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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8)화 (8/148)

8화. 주인공의 인정 없이도 악녀는 존재했다(5)


 

“이… 이게, 어떻게 된….”

안젤라에게서 떨리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다른 이들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베를리아의 청력이 상식 수준을 뛰어넘었을 뿐이었다.

안젤라가 당황하여 카를로스를 돌아보았다. 늘 그래왔듯이 그녀가 입은 것들은 연인인 카를로스가 그녀를 위하여 준비해 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도 사교계의 유행은 안젤라가 주도했다. 베를리아가 갔던 의상실에서도 안젤라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노렸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날 베를리아는 의상실에 있는 모든 드레스를 샀다. 안젤라가 자주 입는 스타일을 반영한 드레스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안목에 부족하다는 듯, 거액의 돈을 주고도 가지기를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한 마디로 베를리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것들을 죄 버렸다는 것이다.

귀족들에게 자존심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 남이 버린 것을, 아무리 비싸다 한들 기껍게 입을 귀족 여인들은 단언컨대 없었다. 설령 드레스가 정말로 필요했더라도 그 드레스가 빛을 보는 날은 그 일이 모두 잊힐, 먼 어느 날이 될 터였다.

수도의 가장 유명한 의상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보는 눈들이 많았다. 소문이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런 것들을 입고 나오겠는가. 아무리 파티가 당장 며칠 뒤에 있어 새로 드레스를 맞추기 촉박할지라도.

심지어 그런 행동을 수도의 사치품으로 가득한 거리를 돌면서 반복했다. 의상부터 보석, 구두, 향수까지 다들 이번 연회에서 새로운 것들을 구하기 위하여 발등에 불이 나게 뛰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유행을 주도하던 안젤라만 뒤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사교계의 유행을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이 사랑받는 성녀이자 황태자의 연인으로서 원하는 대로 입어왔으니까.

물론 이런 식으로 유행을 바꾸는 것은 상당히 무모한 일이었다. 귀족들이 베를리아의 의도를 따르지 않았다면 헛된 수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멸시하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버린 것을 귀족들이 수용할 리 없다는 것을. 그들의 오만이 기꺼이 베를리아의 덫에 발을 디디게 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베를리아가 이렇게 순식간에 유행을 바꿀 힘이 있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게 만들었다.

“어머, 성녀님 옷 좀 보세요.”

누군가 드디어 말문을 뗐다. 여태까지의 수군거림과는 다르게 조용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그게 누구인지는 사실 아무도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베를리아가 이미 손을 써놨기 때문에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겠지만.

“오늘따라 참….”

“성녀님도 저런 드레스를 입고 있으시니, 평소와 다르시네요.”

사교계 방식의 앞담화가 순식간에 즐비했다. 들으란 듯이 다 들릴 법한 목소리로 말하는 주제에 부채 뒤에 숨어서 아닌 척만 하는.

안젤라는 지금이라도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던 황태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는 것이 베를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는 안 되지.’

또각또각 소리를 일부러 내며 베를리아가 황태자를 향해 걸어갔다.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준비해 뒀던 그녀는 단언컨대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태자 전하.”

턱을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편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불렀다.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한 목소리. 그건 누가 봐도 자신의 매력을 잘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본래의 베를리아는 좀처럼 이런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황태자와, 친구라고 여겼던 자들이 그녀가 조용히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베를리아를 부끄러워했으니까.

“…베를리아 리들턴.”

황태자의 사나운 시선이 베를리아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달콤하게 웃으며 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저와 춤을 춰 주시겠어요?”

이제는 황태자에게 엿을 먹일 차례였다.

황태자는 베를리아 리들턴을 싫어한다. 그게 모두가 알고 있는 사교계 공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적나라한 비웃음이 카를로스의 입가에 떠올랐다.

물론, 얼마 가지 못했지만.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그가 거절의 말을 내뱉기 전에 베를리아가 작게 속닥였다. 황태자의 입이 다물렸다. 그리고 그녀는 인내심 있게, 아니 여유롭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카를로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기꺼이, 리들턴 백작.”

다시 장내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베를리아 리들턴을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던 모든 이들의 입이 다 물리고, 끝내 그들의 시선이 뒤에 홀로 남은 성녀를 향했다.

첫 춤은 파티장의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 여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황태자의 첫 춤은 늘 성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

“무슨 수작이야.”

첫 춤을 여는 것이 황태자였기 때문에 플로어의 주인공은 당연히 그들이었다. 이목이 쏠려 있으니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대화를 하려면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붙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태자 전하.”

화사하게 미소 지은 베를리아가 모른 척 대답했다. 아닌 척해도 파티장 내의 대다수 시선이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 일이 네 짓인 걸 모를 것 같아?”

능청을 떠는 베를리아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럴수록 베를리아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화려하고, 그래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결국 홀릴 수밖에 없을 법한.

“제 수작인 걸 아시면 더 조심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태자 전하.”

베를리아가 능숙하게 턴을 돌며 멀어졌다가 도로 가까워졌다. 꽤 빠른 춤곡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호흡 한 점 흐트러지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

베를리아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내걸렸다. 아까 카를로스가 그녀에게 지었던 비웃음과 상당히 유사한 웃음이었다. 물론 그것은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 돌려 주기 위해 보란 듯 지은 것이었다.

“제가 필요한 건 태자 전하 쪽이실 텐데요.”

늘 그랬듯이 제멋대로 내뱉던 카를로스의 입이 다물렸다. 황태자는 아직은 신전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를리아의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전대 황제는 최악이었고 그래서 아직도 많은 이권은 귀족들의 손에 고스란히 쥐어져 있었으니까.

“…좋다, 그럼 오늘 일은 용서해 줄 테니-”

“풋-.”

베를리아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변한 것 없이 자신밖에 모르는 사내란 게 너무 우스웠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오늘 무언가 일을 당한 건 성녀였다. 딱히 용서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무얼 하든 안젤라가 결정할 일 아니던가. 그런데 황태자는 마치 당연한 듯 안젤라의 의견을 무시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 저는 오늘.”

그녀의 노골적인 웃음소리에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카를로스의 시선이 베를리아를 빤히 응시했다.

“제게 빌 기회를 드리려고 했답니다.”

“…감히, 뭘 해?”

춤곡의 끝이었다. 복잡한 스텝을 끝까지 밟아낸 베를리아가 미련 없이 카를로스의 손을 놓고 떨어져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굳이 드릴 필요도 없어 보이네요.”

황태자가 허락을 내리기도 전에 감히 방자하게도 베를리아가 먼저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또각또각. 아까 다가왔듯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도 망설임이라고는 한 자락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베를리아.”

밤바람이 차가웠다.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베를리아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도 추운 테라스로 나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로베르 후작님.”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난 비겁한 사내는 그게 아니라면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무사해서 다행이야, 베를리아….”

“아무리 제가 평민 출신 백작이라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염려를 늘어놓으려는 사내의 말을 끊어냈다. 그 자리에 항상 애정을 처절하게 구걸하느라 일그러진 얼굴로 악을 쓰던 베를리아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미소를 걸친 채로 단호히 이야기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저와 후작님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를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사내의 입술이 달싹거리기만을 반복하다 끝내 닫혔다. 그 모습이 참 새삼스러웠다. 이토록 조용할 수 있는 자들이었거늘 베를리아 리들턴은 진작에 왜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왜 그래, 베를리아. 화난 거야?”

잠시 주춤하던 로베르 후작이 마치 삐진 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게 우스워서 베를리아는 픽 바람 새는 뜻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참, 뻔뻔하다. 리암 로베르.”

염치도 모르고 다가오던 리암을 베를리아의 웃음이 막아 세웠다.

베를리아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자 중에서 그나마 나은 이가 있다면 아마 리암 로베르일 것이다. 그는 사실 베를리아를 다른 이들처럼 경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리암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 또한 그에 휩쓸렸을 뿐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가해자라면 리암 로베르는 방관자였다. 정도에 얼마나 차이가 있든 베를리아의 고통을 자아낸 것은 똑같다. 개중에 낫다고 해서 그것을 선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화가 났냐고?”

베를리아가 한 걸음 그에게로 다가섰다. 고혹적인 알 수 없는 향이 밤바람을 타고 그녀로부터 전해졌다. 안젤라를 따라하느라 사용했던 달달한 향이 아니었다.

그것이 지금의 당당한 베를리아에게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어쩐지 리암은 그녀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자신이 처음 만났던 베를리아 리들턴 또한 지금과 같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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