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악녀는 스스로 존재를 증명한다(2)
탐욕스러운 시선이 베를리아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금제가 풀린 짐승은 갑자기 찾아든 자유의지가 낯설었다. 제 욕심껏 입술을 겹쳤으면서도 머뭇거리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메리쉬의 생각도 마음도 늘 베를리아 리들턴의 것이었다. 그녀가 그를 구원한 순간부터 항상. 제 것이라고는 가져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붉은 입술 사이가 열리고 말캉한 무언가가 닿는 순간 메리쉬는 제 안에서 피어오르는 욕망을 느꼈다.
‘당신을 갖고 싶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스스로 인지한 순간 메리쉬의 혀가 제게 닿은 그녀의 혀에 깊게 얽어 들었다. 숨 한 자락조차 허공에 허투루 흘려보내기 싫었다.
그의 팔이 굽어졌다. 메리쉬의 몸이 베를리아를 완전히 모두 가려버렸다. 그도 모자라 다른 팔이 그녀의 허리에 감겨들었다. 제게로 더욱 끌어당기자 아래로 온전히 맞닿는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불씨가 불길이 되어 타오르는 것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하아…. 후, 하….”
가뿐 숨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 모두 어지간해서는 그럴 일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빠르게 서로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맞닿은 사이로 느껴졌다. 얼마나 엉켜 있었던 건지도,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말해 주세요, 베를리아 님.”
숨을 마저 고른 메리쉬가 그녀와 입술을 붙인 채로 작게 말했다. 그 작은 음성이 지나치게 간절했다.
“제가, 어디까지 당신을 바라도 되나요?”
소설 속에서 가장 무자비한 악역으로 나오던 메리쉬는 더없이 나약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 퍽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쪽 소리를 내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제게만 오롯이 향해 있는 그 눈동자를 보다가 눈가를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미소 지었다.
“어디까지 하고 싶은데?”
그리고 그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대로 다시 메리쉬의 턱을 잡고 끌어당겨 입술을 맞물렸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
요요한 자안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휘어지는 눈꼬리가 인상적이었다. 그것에 홀려 더 이상의 말은 존재하지 못했다.
***
메리쉬는 단 한 번도 베를리아를 사랑의 대상으로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에게 있어 너무 절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감히 신과 동등한 사랑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을까.
그러나 만약 사랑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이라면. 딱 하나뿐인 존재라면. 그렇다면 메리쉬에게 있어 그것은 응당 베를리아의 것이었다. 제가 그녀의 것인 것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된다고…?’
그가 멍하니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아직도 심장이 가쁘게 뛰어 그게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메리쉬를 이렇게 만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잠들어 있었지만.
‘당신이 날,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고?’
메리쉬가 입술을 꾹 눌러 앙다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소리가 입 밖으로 크게 새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 견디지 못해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는 베를리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메리쉬의 녹색 눈에 이채가 번들거렸다. 그가 저도 모르게 터질 뻔한 웃음을 꾹 눌러 제 손 뒤로 감춰냈다.
희열. 그래, 그의 만면에 떠오른 것은 희열이었다. 미친 듯한 베를리아 리들턴의 사랑, 그게 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가 메리쉬를 희열로 전율하게 했다.
그가 잠든 베를리아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어 꽉 맞잡았다.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늪 속으로 녹음이 가라앉는다. 한없이.
***
“네가 왜 여기 있지?”
대회의장 앞 복도에서 마주친 카를로스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베를리아가 이곳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에 그녀가 픽 웃었다.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태자 전하?”
베를리아가 여유롭게 되물었다. 그 물음에 곧바로 황태자의 표정이 썩어 들어간다. 그게 퍽 웃겨서 베를리아는 연이어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감히 나를, 비웃는 건가?”
홀로 발끈한 카를로스를 두고 감히 오만하게도 베를리아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봤다. 조금 늦게 온 까닭인지 다른 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족들이 오기 전에 회의장을 채워놓는 것이 귀족들이 갖춰야 할 예의였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카를로스를 마주친 것은 반쯤은 그녀의 고의였다는 셈이다.
“그거 알아요?”
카를로스가 분노를 표하든 말든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빙 꼬며 베를리아가 물었다. 어차피 그가 보이는 압박 따위 그녀에게는 아무렇지 않았다.
암녹색 머리칼이 흔들흔들 어지럽게 퍼진다. 황태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그 모양만 보고 있던 베를리아의 시선이 드디어 그에게 향했다. 입꼬리를 늘어트려 기묘한 미소를 지은 베를리아가 말을 이었다.
“당신 참, 못났다는 거.”
함부로 황태자에게 할 언행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했다.
“지금 네가 나를 감히 능멸…!”
그리고 예상대로 제 분을 참지 못한 카를로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베를리아는 그런 그의 격노를 굳이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랬으므로 깔끔히 그 말을 끊어 내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그렇잖아요, 열등감 덩어리 태자 전하.”
“뭐…?”
베를리아의 빈정거림에 말문이 막힌 듯 이번에는 카를로스가 되물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추호도 몰랐다는 듯이.
이 몸에 익숙해질수록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절대로 서술되지 않는, 주인공이 아니기에 누구도 관심 없는, 그러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각자만의 서사. 베를리아 리들턴의 이야기.
‘베릴!’
어느 날엔가 황태자는 분명히 베를리아를 그렇게 불렀었다. 그리고 그 때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다. 아주 작은 아이에 불과했던 카를로스는 베를리아 리들턴을 향해 웃고 있었다.
생각해봤다. 아무리 과한 집착이 관계를 틀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아니었던 카를로스에게 힘을 쥐여 준 것은 베를리아 리들턴이다. 시궁창에서 그를 구한 것은 그녀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게 되었을까. 심지어 황태자가 먼저 돌아서기 전까지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토록 헌신적이었는데.
[카를로스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끔찍했다. 자신은 이제 그녀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원작을 읽을 때는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고 베를리아 리들턴이 원하는 건 줄 수 없다고 하는 카를로스가 배은망덕하기만 했는데.
“내가 당신보다 강하니까,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지금?”
그녀가 오만하게 웃었다. 마치 이보다 더 알맞은 정답은 없다는 것처럼.
“…나는, 이 나라의 황태자다!”
잠시 대답할 말을 잃었던 카를로스가 뒤늦게 발끈하여 외쳤다.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런데 감히, 감히.
“그런데 네가 나보다….”
“강하지. 권력도, 능력도.”
재차 황태자의 말을 끊어낸 베를리아가 확정지으며 단호히 말했다. 그녀가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카를로스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러니까 황태자씩이나 되어서도 날 어쩌지 못하는 거잖아?”
“하,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더니 미친 건ㄱ….”
“내가 당신 뜻에 넘어가 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수는 있었고요?”
헛소리를 들어 주기가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말을 끊어낸 베를리아가 짧게 웃어버렸다. 키 차이로 인해 분명히 시선의 높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다보는 것은 베를리아 같았다.
“…”
이를 악문 카를로스가 그녀를 노려봤다. 여간 분이 찬 게 아닌지 꽉 쥔 주먹을 따라 핏줄이 고스란히 서 있었다.
“당신 같은 걸 왜 사랑했을까?”
베를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순수하게 궁금한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 씻고 아무리 쳐다봐도…”
눈매를 가늘게 만들어 황태자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먼저 등을 돌렸다. 베를리아가 망설임 없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돌아보지 않을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베를리아 리들턴이 아니었다.
***
“베를리… 리들턴 백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베르 후작님.”
베를리아를 발견하자 리암이 먼저 아는 체 해왔다. 물론 습관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엄중한 경고의 시선을 받고는 급하게 말을 고치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오늘 재밌는 장면을 만들어 줄 상대였으니 그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베를리아에게 들었던 말이 그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들어오고서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카를로스의 등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문이 열리고 그에 따라 모든 귀족이 고개를 숙였다. 중앙의 길을 걸어가던 카를로스의 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베를리아의 머리 위로 지긋한 시선 하나가 느껴졌다. 황족이 허하지 않는 한 귀족들은 먼저 머리를 들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머무르다가 왕좌의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황태자의 자리에 앉은 카를로스가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 명에 따라 고개를 드는 순간 정확히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삐뚜름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이 허하지 않으면 고개도 들 수 없는 존재. 카를로스는 지금 그것을 그녀에게 과시하고 있었다.
‘…하.’
베를리아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의도가 너무 뻔해서 우스웠다.
어차피 황제가 오면 그 또한 고개를 숙여야 할 존재에 불과하면서. 겨우 그런 것 따위로 모멸감을 느낄 만큼 방금 있던 일이 대단치도 않았다. 솔직히 빙의하기 전 살던 나라를 생각하면 뭐, 그깟 인사쯤이야.
“오늘 폐하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오지 못하실 거다.”
카를로스의 말에 옆에 있는 리암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에게 청을 올리는 것과 카를로스에게 직접 말하는 것은 심적으로 다르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나 리암이 나서지 않으면 베를리아의 계획은 어그러진다. 애초에 번거롭게 굳이 복귀를 리암의 손을 빌려서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녀는 그들의 사이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쯧.”
못마땅한 듯 들리지 않게 혀를 찬 베를리아가 손을 뻗었다. 갑자기 제 손등에 닿는 온기에 화들짝 놀란 리암이 저도 모르게 그녀를 돌아봤다.
“앞을 보셔야지요, 로베르 후작님.”
베를리아가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에 리암이 어물쩡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다시 카를로스에게로 두었다.
황태자의 시선이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에게로 매섭게 향했다.
“리암, 나는 너를 믿고 싶어.”
물론 헛소리였다. 개가 그냥 멍멍 짖고 고양이가 그냥 냐옹냐옹 거리듯이.
그러나 그녀의 의도대로 손쉽게 넘어온 리암은 곧 회의장 안에 폭탄을 던져 넣었다.
“태자 전하, 주청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손을 든 리암을 향해 있는 황태자의 얼굴에는 달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렇다고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리들턴 백작의 중앙의원석 복귀를 청합니다.”
폭탄이 떨어졌고, 마침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