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악녀는 스스로 존재를 증명한다(4)
“그러면 그 다른 방법, 네가 찾아서 했어야지.”
극적인 순간의 연극배우처럼 미소를 삽시간에 걷어낸 베를리아가 그를 직시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로 카를로스를 살렸다. 죄를 지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데니안 론델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그는 베를리아 리들턴보다 먼저 4황자를 구할 방법을 찾았어야 한다.
[“미안해, 데니안. 그렇지만 나는 다시 기회가 온다고 해도 똑같이 할 거야.”]
[“네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어.”]
[뻔뻔하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 얼굴에 죄책감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과는 악어의 눈물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데니안은 그녀가 더없이 증오스러웠다.]
“네가 조금만 노력했다면…!”
“너도 못 한 노력, 내가 못했다고 비난하는 거 우습지 않아?”
데니안 론델은 모르겠지만 그때의 베를리아 리들턴은 진심으로 그에게 죄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미 죄를 지은 자가 그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그건 기만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런 미안함 따위도 없었다. 그래서 더 냉정하게 말할 수 있었다.
“넌 힘이 있었어! 그 힘을 함부로 휘두른 거야!”
그 냉정함 앞에서 데니안의 목소리는 점차 격해졌다.
“그러면 카를로스를 피해서 7황녀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가지 그랬어.”
그럴수록 베를리아의 목소리는 더욱 침착해졌다. 그리고 데니안의 격렬함을 그녀의 싸늘함이 차게 꺼버렸다.
황위 계승권은 본인이 그것에 뜻이 없더라도 사용할 방법이 많았다. 혼인할 때 그것을 쥐고 있으면 자식에게도 물려줄 수 있었다. 제 배우자를 대신 내세우거나 다른 황위 계승권자를 지지하는 방법도 있었다.
황위 계승권을 지니고 있냐 아니냐에 따라서 황족으로서의 가치는 무궁무진하게 달라졌다.
그렇기에 7황녀 또한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황족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데니안이 말하는 상대가 카를로스인지 7황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 변명이 가소로웠다.
“황녀는 힘은 없지만 스스로의 가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했지. 그런 목숨을 네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뜻을 꺾으면서 지켜 주길 바랐다니, 그것 참 뻔뻔하네.”
카를로스에게 위협이란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힘없는 4황자에게 위협이란 일상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어떤 분란의 씨앗도 남지 않기를 바랐다.
“왜? 카를로스한테 7황녀는 살려달라고 해보지 그랬어, 아니면 왜 죽였느냐고는 따져봤어?”
“죽인 건 너다. 황태자 전하에게 책임 전가하지 마.”
“푸하하…! 책임 전가? 공동 책임이 아니고?”
그녀가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물론 그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어 그 소리는 매우 작위적이었다.
“난 너희들 바람에 내 목까지도 내어 주려던 사람이었는데?”
카를로스는 빈틈없이 안정적인 황위 계승을 바랐다. 그리고 데니안 론델은 그런 제 주군에게 기사로서 끝까지 신의를 지키며 그 곁을 지켰다. 7황녀를 데리고 도망가지도 그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충성심 강한 황태자의 기사였다.
“지킬 힘도 없고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베를리아가 손을 뻗자 기괴하게 꺾였던 데니안의 손가락과 어깨가 모두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너도 알았잖아, 7황녀가 죽으리라는 걸.”
베를리아 리들턴과 카를로스 에덴버가 가해자였다면 데니안 론델은 방관자였다. 감히 누가 누구에게 죄를 묻는가.
“너는 그냥 나를 원망하는 게 가장 쉬웠던 거야.”
‘미안해. 미안해, 데니안.’
그날 베를리아 리들턴은 무릎을 꿇은 채 한없이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그리고 데니안 론델은 그것을 외면하고 가버렸다.
그 후로도 한참을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제 죄를 고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베를리아 리들턴은 차마 제가 상처 입힌 제 친구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나만이 네 분노를 받아줄 테니까.”
그 후로 베를리아 리들턴은 데니안의 냉대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사랑한 사람을 죽인 이를 용서하지는 못하리라.
카를로스 에덴버만은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는 데니안 론델의 모든 원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베를리아의 인간관계는 메리쉬를 제외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우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
그는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시선은 베를리아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래? 그럼 황태자한테 물어봐.”
기묘한 미소가 베를리아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래, 마치 맹수가 이미 다 잡은 사냥감을 가지고 놀며 그것의 발버둥을 지켜볼 때처럼.
‘데니가 7황녀님을 좋아해, 카를.’
“데니가 7황녀님을 좋아해, 카를.”
베를리아 리들턴은 정말로 데니안 론델을 아꼈다. 황위 계승권자가 모두 죽기 전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거든.”
베를리아 리들턴은 분명히 4황자였던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카를로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짙어진 그 미소가 물속에 퍼지는 독과 같았다.
***
데니안 론델은 더 이상 4황자의 일개 호위기사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 항상 황태자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두 사람만 남아 있을 기회 또한 별로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데니안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태자 전하.”
그러나 황태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좀처럼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황태자한테 물어봐.’
제 주군을 의심하는 건 불충이었다. 그러니 겨우 그런 여자의 말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풍랑에 흔들리는 배처럼 마음을 잡을 수 없는가.
“왜 그러지?”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황태자가 물었다. 그럴수록 데니안의 입은 더욱 굳게 닫혀갔다. 어쩐지 그 한마디를 떼기가 어려웠다.
겨우 그게 무엇이라고.
“데니안.”
기사단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른 건 오랜만이었다. 카를로스가 황태자가 된 이후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친구가 아닌 그 미묘한 선이 생겨버렸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 있나?”
그래도 건네는 질문에는 오랜 친우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딸려 나간 말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며칠 전에 황가의 묘지에 다녀왔습니다.”
“…그랬군.”
조용한 수긍. 맴도는 침묵. 거기서 말문이 턱 막혀왔다. 무엇을 묻고 싶었던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지 않았던가. 7황녀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너도, 나도.
‘비겁한 것은 너였던가, 나였던가.’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을 여태까지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
“멍이 들었습니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손목을 안타깝게 매만졌다. 당장이라도 그사이에 뛰어들어 데니안과 갈라놓고 싶었지만 그녀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그게 메리쉬와 베를리아의 관계였으니까.
“사소한 것쯤은 내어 줄 때도 있는 거지.”
베를리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못 벗어나서 잡혀 있었던 게 아니니까.
“사소하지 않아요.”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단호한 어조로 푸르게 멍이 든 베를리아의 손목을 조심스레 감싸면서 메리쉬가 말했다.
“괜찮지 않아요. 사소한 거라도 주인님을 이렇게 대하는 건 아무것도 괜찮지 않아요.”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푸른 멍 위에 닿았다. 마치 그대로 문지르기라도 하면 날아가 버릴 것처럼. 그 움직임이 간지럽고 조심스러워 베를리아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을 따라 녹빛 시선이 흘렀다.
“조금 더 자신을 아껴주세요, 베를리아님.”
손가락이 하나하나 얽혀들었다. 말은 한없이 다정했지만 그 사이로 그와 다른 본질적인 감정이 흘렀다. 자신에게만 닿았으면 하는, 나만이 허락되었으면 하는.
그런 늪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도 온순한 양인 척 꼬리를 말고 내숭을 떠는 모습이 베를리아의 눈에는 꽤나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뺨을 감싸 제게로 끌어당겼다.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네가 아껴 주잖아.”
목울대가 일렁였다. 자신을 바라봐오는 직선적인 보라색 시선. 메리쉬는 이런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의 구원 그 자체였다. 어두운 곳에 버려져 있던 그에게 햇살을 내려준 건 메리쉬와 비슷한 나이의 작은 소녀였다.
그러니까 감히 바란 적도 없었다. 그저 그 뒤에서 그림자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베를리아 리들턴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바란 적이 없었다. 그게 어떤 건지도 몰랐으니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너무 아껴서.”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마주 눌렀다. 시선도 몸짓도 그 무엇 하나 그녀는 그를 피하지 않는다. 그가 그대로 고개를 내려 조금 더 길게 아랫입술을 머금었다가 가볍게 혀로 훑었다.
“다치시면 제가 너무 슬픕니다.”
어디 더 해보라는 듯 베를리아의 눈꼬리가 유유히 휜다. 웃음기를 머금은 자안에는 오로지 자신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그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오랜 갈증에 시달려 물을 마시고 마셔도 그것이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메리쉬의 손끝이 베를리아의 조금 창백한 뺨에 닿았다. 처음에는 손가락 끝마디, 그다음에는 하나, 하나. 그렇게 조심스럽게, 끝내 온전히 그녀의 뺨을 감쌌다.
“절 가엾게 여겨주세요.”
가만히 입술을 마주 댄 채로 작게 속닥인다. 선이 날카롭고 선명한 얼굴은 절대 여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껏 자세를 낮추고 비 맞은 동물 마냥 유순하게 눈을 깜박인다.
언제라도 이를 세울 수 있는 거대한 짐승이 무언가를 기대하며 유순한 척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