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예정된 꽃길에 불을 질렀다(2)
“할 말이 있으면 해, 메리쉬.”
저택으로 돌아와 내일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있던 베를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고 한 이후 그는 더 이상 그녀의 그림자 속에 숨어만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한순간에 바뀌던가. 여전히 많은 것들에 서툴렀다.
“…아닙니다.”
특히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 같은. 그건 아마 베를리아 리들턴과 메리쉬의 시작이 주인과 그림자의 관계였던 탓이 클 것이다.
“정말로 없어?”
어느 정도 도와 줄 생각은 있었지만 떠먹여 줄 의향은 없었다. 그녀는 메리쉬가 자신으로 인해 제 감정을 참을 수 없기를 바랐다. 그런 직관적이고 선명한 감정을 원했다. 그러니 메리쉬가 변해야만 했다.
물어볼 때 답하라는 듯 베를리아의 짙은 자안이 빤히 그를 향했다. 그 단호한 시선은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혹시 아직도.”
메리쉬가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베를리아는 그렇게 말했을 뿐 어떤 한계를 정해 두지 않았다.
그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감정이 남으셨습니까?”
짐짓 결연하기까지 한 녹안의 그 시선 아래로 어두운 감정이 내리깔렸다. 그건 대상이 분명한 적의였다. 그리고 질투였다.
메리쉬는 지금까지 카를로스에게 질투를 품은 적이 없었다. 세계의 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제 신을 낮잡아보는 카를로스가 싫었어도 감히 질투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신을 자신이 잡을 수 있다고 신이 직접 말해 주었다.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자꾸만 보란 듯이 제게 여지를 줄 때마다 베를리아에 대한 욕심이 점차 크기를 키우니 질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한 말이 신경 쓰였어?”
베를리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되물었다. 어쩐지 좀 뚱한 기색이 느껴지더라니, 그런 걸 마음에 두고 있었을 줄이야.
‘귀엽게 구네.’
그녀가 마구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가라앉혔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매우 탐이 났지만 메리쉬가 보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베를리아 리들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감정, 남아 있지….”
그녀가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 한마디에 그 커다란 몸집이 움찔거리는 게 조금 더 놀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괜한 오해는 사양이었으므로 그녀는 곧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난 황태자가 아주 제대로 망했으면 좋겠거든.”
다시 그 한마디에 잔뜩 굳어 있던 어깨가 풀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메리쉬는 체형 자체가 옷 위로도 충분히 근육질이라는 것이 느껴질 만큼 각이 잡혀 있는 사내였다. 이렇게 자세히 있으면 그 움직임들이 아주 세밀하게 보였다.
특히나 베를리아 리들턴 앞에서만은 아주 쉽게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특성상 더더욱.
그래서 즐거웠다. 그래서 좋았다. 일일이 재지 않아도 이렇게 손만 뻗으면.
“키스할까?”
가질 수 있으니까.
그녀가 문득 물었다. 그저 제 말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든 충동이었다. 그대로 팔을 뻗어 메리쉬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압박할만한 체구를 가진 사내는 그 가는 팔에 너무나 쉬이 끌려왔다.
그대로 두 사람의 고개가 서로에게로 기울었다. 곧 그림자가 겹쳐졌다.
***
회의장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현재의 정세는 기묘했다. 원래는 황제가 될 후보로도 여겨지지 않았던 카를로스 에덴버가 황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귀족파와 황제파가 지지하던 후보들이 모두 죽었다. 그들이 혹시나예비로 생각하던 황족까지 전부다.
그러니까 지금 귀족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네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황태자파와 귀족파, 중립파 그리고 반황태자파로.
“오늘 태자전하께 건의 드릴 중대 사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귀족파의 수장인 아를레나 공작이 나섰다. 당연히 모두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무수한 시선들 속에서도 공작은 1도 개의치 않았다.
‘역시, 언니 멋져…!’
물론 아를레나 공작은 상당히 나이가 있었다. 그러나 원래 멋지면 다 언니인 법이다. 그녀가 속으로 주책맞은 생각을 하며 상황을 여유롭게 관전했다.
이제 곧 벌어질 일은 절대 놓치지 않고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예정이었다. 고대하던 순간이니까.
“발언하시오, 아를레나 공작.”
공작에게 발언을 허락하면서도 카를로스의 시선은 베를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왜냐하면 이 회의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녀가 보란 듯이 아를레나 공작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어쩐지 불안했다. 그리고 공작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짙게 걸리는 베를리아의 미소가 그 불안함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황태자비의 간택을 주청 드리는 바입니다.”
그 한마디의 무게가 회의장 안의 모두를 짓눌렀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귀족의 눈이 빠르게 황태자와 공작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쥐 죽은 듯이 사위는 고요했으나 모든 이들의 속이 시끄러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유유히 웃고 있는 것은 오직 베를리아밖에 없었다.
공작의 뒤편으로 은근슬쩍 몸을 숨긴 그녀의 입가에 더없이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카를로스 에덴버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마구잡이로 구겨져 있었다.
예로부터 왕이 그 세력을 늘리기 좋은 방법으로 널리 쓰인 것이 혼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가 이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혼인이 동맹이 되는 경우는 원하는 이를 제 옆에 앉힐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현재 정세가 네 개의 세력으로 분열된 상황에서는 그걸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신전이 황태자의 뒤에 있었다면 달랐겠지.’
베를리아가 삐뚜름하게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황태자파가 아닌 귀족들이 제 딸을 황태자비로 들이밀지 않은 이유는 황태자의 뒤에 신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젤라는 성녀로서 온 백성에게 지지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신전 또한 황태자와 안젤라의 사이를 지지하고 있었으니 귀족들이라고 한들 안젤라가 황태자비가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황태자의 세력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귀족들로서도 황태자비 간택은 쉬이 꺼내 들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왜? 베를리아가 신전과 황태자의 사이를 떼어 놓았으니까.
‘공작님께서 염려하시는 바는 제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날 베를리아는 최근에 자신이 신관에 기부한 내역을 아를레나 공작에게 보여 주었다. 공작이 베를리아의 뜻을 알아듣기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카를로스는 황태자가 되기 전까지 지지기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황자였다. 그러니 그가 신전을 제 편으로 할 만큼 거대한 기부금이 베를리아를 통해 므시아에서 나왔으리라는 것은 짐작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그 막대한 기부금은 지금까지 늘 황태자의 이름으로 신전에 기부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에 관한 기부자의 이름이 베를리아의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 와중에 황태자를 지지하던 타피나 남작가가 역으로 고발을 당했다.
베를리아가 황태자를 공격한 정황이 명백해지는 셈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신전이 황태자를 무조건적으로 그를 비호하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그러니 아를레나 공작이 황태자비에 관한 건을 기꺼이 안건으로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황태자는 따르는 무리보다 그러지 않는 무리가 더 많았다. 유력한 황위 계승자들이 모두 죽고 갑작스럽게 카를로스가 황태자 위에 올랐다. 뿌리 깊은 한쪽 정파의 소속이 아닌 이상 누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해도 그 또한 아주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전이 지지하지 않는 안젤라는 황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낮았다. 노골적으로 카를로스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내가 황태자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이른 말이군.”
“이르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는 병환 중이시고 황가의 핏줄은 이제 태자 전하뿐이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황태자의 말에 반황태자파의 수장 라미르니에 후작이 반박했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해 황태자를 바라봤다. 그것은 꼭 먹이를 눈앞에 둔 이리의 것을 닮아 있었다.
정계에 잔뼈가 굵은 그는 역시 아를레나 공작의 행보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하필 변고가 일어나서 말이지요.”
덧붙이는 말에는 가시가 가득 박혀 있었다. 카를로스를 제외한 모든 황위 계승권자들의 죽음. 그게 단순한 변고가 아니었음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구태여 언급하는 것은 분명 황태자를 노리고 한 짓이었다.
“그렇게 하는 편이 황제 폐하께서도 안심되실 겁니다.”
카를로스가 의자의 손잡이를 꽉 쥐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아난 공작은 황제의 오랜 충신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사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황태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느 정파에게든 이 시기에 황태자비감이란 카를로스를 견제하기에 그보다 적합할 수가 없는 패였다.
“…그대들의 의견이 그렇다니 나도 더 이상 반대할 수만은 없군.”
이쯤 되면 먼저 황태자파에서 나서야 옳았다. 그러나 가장 큰 축인 기사단장과 로베르 후작이 입을 닫고 있었다. 게다가 베를리아는 이제 그의 편이 아니었고 이 자리에 성녀가 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카를로스로서는 한발 물러서야만 했다.
“다만, 황태자비란 차기 제국의 어머니가 될 사람.”
그렇다고 해서 준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황태자비 같은 중요한 자리에 대한 결정권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황태자가 사족을 덧붙였다.
“다음 중앙 회의에서 추천을 받도록 하지.”
“태자 전하의 뜻을 받듭니다.”
모두가 만족스럽지는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회의가 끝날 즈음 카를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회의가 끝나고 남도록, 리들턴 백작.”
베를리아가 황태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차피 무서울 건 없었으니 그녀는 참으로 정중히도 답했다.
“그러지요, 황태자 전하.”
그 꼿꼿하게 펴져 있는 허리나 고개가 참으로 정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