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5)화 (15/148)

15화. 예정된 꽃길에 불을 질렀다(1)


 

“베를리아, 베를리아!”

쾅!

잔뜩 성이 난 카를로스가 책상을 거칠게 내려쳤다. 그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분을 삼키지 못했다.

‘이번에는 내가 알아서 할게, 카를.’

평소의 안젤라답지 않던 그 얼굴이 선명했다. 시선은 저와 마주하지 못한 채 땅바닥에 박혀 있었고 손은 잔뜩 긴장한 것처럼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러나 늘 부드럽던 어조만큼은 단호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안젤라 애거스틴이 아닌 것처럼.

‘…며칠 전에 황가의 묘지에 다녀왔습니다.’

곧이어 뜬금없이 말을 꺼내던 데니안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황가의 묘지. 그가 거기서 누구를 추모했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지금까지 그곳은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인 기피의 대상이었으니까.

모든 것들이 기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그리고 카를로스는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서 곧 그것이 누구로 인해 일어난 일인지 알아냈다.

두 사람 모두 베를리아 리들턴을 만난 이후로 그런 모습을 보였다.

‘널 사랑하지 않아, 카를로스 에덴버.’

그날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렇게 당당하게 선언한 이후로 그녀는 모든 곳에서 카를로스의 일을 훼방 놓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끌겠다, 이건가.”

그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황태자로서는 매우 열 받게도 그런 것이라면 베를리아의 작전은 매우 성공한 셈이었다. 거슬려서 미칠 것 같았고 그래서 온통 신경이 그리로 쏠려 있었으니.

물론 그건 진짜 베를리아가 알게 되면 코웃음을 치다 못해 뒷목 잡을 일이었다.

“가서 베를리아 리들턴을 불러와.”

자신의 그림자를 불러들인 황태자가 명했다. 그렇게 제 관심을 끌고 싶었다면 그에 걸맞게 응해 주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카를로스 에덴버의 지대한 착각에 불과했다.

“싫은데? 내가 왜.”

베를리아는 갑작스러운 그림자의 등장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도리어 단칼에 그 명을 거절해버렸다.

“지가 뭔데 날 오라 가라야.”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쇼파에 기대어 앉은 채로 메리쉬가 땅에 처박은 황태자의 사자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미소했다.

“볼 일 있으면 직접 오라고 해.”

***

카를로스가 제멋대로 불러들이려고 해서 아니꼬웠던 것도 있었지만 베를리아가 바쁜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 만나야 할 상대가 있었으니까.

“…그대가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베를리아 리들턴의 영향력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녀재판부터 황족 시해 죄까지 손쉽게 벗어난 데다가 그 여세를 몰아 단번에 중앙 의원에 복귀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하대를 하고는 있어도 상대가 기본적인 예의는 차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가치가 상당히 평가 저하된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제가 귀족파의 수장인 아를레나 공작님을 뵙자고 한 이유가 무엇 있겠어요.”

베를리아의 어조가 제법 상냥하니 호의적이었다. 그도 그럴만한 게 사실 그녀는 원작을 읽을 때 아를레나 공작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버프를 받은 카를로스를 상대로도 그 위압감과 능력만큼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간의 세월로 인한 노련미까지 더해져 그녀를 상대하는 데 있어 황태자가 꽤 애를 먹기도 했다.

‘솔직히 상황 판단 능력도 카를로스 에덴버보다 낫잖아?’

베를리아가 제 안에서 황태자의 평가를 가차 없이 깎아내리며 생각했다. 아직도 제게 미쳐있던 베를리아 리들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 매번 우습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쪽에 동조하겠다는 것인가? 리들턴 백작, 그대가?”

대놓고 귀족파니 황제파니 말을 꺼내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어쨌든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황제를 섬겨야 하는 황제의 신하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베를리아의 말은 자신의 의도를 단 하나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아를레나 공작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럴 만도 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 아니던가.

“그렇게까지 해 줬는데도 저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베를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러나 내뱉는 말은 선명히 날이 서 있었다. 물론 눈앞의 상대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죽어 주려고 했던 게 아니고?”

솔직히 베를리아에게 내려졌던 죄명들에 비해서 상황은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화되었다. 황태자는 정말로 베를리아 리들턴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도 그 상황에서 벗어났다면 순전히 그것은 그녀의 능력이었다. 귀족파의 수장인 아를레나 공작이 그쯤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런 베를리아 리들턴이 굳이 죽을 일이라면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맞아요, 그러려고 했죠.”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차피 그녀가 빙의하기 전에 베를리아 리들턴이 해왔던 행보는 너무 그 길이 명확해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마지막으로 제게 한 말이 뭔지 아세요?”

어차피 카를로스가 그녀가 처음 빙의했던 날 찾아온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확한 대화 내용을 공작이 알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베를리아는 굳이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실대로 말해도 정나미 떨어지기에 딱 좋은 개소리였으니까.

“기껏 감옥까지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자기를 위해 얌전히 죽으라고 하더라고요.”

달그락, 그녀가 부러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 불편한 심기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 순간 알았죠.”

물론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 순간까지도 카를로스를 향한 사랑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죽어야만, 메리쉬가 리들턴이 되어 진짜 악역이 각성할 테니까.

그것으로 베를리아 리들턴은 원작에서 제 쓰임을 다했다.

“아, 내가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에도.”

그런데 과연 그녀가 자신이 누군가의 각성을 위한 재료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도 그렇게 순순히 죽어 주었을까?

“이 남자는 내가 죽기만을 기다려 왔구나.”

베를리아 리들턴은 죽는 순간에도 죽음으로써 카를로스의 기억 속에 각인되길 바랐다. 그러나 황태자에게 베를리아 리들턴의 죽음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뒤돌아서면 잊어버릴 것에 불과했다.

‘차라리 평생을 앓는 이로 사는 게 당신이 그나마 그에게 남는 방법이었을 텐데.’

죽은 자의 이름은 결국 산 자의 삶 앞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방법은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기억해 주는 것밖에 없었다.

‘너만은 기억했어야지.’

적어도 자신을 위해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라면 최소한의 도리로 그 정도는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원작은 정체를 숨기던 메리쉬 리들턴이 풀네임을 드러냈을 때 이렇게 서술한다.

[그제야 떠올랐다. 카를로스의 인생에는 그런 여자가 존재했던 적도 있음을.]

베를리아 리들턴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듯한 황태자의 반응에 메리쉬의 분노는 폭발한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마지막까지도 겨우 그렇게 소모될 뿐이었다.

“내가 죽으면 황태자는 나를 완전히 잊겠구나.”

그녀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소설의 전개를 위한 장치 중의 하나로 소모 당하는 건 거부할 수 있는.

“제 죽음을 기억조차 해 주지 않을 사람을 위해 죽기에는 제가 누릴 수 있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아를레나 공작은 베를리아의 말을 듣는 내내 반응이 없었다. 그 담담한 모습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이 모두 마치고서야 마침내 공작이 나직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걸 몰랐나?”

힐난도 물음도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찻잔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솔직히 그녀는 정말 정말 정말로 카를로스 에덴버가 싫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남자 주인공이 그토록 싫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 주인공이 그렇게 싫었는데 왜 원작을 계속 읽었었는지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씁쓸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런 카를로스에 대한 아쉬움 한 점 없는 순수한 분노가 아니라.

“…부정하고 싶었던 거죠.”

애써 감정을 추스른 것처럼 뒤늦게 말을 이었다. 공작은 노련하고 머리 좋은 정치가였다. 그 앞에서 표정 관리까지 하며 무리수를 두느니 차라리 가리는 게 나았다.

“사랑했으니까.”

베를리아 리들턴은 정말로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했다. 비록 그 사랑이 집착으로 얼룩져 있어 결코 아름답지 않더라도. 미련할 정도로, 사랑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사실 그녀가 보기에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저 외로운 소녀가 외로운 소년을 만났을 뿐이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제가 정한 길 외에는 꺾일지언정 휘어지지는 않는.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 아니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그대를 믿는다고 치고.”

베를리아의 말을 가만히 듣던 아를레나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 물음에는 굳이 숨기지 않은 불신이 담겨 있었다.

“나와 무엇을 도모할 셈이지?”

베를리아가 지금까지 보인 행보가 있었으니 단번에 그녀를 믿을 리가 없었다. 베를리아가 귀족파에 가담하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음에도 계속해서 베를리아의 생각만 물어보는 게 그러했다. 베를리아에게 어떤 빌미도 내어 주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그게 딱히 서운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리라 생각했다. 황위 계승 과정에서 베를리아가 난입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를레나 공작은 황가를 자신의 손에 쥘 수도 있었을 사람이었다.

베를리아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이 있을 리 없거니와 누구라도 ‘황태자의 미친개’라고 불리던 이를 대상으로 쉬이 배신하리라 여길 수 없을 것이었다. 설령 그게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니 능력 있는 공작이 베를리아를 의심하는 것쯤이야.

“공작님께서 황태자비의 간택을 주청 드려 주세요.”

아를레나 공작이 반문하기 전 베를리아가 웃으며 밀봉된 서류를 내려놓았다.

“공작님께서 염려하시는 바는 제가 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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