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주인공의 인정 없이도 악녀는 존재했다(6)
“내가 죽어도 모른 척했을 후작님께 제가 왜 화를 내야 하죠?”
눈꼬리를 접어 환한 웃음을 지은 베를리아가 되물었다. 아름답지만 웃지 않으면 일견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위에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는 마치 사랑의 밀어라도 속삭여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명백히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화낼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그는 베를리아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베를리아.”
“여전히 내 말이 만만한가 봅니다, 후작님.”
순식간에 미소가 그 얼굴에서 걷어지는 모습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원래가 베를리아의 외모 자체를 묘사하자면 독화를 닮아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웃지 않는 그녀는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싸늘해 보였다.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놀랍게도 베를리아의 웃는 얼굴이 익숙했다는 것을. 그래서 저런 얼굴이 이렇게나 낯설게 다가올 만큼.
“…나는 그게 아니라.”
아직까지도 제멋대로 선을 넘으려 드는 리암의 말을 굳이 더 듣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베를리아가 그에게서 돌아섰다. 하여간에 소설을 읽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안젤라의 어장에 갇힌 물고기남들은 하나같이 여주에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재수 없다.
남들은 순애보다 뭐다 하지만 솔직히 여주에게만 다정하고 부드럽게 굴고 그 행동을 본 사람들이 놀란다는 건 다른 이들에게는 그 정반대로 대한다는 게 아닌가?
‘그런 걸 현실에서는 싸가지 없다고 하는 거지.’
“잠깐만, …리들턴 백작!”
베를리아가 제 말도 들어보지 않고 이렇게 망설임 없이 그를 두고 가버리려 할 줄은 몰랐던 리암이 당황하여 그녀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어떻게 안 것인지 그조차 베를리아는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리암은 베를리아를 그녀가 원하던 호칭으로 불렀다.
‘제멋대로 할 만큼 한 다음에 방법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런 리암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베를리아는 속으로 빈정거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주인공인 안젤라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더 싫은 건 역시 남주인공과 조연들이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그러니까.”
단언컨대 그들은 베를리아의 앞에서 무언가를 망설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항상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들어줬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새끼들이 버릇이 없어지지.’
흥, 코웃음을 치며 베를리아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당당하다 못해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태도는 그녀에게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리암은 오히려 더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하려고 했더라.’
그 냉랭하게 보이는 얼굴 앞에서 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테라스에 커튼이 내려져 있는 데도 베를리아를 쫓아 들어왔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테라스에 커튼이 내려져 있으면 이미 사람이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다. 그러니 리암은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래 그들은 베를리아에게 예의를 차릴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녀는 그 또한 알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을 따라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방자함을 믿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변해버린 머리로 리암이 말을 꺼낸 것은 그냥 반사적인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낯설 베를리아의 그 표정을 마주한 채 견디고 있기가 힘들어서 본능적으로 나가버린.
그러나 서두를 떼고 나니 리암은 자신이 정말로 이것을 물어보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 대해 줄 건가요?”
항상 그렇듯이 그들은 베를리아의 앞에서는 주저함이 없었다.
아직도.
그는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내려놓은 듯 살짝 붉어진 얼굴이었다. 겨우 이 한마디가 리암에게는 자존심이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날 미워하지 않아 줄래?’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점차 멀리하는 그들에게 자존심이라고는 티끌도 찾아볼 수 없도록 처절하게 매달리던 그녀의 모습이.
사내가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염치라는 게 있다면 그는 저 질문조차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어야만 했다. 그러고도 고작 그것 하나에 대단한 것이라도 건 것처럼 군다.
그 모습이 한없이 베를리아의 속을 배배 꼬이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전처럼 대해 줄 거냐고요?”
베를리아가 비웃었다. 적나라한 그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리암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타올랐다.
‘베를리아, 베를리아. 어리석은 베를리아. 가엾은 베를리아.’
그녀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이토록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을. 그토록 퍼부어 주었던 애정이 잘못이었나.
베를리아 리들턴이 선한 인물이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단언컨대 그녀는 악한 인물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것도 무엇이든 했다. 그들의 행복이 그녀의 행복이었으니까.
“너희들을 사랑하던 나를 죽인 건 너희들이잖아.”
베를리아가 리암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곤두선 바늘처럼 푹푹 찔러오는 말과 다르게 느릿하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몸짓은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밤바람에 날리는 머리칼만으로도 위험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여자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워?”
베를리아의 손이 살풋 리암의 뺨 위에 얹어졌다. 왜일까, 그 손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 반응을 천천히 바라보던 베를리아가 픽 비웃음을 터트렸다.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가 쩡 하고 깨져버리며 얼어붙은 것은 삽시간의 일이었다.
“오만하고 뻔뻔해.”
그녀가 천천히 손을 거두는 동안 그의 시선은 느리게 겨우 그 손짓을 따라갈 뿐이었다.
“내가 힘을 남겨 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 머리는 저 바닥을 구르고 있었겠지.”
베를리아의 손가락이 아래를 가리켰다가 다시 성문 밖을 가리켰다.
“아니면, 저기에 걸려 만인의 앞에 치욕을 당하고 있었을까?”
“…베를리아.”
리암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방금 닿았던 온기는 선명했고 그래서 이제야 그녀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새삼스레 와닿았다.
“너는 내 죽음을 구경했겠지.”
“아니야, 나는…!”
“아니, 맞아. 너는 그랬어.”
자신의 말에 반박하려는 그의 말을 끊어낸 베를리아가 단호히 선언했다. 그녀가 읽었던 소설 속에서 아무도 베를리아 리들턴의 목숨을 구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죽은 거다.
그는 더 이상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리암 로베르의 양심이란 참으로 알량하기 그지없다. 적나라한 사실을 가감 없이 꽂아 주어야 입을 다무는 딱 그 정도의 양심이었다.
베를리아가 의도적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반사적으로 리암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베를리아, 나는…!”
리암은 베를리아가 이 순간 미련 없이 가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리암.”]
언제든지 옆에서 손을 내밀어 주던 그 베를리아 리들턴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 줘.”]
그건 처음으로 베를리아 리들턴이 리암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그것도 딱 하나.
[“성녀가 궁에 들어올 수 없게 도와 줘.”]
처음에 리암은 분명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의 거취 문제는 쉬이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궁과 신전 사이의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일이었으니까.
[“로베르 후작님이시군요. 저는 성녀 안젤라 애거스틴이라고 해요.”]
[리암 로베르는 그 순간 숨을 멈추었다. 햇살을 등지고 환히 빛나는 그녀의 미소는 어두운 그의 세상을 물리치는 빛이었다. 그것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는 한동안 답하는 걸 잊고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런데 리암 로베르는 베를리아 리들턴과의 약속을 어겨 버렸다.
[“베를리아, 네 부탁을 들어 줄 수 없어.”]
[“성녀님은 좋은 분이야, 베를리아.”]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분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할 거야.”]
설레는 심장의 고동 앞에서 매일 내밀어지던 손을 기꺼이 놓았다. 언제든 다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베를리아는 리암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성녀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할 것이다. 그녀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이다. 그녀는 감히 제 것을 빼앗으려는 안젤라를 가만히 둘 생각 따위 없었다.]
‘너도 성녀님에 대해 나쁘게만 생각하려 하지 말고…’
‘너는 이미 내게서 가버렸구나, 리암.’
그날 베를리아 리들턴은 분명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악독하기만 했던 악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다.
악녀는 악녀인 것으로 충분했다. 그게 소설 속의 역할이었으니까. 늘 그렇듯 소설은 조연의 자세한 부분까지 서술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가지는 건 주인공들만의 특권이었다.
“내가 그리워?”
베를리아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리고 리암은 멍청하게도 열병 같은 설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굴었는가를 깨달았다.
리암 로베르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리웠다. 당연했다. 누가 또 그들에게 그녀만큼 헌신적일 수 있겠는가.
베를리아는 객관적으로 절대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지.
“…베를리아, 제발.”
그는 그녀를 붙잡지도 못한 채 간절히 말했다. 베를리아는 그게 우스웠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죽음을 기점으로 황태자와 성녀의 사랑은 더욱 공고해진다. 그즈음 서브 역할에 지나지 않던 다른 이들과 애매한 줄타기는 모두 끝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서브 역할에 해당하는 남자 조연들은 모두 끝까지 성녀 안젤라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게 우스웠다.
사랑받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들을 정말로 흔들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났을 때, 진실로 그들은 끝까지 보답받지 못할 성녀의 사랑만을 갈구할 것인가? 보답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제 사랑만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녀의 답은 단호하게 NO였다.
“좋아, 내게 용서받을 기회를 줄게.”
그래서 베를리아는 기꺼이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는 리암 로베르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