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예정된 꽃길에 불을 질렀다(3)
“내가 사람을 보냈을 텐데.”
그 시선이 제법 흉흉했다. 여러모로 쑤셔댔으니 제법 열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베를리아는 보란 듯이 더 약을 올리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내가 네가 오란다고 오라 가라 해야 할 사람은 아니잖아?”
한낱 귀족이 하기에는 더없이 건방진 말이었다. 감히 황족에게. 그것도 황태자에게. 당연히 그 말이 아니꼬웠는지 벼락같은 황태자의 외침이 뒤따라왔다.
“나는 제국의 황태자다!”
“그래서?”
“베를리아 리들턴!”
뻔뻔하고 또 당당한 반문. 그에 들려오는 외침에 귀가 따가워 베를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시끄럽다는 듯 귀를 막아 보였다.
“하여간 목청 하나는 크다니까.”
베를리아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결코 작지 않았다. 솔직히 대놓고 들으라는 의도였다.
“그래, 난 베를리아 리들턴이야.”
그녀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카를로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일부러 높고 얇은 굽을 신고 와서인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또각또각 소리가 들렸다.
“지금 감히 어디를 올라오는…!”
“올라오면?”
황태자의 말을 끊어낸 베를리아가 픽 비웃음을 터트렸다. 황족만이 오를 수 있다는 그곳에, 그들이 오만하게 앉아 모든 귀족을 내려다보는 그곳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올라섰다.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어?”
스릉- 깡!
“넌 뭐….”
제대로 이성을 잃은 카를로스가 검을 뽑아 든 것과 그 사이를 메리쉬가 갈라놓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메리쉬의 검은 아주 손쉽게 황태자의 검을 막아내고 그의 검을 압박하고 있었다. 메리쉬의 검을 받아내기 위해 카를로스의 손에 핏줄이 서는 것이 빤히 보였다.
황태자의 키가 절대 작지 않았음에도 190cm를 넘어서는 메리쉬의 키와 탄탄한 근육질의 체구는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만, 메리쉬. 물러나 있어도 돼.”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뒤로 다가갔다. 그녀의 팔이 사륵 그의 허리로 파고들어 감아왔다. 살풋 기대어 은근하게 문지르는 그 손길이 꽤 농밀했다. 카를로스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그리로 향했다.
그건 누가 봐도 보통 사이는 아닌 몸짓이었다.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굳었다. 베를리아 리들턴과 카를로스 에덴버 사이에는 암묵적인 선 같은 것이 있었다. 기묘하게도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렇게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에게 쉽게 손 하나 대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메리쉬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거 같아?”
사내는 매우 정중하게 베를리아에게 물었다. 황태자를 힐끔 바라본 그녀가 겨우 저런 상대에게? 라는 듯 여유롭게 답했다. 그 하얀 손이 사내의 뺨을 감싸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카를로스는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무언가가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베를리아가 미소했다. 그 모습이 카를로스에게는 마치 그녀가 돌아갈 곳이 저 사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돌아올 곳은 늘 카를로스 에덴버의 곁이었다. 그 길밖에 모르는 어린 강아지마냥 늘 그녀가 그를 쫓았기 때문이다.
콱!
순간 두 사람의 사이로 검이 날아왔다. 가볍게 베를리아를 안아 들고 그 검을 피한 메리쉬가 사납게 황태자를 노려봤다.
“죽고 싶은 건가?”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 말 한 문장에는 적나라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런 그를 그녀가 달래었다. 베를리아가 피하지 못해서 가만히 메리쉬에게 안겨 있던 게 아니었으니까.
처음부터 딱히 노리고 한 짓은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충동적으로 벌인 짓일 뿐.
“메리쉬.”
물론 메리쉬는 황태자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실력은 그가 훨씬 카를로스를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에서 황태자가 승리한 것은 성녀가 그에게 성검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성검이 없는 지금 카를로스는 메리쉬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메리쉬의 손에 이렇게 쉽게 죽게 하려고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니었다.
“나와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딱히.”
베를리아의 시선이 그제야 카를로스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되지 않았다. 여전히 사내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꼴불견이었다.
“난 있어. 둘이 뒹굴려거든 나중에 해.”
“저급하긴.”
일부러 베를리아를 깎아내리려고 한 언사였지만 그런 것 따위에 그녀가 반응할 리 만무했다. 그 담담한 모습에 반응한 건 오히려 그 말을 한 카를로스뿐이었다. 메리쉬와 카를로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메리쉬가 낮게 경고했다.
“혹시라도 허튼짓은 하지 마.”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내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란 것은 그도 눈치챘다. 원작의 주인공이니 그것을 모를 만큼 카를로스의 실력이 엉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리쉬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조금 전 갑자기 나타났듯이, 홀연 텅 빈 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 황궁에 낯선 이를 들인 것에 대해 먼저 문책해야 맞았다. 그러나 둘 사이의 묘해 보이는 관계가 카를로스의 이성을 흐려 놓았다.
“뭐 하는 짓이야.”
황태자가 책망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아, 얘들은 발전이 없어. 왜 매번 이 질문만 하는 거지?’
이 정도면 쟤네 머릿속에 저 말만 무슨 교과서처럼 박혀 있는 거 아닐까. 디폴트값이라는 건가. 베를리아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상큼하게 웃었다.
“너 엿 먹이는 짓.”
“…뭐?”
반문도 이제는 재미없다. 그렇지만 저 구겨진 얼굴은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나머지가 조금 많이 재미가 없어도 이런 짓을 해 먹는 것이다. 베를리아가 더욱 화사하게 미소를 피워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대단히 잘못했더라고.”
카를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했다. 베를리아의 예상대로 황태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대꾸했다.
“네가 반성 같은 걸 할 리가 없을 텐데.”
‘하, 쟤는 대체 생각이 뇌를 거치기는 하는 건지.’
베를리아가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며 답했다.
“너도 안 하는 걸 내가 왜 해?”
그 당당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답에 카를로스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박수가 절로 나왔다. 물론 마음속에서 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솔직히 나한테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먹튀하려고 한 건 넌데.”
“뭐… 무슨 튀?”
“그렇잖아, 먹고 튄 거 아냐?”
솔직히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이런 가벼운 어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그를 존중하지 않는 듯한 말을 사용하면 자꾸만 구겨지는 카를로스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럼 너한테 화를 내야지. 성녀한테가 아니라.”
솔직히 초반에 성녀를 엿 먹인 건 저 남자들이 어디까지나 네 방패막이 되어 줄 수 없음을 알려 주고 싶은 게 컸다. 물론 약간의 얄미움도 있었지만.
“그러니까 너한테 하려고.”
“…무엇을.”
불길함이 잔뜩 느껴졌다. 황태자의 얼굴에 불안이 가득 드리웠다. 그리고 베를리아가 마지막 빅 엿을 날렸다.
“화풀이.”
아, 그 구겨지는 얼굴이 더없이 상큼했다.
***
‘죽여 버릴까.’
카를로스 에덴버를 보고 있으면 메리쉬는 늘 그런 충동에 시달렸다. 솔직히 충동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안 품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는 감히 바라는 것조차 상상해본 적 없는 주인이었다. 그런 사람을 한없이 하찮게 취급했던 상대에 대한 증오심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그 생각은 카를로스가 저와 함께 있는 베를리아를 보며 꼴같잖게 미간을 구길 때 더 증폭되었다.
“…!”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던 카를로스가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닥을 뒹굴었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는 단검이 박혀 있었다.
“누구냐!”
“경고하러 왔다.”
어둠 속에서 메리쉬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둡게 빛을 발하는 녹안이 카를로스의 푸른 눈과 마주했다.
단둘이 마주하는 메리쉬의 모습은 낮과는 전혀 달랐다. 아까 베를리아의 앞에서 순종적으로 얌전히 굴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그 존재감 자체가 확연히 뚜렷했다. 심지어 그 말투는 베를리아를 닮아 있었다. 오만하고 당당한.
“하, 베를리아의 개가 함부로 황궁으로 기어들어 와?”
“네 기사단의 무능을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빈정거리는 카를로스의 목소리에 메리쉬가 대놓고 픽 비웃음 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그 웃음소리조차 닮아 있어 더욱 황태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죽고 싶은가?”
“내 주인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 죽지 않아.”
무기도 뽑아 들지 않은 메리쉬가 한 발 한 발 몸을 일으킨 황태자의 쪽으로 다가갔다. 저런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남자가 황태자의 집무실에 쳐들어왔는데도 달려오는 기사들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문 앞에 세워 둔 호위들조차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제 죽는 날은 모르는 법.”
황태자가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쾅! 하고 그의 몸이 벽에 틀어박혔다.
“큭…”
“그러니까, 제 죽는 날도 모르는데.”
카를로스의 목을 한 팔로 압박하며 그를 벽에 짓누른 메리쉬가 말했다. 이미 카를로스가 들고 있던 검은 저쪽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방만하게 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살기등등한 녹안이 그를 압박했다. 본능적으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왜냐하면 카를로스는 방금 메리쉬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때 방금 난 소리 때문에 다른 이들이 눈치를 챘는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억해, 못 죽이는 게 아니라 안 죽이는 거라는 걸.”
메리쉬가 카를로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녹색 눈동자에는 언제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듯한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벌컥!
“태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기사들이 몰려왔을 때는 이미 그 자리에 카를로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동안 굳어 있던 카를로스는 그 뱀 같은 녹색 눈이 사라지자 그제야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수치심과 그로 인한 분노가 몰려들었다.
“으아아아악!”
그가 분노하여 책상을 모두 쓸어내렸다. 와장창. 연이어 그런 파열음이 들려왔다. 주변의 모든 장식품이 산산이 조각나서야 그 자리에서 씩씩거리던 카를로스가 푸른 눈을 번뜩이며 메리쉬가 사라진 곳을 노려봤다.
‘감히 이 나를 능멸해?’
아득 이를 가는 소리가 모든 것이 부서진 공간을 울렸다.
***
“오늘 황태자비 후보를 정하기로 한 걸 기억하겠지.”
다시 열린 중앙 회의, 어쩐지 이 일을 그토록 꺼리던 카를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다른 귀족들이 어떤 영애를 황태자비 후보로 추천하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베를리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카를로스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그의 입가가 웃고 있었다.
“나는 리들턴 백작을 황태자비 후보로 올리고 싶네.”
그 시선은 요요하게 빛나던 자안이 일그러질 때까지 그녀를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