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주인공의 인정 없이도 악녀는 존재했다(3)
그건 확고한 진심이었다. 카를로스가 얼마든지 베를리아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메리쉬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가 카를로스를 사랑하는 한 황태자의 존재는 베를리아에게 있어 위협이었다.
“내가 네게 복수하면 어쩌려고?”
베를리아 리들턴은 제가 아끼는 것을 건드리는 상대에게는 가차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메리쉬는 아직 리들턴의 이름도, 므시아도 이어받지 않았다. 그런 메리쉬가 지금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그녀의 손에 죽을 게 뻔했다.
“그때까지는 베를리아 님께서 살아가실 테니까요.”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메리쉬는 제 주인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두 번이나 그녀의 숨을 황태자의 손에 쥐여 줄 수는 없었다. 설령 대가가 제 목숨이라 할지라도.
“또, 베를리아 님께서 다른 삶의 이유를 찾으실 때까지 죽지 않도록 버텨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베를리아의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메리쉬가 덧붙였다. 제 목숨과 베를리아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두었을 때 무게추가 어디로 기우느냐는 메리쉬에게 있어 너무 간단한 문제였다.
제 목숨이 그녀의 끝을 유예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쓰임새가 어디 있으랴.
베를리아는 메리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메리쉬가 괜히 이 소설의 메인 악역이었던 게 아니다. 그에 걸맞게 잘난 얼굴과 잘난 능력 모두를 갖추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불어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에게 절대 주지 않을 맹목 또한 가지고 있었다.
‘…왜 너는 이런 남자를 못 본 걸까?’
그녀에게는 베를리아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에 따르면 누구라도 베를리아의 적이 되는 순간 죽음 앞에서 버틸수록 그 모습은 처참해질 게 뻔했다. 예외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베를리아, 너는 왜 카를로스 같은 걸 사랑했을까. 왜, 그래서 너를 버렸을까.’
원작을 읽는 내내 그녀는 베를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버릴 만큼 카를로스를 사랑한 게. 그러면서도 애잔했다. 당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코앞에 있는데. 그래서 저밖에 모르는 베를리아를 그렇게 버린 카를로스가 더 미웠다.
그녀는 메리쉬에게 손을 뻗었다. 그대로 뺨을 감싸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자신을 보게 했다.
진짜 베를리아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카를로스 따위에게 홀려 목을 내다 바치고 싶지도, 저밖에 없는 사람을 몰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해볼래?”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을 건넸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메리쉬의 세계였다. 전부였다.
“내 새로운 삶의 이유.”
베를리아는 메리쉬의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사랑도 될 수 있으리라.
‘내가 네 사랑이 되어야겠어.’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두 입술이 맞닿았다.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얼어붙어 있던 남자는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자신을 사로잡은 보랏빛 시선에 얽혀 있을 뿐.
***
“헤넌스 자작.”
“누구냐!”
검은 밤,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들었다. 그러나 상대가 목소리를 내도록 존재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은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대에게 검을 겨누었다.
까강!
어둠에서 나온 사내는 그 검을 가볍게 막아낸 뒤 입을 열었다.
“아직 실력은 녹슬지 않았군, 앨리스.”
“메리쉬 님?”
상대를 확인한 앨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베를리아가 갑자기 므시아의 해체를 명한 뒤 메리쉬 또한 갑자기 사라져 버렸었다. 그 이후로 처음 보는 상대였다.
앨리스 헤넌스 자작. 그건 베를리아가 그녀를 귀족원에 밀어 넣기 위하여 만들어 준 신분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가 사라져 버린 후, 앨리스 또한 남들 몰래 수도를 떠나 별장에 칩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건 메리쉬가 이미 앨리스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베를리아 님께서 돌아오신 겁니까?”
그녀가 물었다. 메리쉬는 오직 베를리아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존재였다. 그런 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로 짐작할 것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우리 쪽 귀족들을 불러 모아.”
메리쉬가 답했다. 베를리아가 귀족원에 심어둔 이들은 앨리스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황위 계승권을 가진 자들이 죄 죽었다고 하나, 지지층이 약했던 카를로스 에덴버가 어찌 쉬이 황태자 위에 올랐겠는가.
베를리아의 수족들이 아니어도 돈과 권력에 의해 밀접하게 얽힌 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면 황태자의 지지 기반을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게 없었다. 그게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싫어했던 또 다른 이유였고.
“베를리아 님께서 중앙 귀족회에 복귀하시겠다고 하셨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명을 전달했다. 카를로스를 위해 했던 모든 것들을 이제는 베를리아가 자신을 위해 쓸 차례였다.
“예, 메리쉬 님.”
앨리스가 기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고 명을 받들었다.
암흑가의 황제, 므시아의 재건이었다.
***
“진행 상황은?”
“저희 쪽은 이미 모두 연락이 갔습니다.”
베를리아는 죽기 전, 마지막까지 므시아의 일원들을 위한 안배를 해 두었었다. 대가는 이렇게 돌아왔다. 므시아는 베를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원하시는 언제든 복귀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놨다고 앨리스가 전해 왔습니다.”
메리쉬의 보고를 들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끝났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자신의 복귀를 명하는 날짜가 아니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인 황태자와 대치하는 이상 평온한 일상은 힘들 것이다. 그녀가 카를로스를 싫어하는 것을 둘째 쳐도 그를 밟아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의 준비만으로도 카를로스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무리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건 이런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재스민, 외출 준비를 해.”
방금까지 메리쉬와 나누던 대화와 전혀 상관없는 명령에 재스민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보며 베를리아가 덧붙였다.
“오랜만에 마담을 찾아가야겠어.”
***
현재 사교계의 유행은 여주인공인 성녀 안젤라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그녀는 곧 연회에 참석해야 할 테니까.
그곳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안젤라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비웃음당할 생각 따위, 베를리아에게는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유행을 바꾸기로 했다.
“어머, 리들턴 백작님. 요즘 왜 이리 발걸음이 뜸하셨어요!”
리들턴의 마차가 의상실 앞에 멈추었다. 그곳에서 베를리아가 내리자마자 마담이 마중 나와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그런 마담의 호들갑이 딱히 싫지 않았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누가 뭐라 해도 이 나라의 거부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마담은 늘 이렇게 호들갑스러울 만큼 기쁘게 베를리아를 반겼다. 나쁘게 말하면 속물적이었지만 겉으로는 고상을 떨며 뒷말이나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대놓고 솔직한 게 나았다.
“…세상에, 리들턴 백작 아니에요?”
“한동안 안 보이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사치를….”
베를리아는 일반인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가 남들보다 신체 조건이 뛰어나지 않았어도 수군거리는 소리는 충분히 귀에 들어왔을 테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지금 저들의 말은 그녀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사치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은 이 구시대적인 사상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소설 속에서나 통하는 발상이었다. 현대에서 온 그녀는 그런 거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 돈으로 내가 산다는데 지들이 뭔 상관이람.’
어차피 그녀가 이곳에서 얼마를 쓰던 그들은 자신을 욕할 것이 뻔했다. 적게 사면 적게 사는 대로 리들턴도 한물갔다며 비웃을 것이고, 많이 사면 또 많이 사는 대로 사치한다고 욕하겠지.
가볍게 코웃음 친 베를리아는 자신을 헐뜯는 자들에게 들으란 듯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말도 못하게 만들어 주지.’
“내가 오랜만에 오기는 했지, 마담.”
그네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여유롭게 미소한 베를리아가 마담의 말에 가볍게 답했다. 그리고는 의상실의 문을 가리켰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의상실의 문을 닫도록 해.”
“네?”
갑작스러운 베를리아의 말에 당황한 마담이 되묻자 그에 상큼하게 마주 웃은 그녀가 쐐기를 박아 넣었다.
“오늘 여기 있는 건 모두 내가 살 예정이거든.”
그 순간 의상실 안에 커다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스민은 베를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함을 하나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열어본 마담이 순간 호흡이라도 멈출 것처럼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그 보석함 속에는 오늘 이 의상실에 있는 드레스뿐 아니라 의상실에 있는 것들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보석들이 가득가득 차 있었다.
누가 봐도 이건 돈 자랑이었다. 물론 베를리아는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리들턴의 건재함을 보여 주는 데 이보다 쉬운 일은 없었다. 어중간하면 천박하다 욕하겠지만, 그 정도가 압도적이라면 결국 그 입조차 열지 못할 테니까.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리들턴 백작님…! 이 루비나만 믿어 주세요!”
한동안 억 소리 나는 베를리아의 행동에 말도 잃고 있던 마담 루비나가 일견 사명감에 불타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이 마치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던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사람들에게 누군가 땡 소리를 내준 것처럼.
“아니, 잠깐, 잠깐만요…!”
퍼뜩 정신을 차린 한 영애가 성큼성큼 베를리아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얼굴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것처럼.
“왜 그러지?”
그 영애에게로 시선을 옮긴 베를리아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물었다. 그 거리낄 것 없다는 듯한 시선에 패기 있게 나선 것 치고는 영애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니까.”
베를리아는 어느덧 의상실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마담이 직접 내어온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얼마든지 말해 보라는 듯 여유롭기까지 한 그 시선에 영애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가만히 있으면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인상이었다. 도도하다 못해 냉기가 풍길 만큼 서늘하고 퇴폐적인 느낌의 미인으로, 그동안 여타 귀족들이 그녀를 감히 깔볼 수 있던 이유는 베를리아가 늘 황태자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시선을 곧게 향하고 있는 베를리아 리들턴은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니 자신들이 여태껏 봐왔던 베를리아만을 생각했던 상대가 말을 쉽게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주제에.’
순간적으로 그런 이들이 너무 우스워서 베를리아는 픽 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비집고 나오는 실소를 굳이 숨길 생각도 없었다.
“윽…. 그러니까, 백작님의 욕심으로 이 많은 사람을 헛걸음하게 만드셨잖아요!”
그리고 그 웃음을 정면으로 받아낸 영애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그것을 바라보며 베를리아가 어디 한 번 더 말해보라는 듯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요! 저 많은 드레스를 다 입으실 것도 아니면서 굳이 다른 이들을 골탕 먹이려는 마음이 아니시라면…!”
베를리아가 지금 당장 이곳의 모든 것을 사버린다는 건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못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베를리아가 너무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베를리아는 여기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군, 내가 잘못 생각했어.”
돌연 베를리아가 쉬이 손뼉을 짝 치며 쉬이 긍정했다. 그녀가 웃었다. 베를리아에게 따지고 들던 영애조차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