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5)화 (5/148)

5화. 주인공의 인정 없이도 악녀는 존재했다(2)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둘 사이의 거리가 훅 가까워졌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런 그에게로 손을 뻗은 그녀는 다정한 낯빛으로 카를로스의 흘러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너를 그 자리까지 올린 게 무엇인지 잊으면 곤란해, 카를로스.”

카를로스가 아무것도 없었던 4황자일 적에는 그에게 닿는 것, 그를 부르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굳이 허락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마침내, 제 뜻대로 황태자의 자리를 거머쥐었을 때부터였다.

원작에서는 그것을 두고 <베를리아 리들턴은 늘 카를로스를 물건처럼 제멋대로 휘둘렀다.>라고 서술했다.

“감히, 지금 나를 속였다고….”

베를리아 리들턴은 황태자의 바람대로 므시아를 해체했다. 므시아, 어둠의 세계를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지배해 온 단체의 이름이었다. 흑마법사 네멘 리들턴이 마탑의 규율을 어기고 뛰쳐나와 자신을 추적하던 마탑을 한동안 재기불능으로 만들었을 때, 그를 따르던 모든 악한 자들이 모여 있었던… 말 그대로 악의 집단.

그런 므시아를 15살의 베를리아 리들턴이 네멘 리들턴에게서 탈환했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 므시아는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절대복종해 왔다. 가장 강한 자가 그곳의 수장이 된다는 네멘 리들턴의 규율에 따라서, 그들이 네멘 리들턴에게 복종해 왔듯이.

소설 속에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어떻게 그들을 복종시켰는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다. 다만 훗날 메리쉬 리들턴에 의하여 므시아는 부활한다.

그것을 말미암아, 베를리아는 자신이 빙의한 것을 안 시점부터 이렇게 할 계획이었다.

‘므시아를 다시 일으켜야겠어.’

‘예, 베를리아 님.’

베를리아의 명령에 메리쉬는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운이 좋게도 그녀에게는 베를리아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베를리아와 므시아의 관계가 얼마나 깊게 얽혀 있었는지를.

베를리아 리들턴은 므시아를 해체했다. 단, 저를 따르던 자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또 그들이 므시아에서 나간 이후의 삶을 부족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게 오래도록 준비해 온 뒤였다.

마치 카를로스 에덴버가 그것을 요구할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니 므시아에게 베를리아는 네멘 리들턴과 달랐다. 그녀는 그들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남들에게는 범죄 집단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므시아의 일원들에게 베를리아의 존재란 말 한마디로 잊혀질 만큼 가볍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베를리아 리들턴의 귀환을 기다렸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토록 간절히 애정을 바랐던 이들을 제외하고.

자신을 속였다며 분노하는 카를로스의 감정은 그래서 우스웠다. 애초에 이 관계에 믿음이 있긴 하던가?

“나를 먼저 배신한 건…. 너야, 카를.”

상냥한 미소,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는 손길, 마치 애정이 담긴 것 같은 애칭.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의 손길이 제게 닿을 때마다 끔찍했다. 자신에게 힘만 있다면 그 손을 내쳐 버리고 싶었다. 매 순간.>

황태자는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베를리아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리라고는, 그리고 제게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사내는 그토록 베를리아 리들턴을 증오했으면서도 우습게도 그녀가 보이는 맹목적인 애정에 길들여져 있었다. 사람을 숨 쉬게 만드는 공기처럼 아주 당연하게 그를 이루는 한 부분으로서.

“…내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구걸하던 게 누구였더라?”

잠시 말을 않던 카를로스가 이죽거렸다.

-나는 널 사랑하지 않아, 베를리아.

원작에서부터 카를로스는 항상 베를리아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직은 황태자가 베를리아 리들턴을 그렇게 많이 증오하지는 않았던 그때, 적어도 사랑하지 않으니 더 이상 기대를 품지 말라 말해 줄 정도의 마음은 있던 그때,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서술되지 않았던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네 옆에만 있게 해 줘.’

‘난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그래,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 그는 분명 그렇게 거절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 리들턴은 정말로 카를로스에게 구걸했다.

‘아직 내가 필요한 곳들이 있잖아.’

베를리아 리들턴은 나약했던 카를로스 에덴버를 비춰내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황태자는 제 어미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것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던 제 나약한 시절을 증오했다.

‘네 개가 되어도 좋아.’

힘이 없던 카를로스에게는 구원이었으나 힘이 있는 카를로스에게는 족쇄였다. 그 족쇄를 끊어 버리고 싶던 황태자의 앞에서 베를리아는 어떤 식으로든 버텨야만 했다.

-나를 버려도 괜찮겠어? 나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를 협박하며 뻔뻔한 낯짝으로 미소했다. 그 순간 카를로스는 강렬한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가 황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여전히 옥죄어왔다. 그는 마치 그녀에게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끔찍함에 시달렸다.>

-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아는데.

원작은 매 순간 베를리아에 대한 카를로스의 증오심을 부채질했다. 베를리아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작에 서술된 것은 한 사람의 처절함보다 악녀의 독한 집착뿐이었다.

-좋다, 베를리아 리들턴. 네 뜻대로 하도록.

<끝내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에게 백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훗날 이 치욕을 반드시 되갚으리라, 황태자는 그렇게 다짐했다.>

-단, 사랑은 바라지 말도록.

-상관없어.

<베를리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치 카를로스는 그녀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승자처럼.>

그러나 원작에 나온 묘사와는 달리, 그날 베를리아는 울고 있었다. 그날의 미소는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입꼬리는 파르르 떨리며 올라가 기괴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원작 속에서는 서술되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그만두려고.”

호구짓은 딱 질색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나는 이제 네게 모든 것에는 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것을 그만둔 베를리아 리들턴이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이제 무엇을 할지도.

“네가?”

픽, 순간적으로 카를로스에게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베를리아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처럼.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원작 속의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면 끝내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했을 것이다.

‘어리석게도.’

카를로스든 베를리아든 분명 본래의 그녀에게는 그저 소설 속의 인물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복수심이 불타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네가 미워,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의 자안이 한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눈앞의 사내에게 어떻게든 상처를 내고 싶었다. 베를리아가 가진 기억들이 떠오를수록 그 감정은 먹이를 먹은 화마처럼 번져갔다.

“그래.”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뺨을 매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황태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단 한 번도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에게서 먼저 물러난 적이 없었다.

“네가 감히.”

카를로스가 이를 아득 악물었다. 반사적으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사내를 두고 베를리아는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널 사랑하지 않아, 카를로스 에덴버.”

환하게 미소한 베를리아가 선언했다.

너는 알아야만 한다. 베를리아의 사랑이 없는 네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

“무슨 할 말 있어?”

신전에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내내 제게 닿아 있는 메리쉬의 시선에 베를리아가 입을 열었다.

사실 알 것 같았다. 메리쉬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것을 물어도 될까? 메리쉬는 지금까지 묵묵히 베를리아를 따를 뿐 그녀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감히 제 의사를 표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메리쉬로서도 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베를리아가 변했다. 메리쉬에게 그건 세계가 변하는 일이었다.

“…베를리아 님께서는.”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의외였다. 베를리아는 원작 속에서 메리쉬가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침묵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베를리아가 허언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메리쉬로서는 믿기 힘든 일이었다.

므시아의 모든 이들이 베를리아에게 매달려도, 겨우 그 황태자 하나를 이기지 못해서. 그래서 그녀는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제 목숨을 걸었으니까.

“안 믿기나 보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찰나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의 어조는 아주 작고 미약했다. 그러나 메리쉬는 확답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아직 사랑한다면?”

베를리아는 메리쉬의 반응이 궁금했다. 소설 속에서는 서술되지 않았던 메리쉬의 다른 면모들이 꽤 신기하고 새롭게 다가왔다. 그가 단순히 책 속 인물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베를리아 님께서 황태자를 사랑하신다면.”

지금까지 망설인 게 거짓인 것처럼 순간 메리쉬의 말투가 단호해졌다. 늘 제 주인인 베를리아의 앞에서 내리깔고 있던 그 녹색 시선이 그녀와 똑바로 마주해왔다. 그 속에는 숨 막히는 증오가 담겨 있었다. 메리쉬는 이제 카를로스 에덴버를 향한 증오를 숨기지 않았다.

오직 카를로스 에덴버만이 베를리아를 살게 한다면 메리쉬는 그깟 황태자일지라도 얼마든지 그 앞에 몸을 낮추고 발치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 메리쉬가 므시아를 와해시키라는 베를리아의 명령에도 복종했던 것은 그게 그녀가 사는 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신이듯이 카를로스 에덴버가 그녀의 세계였다. 메리쉬는 그것을 알기에 황태자를 위한 모든 것들을 제 손으로 해냈다. 감히 제 신을 바닥으로 깔아놓는 그 오만방자한 종자가 지극히도 증오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 지금 메리쉬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카를로스 에덴버는 베를리아를 죽이는 존재였다.

“전 황태자를 죽이고 베를리아 님의 적이 될 겁니다.”

그러니 감히 제 신을 위협하는 자- 이 세계에 더는 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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