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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0)화 (10/148)

10화. 악녀는 스스로 존재를 증명한다(1)


 

“…날, 용서해 줄 거야?”

오만하고 뻔뻔한 남자는 자신이 용서 대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알았다면 저렇게 쉽게 용서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제 입으로 알려 주어야만 한다는 게 지겨웠다. 그래도 피날레를 위해서라면 베를리아는 이쯤은 참아 줄 수 있었다.

“난 기회를 준다고 했어. 어떻게 해서 용서받느냐는 네 몫이지, 리암 로베르.”

혼자 기대에 들뜨는 꼴이 썩 아니꼬웠다. 확실히 베를리아 리들턴은 이들을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 그러니 저토록 그녀를 쉽게 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베를리아의 냉정한 말에도 리암은 들뜬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를 쉽게 용서해 줄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착각도 유분수지.’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베를리아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 나의 중앙의원석 복권을 주청 드려.”

에덴버의 정치는 귀족으로 이루어진 의원들과 황족 그리고 내각으로 이루어진다. 실질적인 행정권은 황족과 내각에 있으며 의원들은 주로 입법 혹은 정책 등을 발의한다.

이때 다시 의원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뉘는데, 황제와의 달마다 열리는 중앙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의원은 이 중앙의원뿐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린 일등 공신이었다. 그런 그녀가 중앙의원석에 있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사형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베를리아, 그건….”

“왜, 못하겠어?”

베를리아가 말을 흐리는 리암을 상대로 딱딱하게 되물었다. 그녀를 의원직에서 끌어내린 것은 황태자의 뜻이었다. 물론 카를로스가 원했기에 그녀가 당해준 게 더 맞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베를리아의 말은 그에게 황태자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리암 로베르가 아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못하겠으면 말고.”

그래서 베를리아는 그에게 찰나의 망설일 틈도 주지 않았다. 그녀가 냉정하게 돌아섰다.

“할게…!”

리암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건 생각을 거치지 않고 흘러나온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리암은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제야 베를리아의 걸음이 멈추었으니까.

“그거면, 날 용서해 주는 거지?”

곧장 기회를 틈타 물어오는 말은 다시 한번 베를리아의 기를 막히게 했다. 이번에는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지 않고 그녀가 말했다.

“겨우 그것 하나로 용서받을 만큼 너한테는 내가 죽을 뻔한 일이 아무 일도 아니었나 봐?”

리암 로베르는 입을 다물었고 베를리아는 그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

베를리아가 연회장에서 나오자마자 메리쉬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왜?”

그녀가 의아함에 그것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에 그가 대답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베를리아의 한 손을 끌어와 닦아주었다. 그것도 매우 꼼꼼히.

“메리쉬.”

“…굳이 닿을 필요는 없지 않으셨습니까.”

궁금함에 메리쉬를 채근하자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답변에 베를리아는 뒤늦게 그 손이 리암의 뺨을 감쌌던 걸 떠올렸다.

“푸흣…. 질투해, 메리쉬?”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빈정거림이나 냉랭함이 없는 그저 솔직한 미소였다. 그것을 멍하니 보던 메리쉬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베를리아가 얼굴은 무뚝뚝한 주제에 잔뜩 빨갛게 변한 귀를 지긋이 바라봤다.

‘넌 왜 이런 것도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매달렸을까.’

그녀는 베를리아 리들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 붉어진 귀를 만지작거렸다. 메리쉬가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이 그 작은 접촉을 통해서도 느껴졌다.

“난 솔직한 게 좋더라, 메리쉬.”

그대로 그를 지나친 베를리아가 마차로 올랐다. 문이 닫히고 그녀가 마차를 출발하라는 의미로 마부석과의 사이에 있는 벽을 똑똑 두들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벌컥.

그때 출발하려던 마차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대로 마차가 출발했다면 꽤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메리쉬.”

“…죄송합니다.”

베를리아의 질책에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혔던 그는 금세 고개를 숙여 사죄해왔다. 그것을 보며 가볍게 웃고는 그녀가 톡, 톡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할 말이 있으면, 이리 와.”

마차는 넓었고 분명 베를리아의 맞은 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가면서 하자.”

그녀의 미소에 메리쉬의 눈동자가 한없이 떨려왔다. 그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까처럼 잔뜩 굳어 베를리아를 빤히 바라봤다.

“무엇이든.”

그녀는 거저 얻을 수 있는 저 맹목적인 사랑이 탐이 났다. 애쓰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는 절대적인 마음이.

누군가는 그것을 쉽게 여기지만 기실 알고 보면 얼마나 매력적인가. 자신을 전혀 깎아 먹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건.

마차의 문이 닫혔다.

***

‘…이상해, 당신.’

메리쉬가 잠든 제 주인을 빤히 내려다봤다. 베를리아는 언제나 많은 위협에 시달렸다. 그런 그녀가 제 앞에서 날을 세우지 않고 잠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게 얼마나 기뻤던가.

그러나 곧 깨달았다. 그게 자신을 믿는다는 의미는 되어도 특별하다는 뜻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베를리아 리들턴은 단 한 번도 카를로스 에덴버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황태자의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랐던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아름다워 보이고는 싶었으니까.

“베를리아.”

차마 그녀가 깨어 있을 때는 입에 담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메리쉬의 하나뿐인 주인이었으므로.

제게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 같았다.

메리쉬가 잠든 베를리아의 얼굴 옆에 손을 짚고서는 달빛에 음영 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의 그림자가 위로 드리워도 베를리아의 눈꺼풀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 베를리아가 언제 깨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베를리아.”

메리쉬의 목소리가 낮고 은근했다. 금기를 범하는 기분. 그는 단 한 번도 제 주인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주인은 늘 굳건하게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려고 했는데.”

감히 자신이 욕심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베를리아 리들턴을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그들의 작태를 그저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힘들어.”

메리쉬는 그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을 그녀는 절대 모를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신을 부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은 더더욱 모를 것이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한 순간, 무언가 메리쉬의 안에서 쩡 하고 깨지며 무너져 내렸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 하려고?”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림자 아래에서도 요요하게 빛나는 자안이 어느덧 메리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홀린 듯 그가 바라봤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쳐 온몸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메리쉬의 목에 가늘고 긴 팔이 감겨온 것은 공기가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또다시 그의 넋을 빼놓는 자안이 코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베를리….”

입을 떼 그녀의 이름을 담아내기도 전에 메리쉬는 그대로 끌어 당겨졌다. 말랑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베를리아의 손이 미끄러졌다. 어느 귀족 영애들처럼 마냥 매끄럽지만은 않은 온기가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긴장으로 잔뜩 굳어졌던 어깨가 내려갔다. 그러나 여전히 시선을 빤히 마주하기만 할 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메리쉬와 눈을 마주한 채로 그 깜박임을 바라보다가 문득 베를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다, 얘 처음이었지.’

“푸흣.”

그 작은 웃음소리 하나에 메리쉬의 얼굴이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무표정이 숨길 수도 없이 무너져서는 그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주어진 이래로 메리쉬의 세상은 그녀였다. 그는 제 주인에게서 단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저런 얼굴을 가지고도 지금까지 연애 한 번 안 해본 것이다.

“싫어?”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베를리아가 물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서로의 입술이 미묘하게 스치며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게 너무 자극적이어서 메리쉬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그게 아니라….”

그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망설였다. 대답이 나오기를 베를리아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제가, 당신을 바라도 됩니까?”

침을 크게 삼킨 메리쉬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러나 녹음을 담았던 그 눈동자는 깊은 숲속 늪처럼 깊어져 있었다. 한없이 끌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무저갱.

그녀는 그 시선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감정이 썩 마음에 들었다.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딴 쓰레기들을 위해 죽은 건 베를리아 리들턴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내가 널 바라잖아.”

나는 네가 갖고 싶다. 그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말만 하면, 손만 뻗으면. 그러기만 하면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무얼 망설이겠는가.

그녀의 말에 순간 숨 쉬는 것도 멈춘 채로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빤히 응시했다.

‘잡아먹힌다.’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아주 찰나의 일이었다. 그대로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숨결까지 앗아갈 듯 두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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