에 두었으니까.
‘이해가 안 가지만.’
물론 지금의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샤렌느 델타미아는 유구한 백작가의 장녀였다. 성녀가 등장하기 전에는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던 사람이기도 했다.
솔직히 베를리아 리들턴이고 샤렌느 델타미아고 이런 대단한 여자들이 모두 좋아할 만큼 카를로스 에덴버가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카를로스 에덴버, 이제 영애가 가져도 상관없어졌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누가 갖든 상관없었다.
‘작가님도 참, 모두가 좋아할 남자면 그런 매력 좀 만들어 주시지.’
베를리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가 보기에 카를로스 에덴버는 얼굴이 왕자님의 정석으로 그럴듯하게 생긴 것 빼고는 딱히 매력이 없었다.
그녀가 살던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소설 속은 달랐다. 얼굴만 반반한 남자를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굳이?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리암 로베르나 데니안 론델도 여주인공의 어장에 들어갈 물고기들답게 잘생겼다. 물론 객관적인 외모만 따지자면 남주인공인 카를로스가 가장 잘생겼지만, 개인적인 취향이란 게 있지 않은가. 솔직히 그녀의 눈에는 카를로스 에덴버보다 메리쉬가 더 취향이었다.
“이제 와서요?”
샤렌느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토록 집착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이런 반응이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 그녀가 딱히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매력을 느낄 리 없었다.
“네, 뭐.”
베를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1도 개의치 않는 듯한 그 모습에 샤렌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영애.”
“…뭐죠?”
“대체 그게 어디가 좋아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었지만 그 질문을 들은 샤렌느의 얼굴은 이번에는 완전히 벙하게 변해버렸다.
***
“대체 무슨 생각이야, 카를!”
황태자의 집무실에 쳐들어온 리암 로베르가 다짜고짜 외쳤다. 그 무례한 행태에 미간을 찌푸리던 카를로스가 엄중히 경고했다.
“자중해, 로베르 후작.”
“묻잖아, 무슨 생각으로 안젤라를 두고 베를리아를 황태자비 후보에 올렸느냐는 말이야!”
물론 황태자의 경고에도 리암은 그것을 들을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도리어 그를 추궁하는 듯한 어투만 더 강해졌을 뿐이었다. 와장창. 그들 사이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