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7)화 (7/148)

7화. 주인공의 인정 없이도 악녀는 존재했다(4)


 

드레스라는 건 사교계의 유행과 계절 등 짧은 시간 안에도 그 디자인에 있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의상실은 길면 한 달 짧으면 일주일 안에도 많은 드레스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영애의 말대로, 솔직히 말하자면 베를리아가 오늘 사들인 드레스는 하루에 한 벌씩 매일 갈아치운다고 할지라도 그 시즌 내에 다 못 입을 것들이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낭비였다.

“골탕이라니.”

그러나 베를리아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미소했다.

“나는 또 하도 사교계에서 내가 사치스럽다고 소문이 났길래.”

차를 우아하게 머금고 잔을 내려놓은 베를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해 주려고 한 것인데.”

베를리아 리들턴이 사치스럽다고 떠들던 이들은 정말 모르기에 그 입으로 떠벌릴 수 있는 것이다.

베를리아가 할 수 있는 사치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좋아, 내가 그토록 실례했다니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

베를리아는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미안하다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그러나 그들이 베를리아를 두고 사치스럽다 떠들었던 것도 사실이요, 그녀가 직접 미안하다 하고 있으니 베를리아에게 따지고 들던 영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 자리에 있는 베를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힘으로 짓누르는 베를리아에게 익숙했고 그런 그녀를 두고 패악을 부린다며 욕하는 것에 익숙했다. 즉 이렇게 우아하게 웃으며 조곤조곤하게 대꾸하는 베를리아는 모른다는 뜻이었다.

베를리아는 그조차 우스웠다. 그들은 베를리아가 감히 저들과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귀족이랍시고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저들 모두 스스로는 절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그녀가 보이는 이런 ‘귀족적인 방법’에 그들이 왜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는지.

이유는 간단했다. 사실은 저들 또한 그동안의 경험을 말미암아 베를리아의 힘이 어떤 것인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귀족적으로 얌전히 굴었다면 저 오만한 작자들이 어떻게 나왔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자신들을 흉내 낸다며 실컷 더 비웃기나 했겠지.’

귀족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이 굴복하는 것은 결국 베를리아의 ‘힘’이었다. 다만 그녀가 그 힘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가 조금 달라졌을 뿐.

본질을 보면 하등 다를 것이 없는데 겉에 금칠한다고 해서 저토록 다른 태도를 보이니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차피 지금 여기 있는 드레스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베를리아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지금 나와 있는 드레스를 사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금 사교계의 유행은 안젤라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즉 현재 만들어진 드레스들이라고 해봐야 ‘진짜’ 베를리아가 옷장에 꾸역꾸역 사다 놓은 그 어울리지도 않는 옷들과 딱히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다른 이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베를리아가 오늘의 희생양이 된 한 영애와 눈을 마주한 채로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녀의 목적은 애초에 과시였다.

“오늘 이곳에 온 영애들에게 원하는 드레스를 선물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 과시를 뒤따라올 결과물이었다.

수도의 가장 잘 나가는 의상실에서, 부르는 게 값일 드레스들을 베를리아는 아주 쉽게 포기해버렸다. 그 포부에 더 이상 그녀를 사치스럽다고 비난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베를리아의 스케일은 그들이 입방아를 찧을 수 있는 상상의 범위를 훌쩍 넘어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이번에는 메리쉬가 아까 내려놓은 함보다도 커다란 궤짝을 들고 와 내려놓았다. 그도 모자라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니 그 자리에 궤짝이 줄지어 늘어섰다. 모두가 그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메리쉬가 궤짝을 열자 그 안에 있는 보석들이 의상실에 화려한 조명에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보석상이라고 할지라도 저 많은 보석을 이토록 단번에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마담의 눈이 홀린 듯이 궤짝에 든 보석들에 꽂혀 있었다. 물론 그것에 꽂혀 버린 것이 비단 마담뿐은 아니었다.

“오늘부터 마담은 내 전속 디자이너가 되도록 해. 값은 그에 걸맞게 쳐주도록 하지.”

베를리아가 제게 따지고 들던 영애를 바라보며 웃었다.

“또 누군가 나 때문에 드레스를 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하니… 이제부터 마담이 내 옷만 만든다면 그런 소리 들을 일은 없겠지. 안 그런가, 영애?”

베를리아와 시선을 마주한 영애의 몸이 움찔했다. 수도의 제일가는 유행을 만들어 내는 의상실이었다. 그런 곳의 마담을 전속으로 두고 싶지 않은 귀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귀족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럴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담 루비나의 의상실은 수도에 있는 귀족들의 재산을 쓸어 담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간에는 루비나의 재산이 웬만한 귀족들을 압도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루비나의 드레스를 입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유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런 루비나를 전속으로 두는 건 절대 수지 타산이 맞는 일이 아니었다.

전속으로 둔다는 것은 한 사람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게 한다는 의미다. 억 소리 나는 루비나의 드레스들을 팔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 그대로 과시용이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굳이 그렇게 했다. 왜? 그녀는 그렇게 과시해도 무리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선금일 뿐이니 최선을 다해봐, 마담.”

루비나의 얼굴이 설렘으로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게 저 어마어마할 금액이 그저 선금이었다. 즉 리들턴 백작의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만들어 내면 상여금도 있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베를리아 리들턴과의 독점 계약은 루비나에게 있어 나쁠 것이 없었다. 푸른 피를 따지는 귀족들이야 몰라도 루비나는 상인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다들 매번 괄시하는 척해도 결국 무시할 수 없는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다. 심지어 그 무시무시하다는 마녀 재판을 앞두고도 저렇듯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빠져나왔으니 그 권세의 대단함이 더 널리 퍼질 게 뻔했다.

아무리 귀족들이 베를리아 리들턴을 멸시해도 그녀는 명실상부 이 나라의 실세였다. 지나가던 아이들도 황태자의 이름은 몰라도 므시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안다. 떠도는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어느 정도 진실이기도 했다.

즉 그런 베를리아 리들턴의 드레스를 독점으로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은 루비나의 이름값도 덩달아 높여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백작님의 스케줄에 맞춰 원하시는 때에 찾아뵙겠습니다!”

이미 베를리아가 내놓은 대가만으로도 석 달 치 수익은 족히 넘었다. 마담의 허리가 절로 깊이 숙여졌다.

베를리아가 폭풍처럼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자신들이 떠들었던 사치가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있어 얼마나 우스웠을지, 그것이 수치스러워 말을 잃은 자들뿐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행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루비나의 의상실에서 그랬듯이 다른 의상실 두 곳과 보석상 세 곳 그리고 구두, 향수 등의 공방을 휩쓸었다. 당연히 그날 수도는 베를리아와 전속 계약한 장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었다.

***

“마스터, 꼭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저택으로 돌아오자 말 그대로 베를리아의 돈지랄을 전해 들은 그녀의 재정 사무관 데니얼이 떡하니 문 앞에서부터 버티고 서 그녀에게 물었다.

“데니얼, 내가 쓸데없는 짓 하는 거 본 적 있어?”

“예.”

베를리아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리들턴을 15살의 나이로 집어삼킨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데니얼은 망설임 없이 베를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아닌데.’

베를리아가 눈을 도로록 굴렸다. 그리고는 곧 데니얼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유를 집어 내고는 덧붙였다.

“황태자나 그들의 일을 제외하고.”

뒤늦게 따라오는 조건에 탐탁지 않게 눈을 가로 뜨던 데니얼이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좀 기다려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메리쉬는 베를리아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목숨을 걸 터였다. 재스민은 어차피 제 주인이 하는 일이라면 모두 멋있어요, 최고에요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른다.

말릴 사람은 결국 데니얼 밖에 없었다. 그러나 느긋하게 말하는 베를리아의 앞에서 그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 감옥에 갇혔던 이후로 처음 오는 연회였다. 그러니 오늘은 모든 것이 더 완벽해야만 했다.

베를리아를 위한 드레스는 그녀가 지불한 돈만큼이나 빠르고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마침내 그녀가 파티장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베를리아는 자신이 고대하던 그 재미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 카를로스 에덴버 황태자 전하와 신의 딸, 성녀 안젤라 애거스틴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종이 주인공들의 도착을 알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되었다. 늘 그렇듯 그들은 주인공답게 조금 늦게 도착하여 더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티장에 들어서는 순간 안젤라의 얼굴은 굳어 버렸고,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몇몇 이들 사이에서 안젤라를 향한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성녀의 얼굴이 곧 수치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채로 제 미소를 가린 채 들고 있던 샴페인을 홀짝이며 베를리아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봤다.

곧 안젤라와 베를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베를리아가 부채를 탁 소리를 내며 접었다. 잔뜩 당황한 자들과, 황태자의 눈치를 보며 작게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사이로 그 부채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너희가 언제까지고 주인공일 줄 알았어?’

베를리아가 거리낌 없이 제 만면을 드러내며 화려하게 웃고 있었다. 오만하고 당당하게. 그녀는 그들이 주인공이기에 누려 왔던 모든 특권을 엉망으로 일그러트려 놓을 작정이었다.

안젤라가 들어선 순간 굳어 버린 이유는 하나였다. 이 파티장에서 그녀만이 유행에 동떨어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