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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4)화 (14/148)

14화. 악녀는 스스로 존재를 증명한다(5)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이번에는 베를리아가 고개를 틀어 조금 깊게 입술을 맞물렸다. 찰나의 순간 작은 마찰이 일었다가 다시 떨어진다. 그녀가 손끝으로 메리쉬의 뺨을 간지럽히며 웃음기를 담고 물었다.

“글쎄요.”

메리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지만 늘 베를리아는 이런 것들에 약했다. 춥고 배고프지만, 누군가 가여워 동정을 베풀 만큼 예쁘고 유순하지는 않은 것. 맨 밑바닥을 뒹굴어 독하고 더러운 것.

그래서 누구나 눈살을 찌푸리고 피해버리는 것. 그 누구도 온기는커녕 동전 한 푼 던지지 않는 것.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런 베를리아 리들턴이 가장 먼저 만난 것이 카를로스 에덴버가 아니던가.

‘그 정도 흉내쯤이야.’

매 순간을 베를리아 리들턴의 그림자로 살아왔던 메리쉬였다. 그러니 이런 의뭉을 떠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퍽 가여워 보이니.”

그녀는 사내의 눈동자에 맴도는 어두운 감정을 알면서도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로 자신을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쯤이야, 애교로 넘겨 줄게.’

메리쉬의 턱을 잡아들고 그를 내려다보며 베를리아가 고개를 내렸다. 신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선사하듯이 입을 맞췄다.

“그쯤이야 들어 주도록 할까.”

그대로 베를리아의 팔이 메리쉬의 목에 감겼다. 그의 팔이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긴다. 둘의 틈 사이로 그 무엇도 감히 존재하지 않도록.

***

“안녕하세요, 성녀님.”

베를리아를 마주한 안젤라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건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군중의 무리 속에서 자신은 도태된 자가 되어버리고 그 자리를 다른 이가 채운 것은.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언제나 안젤라의 앞에서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하고 초조해 보이던 사람.

“…오랜만이네요, 리들턴 백작님.”

성녀는 오늘따라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참 낯설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 속 안젤라 애거스틴은 늘 여유 있고 우아했다. 그건 그녀가 살면서 내리받아 온 관심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타고난 것들이었다.

겨우 그런 게 바닥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날처럼 남들 앞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안젤라도 몰랐을 것이다. 고작 그 한 번이 사람을 이토록 움츠러들게 할 것이라고는. 그러니 지난 연회의 사건 한 번 만에 이토록 움츠러든 것이겠지.

“그날은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안젤라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일부러 베를리아는 그날의 파티를 언급했다. 그리고 예상에 어긋나지 않고 반응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안젤라 애거스틴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저 그녀는 자신은 가진 것을 갖지 못해서, 그것을 가지려고 발버둥 치며 점점 추해지는 베를리아 리들턴을 위에서 굽어보며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안타까워만 했을 뿐이다.

‘네가 감히 날 동정할 처지는 아니었을 텐데.’

그리고 그건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녀는 자신이 상당히 성격이 나쁘다는 것을 인정했다.

안젤라가 베를리아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려 주고 싶었다. 네가 기대고 있는 그 다른 모든 이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얻는 힘. 그건 진짜 힘 앞에서는 얼마든지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다는 것을.

정말 지극히 이기적이고 못된 심보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궁금해, 안젤라.’

“어쩌다가 성녀님께서 그런 옷을 입고 오셨는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인 안젤라의 모습은 낯설다. 그녀의 고개는 아래로 떨어질 일이 없었다. 모두가 단단히 성녀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꼭 자신 혼자 서야 하는 순간도 다가온다. 안젤라 애거스틴이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원작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을 뿐.

‘지금 너를 지켜 주는 이들이 주는 힘이 진짜가 아니란 걸 알아도.’

그러나 베를리아는 원작의 길을 모두 틀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러니 예정된 보드라운 꽃길 따위는 이제 없는 거다.

‘너는 카를로스 에덴버를 끝까지 사랑할까?’

그리고 또 궁금했다. 그녀가 보기에 황태자는 유순하고 제가 원하는 대로 사랑해 주는 아름답고 착한 성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만약 안젤라가 그 힘에 기대어 그 힘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황태자 너는 안젤라 애거스틴을 지금과 똑같이 사랑할까?’

소설이란 것이 원래 다 그런 법이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자아낸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 환경이 모두 망가져도 너희들은 사랑할 수 있을지.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사랑일지.

“황태자 전하께서 이번에는 신경을 못 쓰셨나 봅니다.”

안젤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계속해서 피어난 불씨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불씨야, 커져라. 커져라. 커져서 거대한 불꽃이 되고 그렇게 화마가 되어라.

그리하여 끝내는- 모든 것을 잡아먹어 버려라.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빙의하자마자 죽이려 한 것 빼고는 이 세계가 그녀에게 잘못한 것은 딱히 없었다. 그녀가 하는 행동의 모든 발단은 그저 소설을 읽으며 도리어 악녀 베를리아 리들턴의 처지에 공감했던 그녀의 사감일 뿐이었다.

‘까짓 악녀, 그냥 하지 뭐.’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정말로 악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이 그녀에게 스며들수록 이 감정들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그들 안에서 점차 커질 저 불씨처럼.

“…카를은 매우 바쁘니까요.”

성녀가 내놓는 변명은 겨우 그것이었다. 그 변명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안젤라가 언제 이런 변명을 해보았겠는가. 모두가 그녀의 주변에서 그녀를 향한 황태자의 사랑을 찬양하기 바빴을 진데.

보라, 꼭 쥔 안젤라의 손만 봐도 그녀의 초조함이 드러난다.

“그런데 성녀님.”

사랑받기를 타고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그것을 믿음의 기반으로 하여 늘 여유롭고 당당하다. 그러나 그것밖에 없는 자들은 그 기반이 무너졌을 때.

“성녀님은 황태자 전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시나 봅니다.”

과연 어디를 딛고 설 것인가?

“리들턴 백작…!”

안젤라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제풀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느라 바쁘게 굴러다니는 눈동자와 움츠러든 어깨는 마치 겁먹은 작은 동물 같았다.

“그, 무슨 무례한 말인가요.”

“푸훗, 사실이 아닌가요?”

무례한 게 맞았다. 무려 성녀의 말에 이렇게 대놓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으니. 그러나 지금 여기서 베를리아를 말려 줄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성녀와 만나기 전 베를리아의 요구로 대신관이 주변인을 모두 비웠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성녀님이 부릴 수 있는 수족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진짜 힘이란 이런 것이다. 스스로 휘두를 수 있는 것. 누군가의 옆에 서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왜 성녀님의 선택이 아닌 태자 전하의 선택으로 인해서 그런 꼴을 당하셨죠?”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100% 카를로스의 잘못은 아니었다. 사교계에 나설 복장을 점검하는 건 그곳에 발걸음하는 누구라도 당연히 스스로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게 상식이다.

성녀는 안일했다. 그러나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황태자였다. 늘 카를로스만 믿고 있어도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카를로스는 저를 위해서….”

성녀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수치심으로 달아오른 얼굴은 제법 가여웠다.

‘미안해요, 베를리아.’

자신을 동정하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그 착하고 순진한 얼굴로 안젤라 애거스틴은 자신을 해치려던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사과했다.

‘하! 당신이 뭔데 나한테 사과해!’

그리고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 사과에 치를 떨며 악을 쓰고 소리쳤다.

‘미안해요, 내가 당신이 원하던 사랑을 모두 가져가 버려서.’

안젤라 애거스틴은 그 순간 진심으로 베를리아 리들턴을 안타까워하고 동정했다. 그녀가 보기에 베를리아 리들턴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니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자신과는 달리.

‘네가 뭔데 감히, 나를…!’

그리고 그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베를리아 리들턴은 수치심으로 떨었다. 아마 그녀가 진심으로 성녀를 미워하게 된 순간이 바로 그때일 것이다.

성녀는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가졌다. 사랑받기 위하여 끝없이 노력하고 발버둥 치던 베를리아 리들턴과는 달리.

“정말 성녀님을 가장 위했다면 왜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날 카를로스가 안젤라에게 선물한 드레스는 분명 최선이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어차피 성녀가 입는 것이 유행이 되는 시대, 더 이상 깊이 염려할 것이 무엇 있었으랴.

분명한 건 최선이 아니었다는 거다. 대답할 거리를 찾느라 방황하는 안젤라의 시선이 갈 길을 잃어 처량했다.

‘널 증오해, 안젤라 애거스틴…!’

베를리아 리들턴의 외침이 귓가에 울렸다. 그래, 자신은 적어도 노력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그건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걸 누가 감히 안쓰럽게 여기고 동정하는가.

그녀는 멈추지 않고 준비해 온 혓바닥 위의 날카로운 비수를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꽂아 넣었다.

“아, 이제는 변명조차도 못하는 건가요? 그것도 카를로스가 해 주지 않으니까?”

베를리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악의 꽃이 그 자리에 화려하게 피어나 독으로 가득한 향을 풍겼다. 그러나 그 향은 형체가 없어서 그 누구도 자신이 중독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리라.

“저런, 여기에 대체 성녀님은 어디 있나요?”

부디 지금 당신에게 꽂아 넣은 이 비수가 황태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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