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악녀는 스스로 존재를 증명한다(3)
“지금 뭐라고 했지, 로베르 후작?”
싸늘하게 낯을 굳힌 황태자가 되물었다. 그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깐 리암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리암의 시선이 힐끗 베를리아를 향했다. 그녀가 웃었다. 마치 오래 전 친구였던 그에게 그렇게 웃어 주었던 것처럼. 그것은 리암 로베르에게 기묘한 용기와 무모한 확신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리들턴 백작의 누명이 벗겨졌으니 그녀가 복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암은 대단한 일을 해낸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마치 베를리아에게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했다. 그게 우스웠지만 그녀는 기꺼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녀가 입모양으로 속닥였다.
‘잘했어, 리암.’
회의장 안도 황태자를 따라 싸늘해졌다. 베를리아의 짧은 한마디만으로 리암은 이 싸늘함이 감도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안도하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역시 리암 로베르가 참 싫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 리암 로베르의 과거사에 비추어 볼 때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으로 자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자란 리암 로베르의 애정은 참으로 쉬이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싸구려 애정.’
그래서 그녀는 그의 애정을 그렇게 평했다. 리암 로베르에게 필요한 것은 베를리아 리들턴도 안젤라 애거스틴도 아니었다. 그를 사랑해 줄 만한 누군가였지.
리암 로베르가 지금 베를리아의 편을 들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래 믿을 인물이 아님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여유롭게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베를리아가 순간 자신을 찌푸린 채 바라보던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느긋하게 웃자 사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흠흠, 그렇지만 애초에 리들턴 백작은 의회에 들어올 자격이…”
“아, 제가 원래는 평민이었기 때문에요?”
혼자 중얼거리는 척 남들 다 들리게 누군가 말하자 베를리아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답했다. 그 한 마디에 수군거리려던 이들의 입이 싹 다물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그 누군가가 당황으로 횡설수설했다.
“아, 아니 내가 언제…!”
“왜요, 저 들으라고 하셨던 말 아니셨던가?”
베를리아가 노골적으로 픽 웃음을 터트렸다. 사내는 같은 백작이었으나 그녀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아니 정정한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도 가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혼잣말이 그렇게 크면 다 들으란 거지.”
베를리아가 딴청을 피우는 척 혼잣말을 내뱉었다. 물론 그 목소리의 크기는 남들도 충분히 들릴 만큼이었다.
“그만하게, 리들턴 백작.”
카를로스가 그녀를 향해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 그럼에도 베를리아는 꿋꿋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귀족이었다가, 평민보다 못하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려나.”
서늘한 기색을 띄운 베를리아의 시선이 쭉 여타 귀족들을 훑었다. 그들은 모골이 송연한 기분이 들어 모두 그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잊고 있었다. 지금의 황태자를 그 자리에 올린 것이 저 베를리아 리들턴이라는 것을. 심지어 그녀는 황족 시해 죄로 몰리고서도 이렇게 살아 돌아오지 않았던가.
“베를리아 리들턴!”
회의장은 어느덧 베를리아의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그것을 보며 쾅 의자의 손잡이를 내리친 황태자가 베를리아를 불렀다.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황태자 전하.”
그리고 그에 답하는 베를리아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녀가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된 손짓으로 팔을 넓게 벌리며 물었다.
“그럼 이의 있으신 분 있으신지?”
베를리아 리들턴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킬 힘이 있는 자였다. 그런 자를 상대로 정면으로 굳이 맞설 자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유유히 웃고 있는 사람은 오늘도 베를리아뿐이었다.
오늘의 승자도 역시나 베를리아 리들턴뿐이었다는 소리다.
***
“무슨 생각이냐.”
“오랜만이네요, 황실 기사단장님.”
무미건조한 어조로 제게 싸늘한 물음을 던진 사내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 돌아선 베를리아가 인사를 건넸다.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던져지는 시선이 그냥 웃겼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렇게 자신을 봐달라고 그들에게 매달릴 때는 모른 척하던 이들이, 죽고 없어져 달라져서야 돌아보는 게.
“왜 돌아온 거지?”
“제가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이상할 것 있나요?”
“하, 제자리.”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은 비약 없이 ‘너 따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베를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정확히 말해 줄까? 내가 원하는 자리.”
그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베를리아 리들턴을 미워했다. 그리고 그 이유란 정말 하나같이 같잖기 그지없었다.
“난 어느 자리든 갈 수 있어.”
그녀가 기사단장에게로 다가가 검지로 그의 어깨를 밀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널 이 자리에 앉혔듯이.”
“날 모욕하지 마. 난 떳떳하게 이 자리에 있는 거다.”
탁, 그의 손이 매섭게 베를리아의 손목을 낚아채었다. 가는 손목을 억세게 쥐는 힘이 상당했다. 잠시 그녀가 상대 쪽으로 휘청거리며 앞으로 기울어질 만큼. 기사단장의 눈이 한껏 사납게 치켜떠져 있었다.
“풋,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베를리아가 그를 비웃었다. 손목에 가해지는 힘에 고통이 느껴졌지만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그녀가 잡힌 손을 손짓하자 손목을 얽매던 사내의 손가락들이 기괴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
“내가 없었으면 너희들 따위가 카를로스를 저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었을 것 같아?”
“지금 감히 황궁에서 사술을…!”
갑작스레 그녀에게 기습을 당한 상대가 소리쳤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베를리아는 강제로 풀어진 손에서 제 손목을 유유히 빼냈다. 멍이 들듯 불긋해진 손목을 돌리며 입꼬리를 더 길게 늘어트리자 기사단장의 얼굴이 구겨지는 꼴이 볼만했다.
“네 자리는 내가 준 거야, 데니안 론델.”
고통에 이를 악문 데니안이 다른 손으로 검을 빼 들려고 하자 이번에는 그쪽의 어깨가 잘못된 방향으로 뒤틀렸다.
황궁 안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것은 황실 기사단뿐이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 또한 황실 마법사들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이들은 엄격히 규제받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베를리아에게는 해당 사항 없음이었다.
“크윽…!”
이번에는 먼저보다 커다란 고통이 뒤따랐다. 처음 참아냈던 고통 어린 신음을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다.
“큿…. 나는 네게, 무얼 받은 적 따위, 없어!”
데니안 론델은 베를리아 리들턴을 미워했다. 정확히는 혐오했다. 그녀는 에덴버 제국 역사상 최악의 범죄 단체 므시아의 수장이었으니까. 실제로 베를리아가 했던 일 중에 떳떳이 말할 수 있는 류는 별로 없었다.
당연히 그 속에는 카를로스를 위한 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의 입으로는 말한 적 없지만 그가 알면서도 모른 척 말리지 않은 것들.
“여전히 넌 입만 살았어.”
데니안은 더 이상 덤벼들지는 않았다.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여기서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니까. 황궁에 존재하는 마법을 차단하는 모든 것들은 베를리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를 보고 있어 봤자 열만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돌아서려고 했다.
“내가 나타나기 전의 너는 파면 대신 좌천당한 4황자의 호위기사에 불과했는데.”
노골적인 업신여김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건 데니안이 지금은 지나가버린 그 시절 가장 싫어했던 것이었다.
“나는…!”
무심하고 냉철하다고 알려진 사내를 도발하기란 사실 이만큼이나 쉬웠다. 아무리 그런 과거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고고한 척을 하고 있어도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심지어 카를로스를 보호해야 하는 그 역할 하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의 입이 드디어 온전히 다물렸다. 데니안 론델은 카를로스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믿고 있었다. 그건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기사단장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낸 베를리아는 데니안의 역린에 사정없이 날카로운 검을 찔러 넣었다.
그의 죽일 듯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의 사실에 대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억 안 나? 이게 왜 생겼는지.”
순간 베를리아의 왼쪽 얼굴에 눈 밑까지 붉은색의 인이 타고 올랐다. 그것이 위험하게 빛을 발했다.
“네 정의는 참 덧없어.”
그건 저주의 인이었다. 금기된 마법으로 새겨진. 그 저주의 인은 한 번 새겨지면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은 채 그 대상을 고통 속에 빠트렸다.
“그날, 결국 카를로스를 지킨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이것은 베를리아 리들턴이 카를로스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증표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데니안 론델은 정의로운 사람이다. 소설은 그를 그렇게 서술했다. 그래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행동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러면 뭐하나, 힘없는 정의란 결국 이상일 뿐 아무것도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을.
“…네 방법은 틀렸어. 그렇다고 네 죄가 없어지지는 않아.”
“그래서, 정의로운 너는 죄를 짓지 않고 뭘 했는데?”
권력은 남보다 더한 힘을 갖기 위한 다툼이다. 싸움에서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정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한 사람이 싸움에서 그 역할을 하지 않게 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대신해야만 하는 게 순리였다.
“분명히 다른 방법도 있었어!”
“푸하하…!”
순간 베를리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도발에 격앙되었던 데니안 론델의 몸이 굳었다. 베를리아는 진심으로 데니안의 말이 우습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진심으로 우스웠다. 그녀는 데니안 론델이 베를리아 리들턴’을 증오한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꼭 그렇게 모두를 죽여야만 했나!”]
[데니안 론델이 베를리아 리들턴의 멱살을 잡아 쥐며 다그쳤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끝내 황위 계승권이 있는 모두를 죽였다. 그가 사랑하는, 평화를 사랑했던 7황녀까지도.]
그것은 베를리아가 카를로스 에덴버의 황위 계승권을 확정짓던 날 끝내- 데니안 론델의 첫사랑조차도 무참히 죽여버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