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주인공의 인정 없이도 악녀는 존재했다(1)
베를리아가 오만한 어조로 당당히 요구했다. 어차피 제 말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 당장 마녀 재판을 취소하세요.”
“그건….”
“혹시 황태자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그건 접는 게 좋을 거예요.”
황태자가 자신에게만큼은 맹목적이었던 베를리아 리들턴을 끝내 죽이려고 한 것은 비단 그녀가 안젤라를 위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가진 막대한 자금. 언제까지고 그것을 그녀의 힘을 빌려 사용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는 베를리아 리들턴을 마녀로 몰아 종국에는 리들턴 가의 재산을 회수하고 황실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신전과 권력을 나누려는 생각이 없거든.”
대신관도 알고 있었으리라. 내일 황실이 마녀 재판을 통해 베를리아 리들턴을 처형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러니 잠시라도 망설인 것이다. 어차피 순차적으로 베를리아가 죽는다면 굳이 협박에 시달릴 필요 없이 여태까지와 같이 황태자에게 기부금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건 황태자가 지금까지와 같이 신전에 협조적일 때의 이야기였다.
“황태자가 성녀와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요.”
대신관은 말이 없었다. 황태자와 성녀의 사이는 이 제국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신전은 그것이 황실과 신전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황태자가 성녀와 결혼하고 나면 언제까지 신전에 협조적일까요?”
베를리아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원작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 이런 작은 돌멩이를 호수에 던져 넣는 것 따위,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요요하게 휘어졌다.
“말도 안 됩니다. 성녀님께서는 신의 딸이십니다, 그런 분이 어찌 결혼을….”
대신관이 단번에 베를리아의 말을 부정했다. 성서의 율법 상 신의 종은 결혼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바로 그 허점을 이용한다.
“성녀는 신의 딸이지, 신의 종이 아니니까요.”
그 순간 대신관은 침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억지다. 그러나 그 억지도 힘 있는 자가 행하면 현실이 된다.
현재 황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4황자가 황태자가 되면서 많은 것들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베를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리들턴 가가 무너지고 나서 신전이 어떤 생활을 이어 가게 되느냐는 철저히 황태자의 손에 달리는 셈이 된다.
“태양은 신이 선택한 존재이고 성녀는 신의 딸이죠. 그 자식에게서 성력이라도 발현된다면….”
그렇다면 과연 신전이 황태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베를리아는 애초에 언젠가는 황후를 맞이해야 할 황태자가 성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데도 누구도 제지하지 않은 것부터 순전히 소설의 억지라고 생각했다. 주인공들을 이어 주기 위한. 그러나 여태껏 아무도 인지하지 않았을 뿐 의심을 심어 주는 건 간단했다.
카를로스는 황태자가 되기 위해 제 형제들을 모두 베고 그 자리에 올랐다. 그런 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할 행동 같은 것을 상상하기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지나치게 충분하지 않던가?
“신전의 꼴이 우습게 되겠군요.”
대신관의 질린 낯빛을 구경하며 베를리아가 다시 상체를 뒤로 물렸다. 여유롭게 웃으며 그녀는 대신관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끝내 그 무겁던 입이 열렸다.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
다음 날 신전은 무고죄로 타피나 남작가를 고발했다. 황궁과 귀족들 사이에서 연이어 커다란 파란이 일어났음은 두말할 것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황태자가 분노하여 신전으로 쳐들어온 것 또한 이미 베를리아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이게 무슨 짓…!”
“태자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됩니…!”
입구에서부터 말리는 자와 그것이 통하지 않는 자로 인한 소란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를리아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대신관이 베를리아가 그 통 큰 후원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그녀가 신전으로부터 받는 대접은 매우 극진해져 있었다.
‘그 많은 돈을 썼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고 베를리아는 그 대접을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다. 제 돈 쓰고 그만한 대접도 못 받는 호구 짓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니까.
쾅!
“대신관…!? …베를리아 리들턴?”
결국, 저를 붙잡는 신관들을 모두 뿌리치고 대신관이 있는 응접실 문을 격하게 열고 들어온 황태자가 순간 베를리아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태자전하께서 이토록 성미가 급하신 줄은 처음 알았네요.”
신권과 왕권의 힘이 비등한 이 나라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신전에서만큼은 그 누구라도 신 아래 평등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 원칙대로라면 이미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대신관의 응접실에 이렇게 일방적으로 쳐들어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소리였다.
그게 아무리 황태자인 카를로스라고 할지라도.
“네가, 여기 어떻게….”
베를리아가 그대로 죽었으리라고 여긴 걸까, 아니면 그대로 죽었기를 바란 걸까.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은 베를리아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로 말했다.
“오해가 풀렸으니 신전에 찾아오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해?”
“제가 마녀라는 오해 말입니다, 태자 전하.”
원작 속에서 베를리아 리들턴의 죽음은 진짜 악역인 메리쉬 리들턴의 각성 계기쯤으로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는 다소 허술한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베를리아 리들턴이 마지막에 마녀로 몰려 죽은 것은 명확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일 뿐.
-날 위해 죽어라.
카를로스 에덴버의 그 빌어먹을 헛소리 하나에 제 죽음을 내걸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리고 이 세계의 주연과 조연 모두 그런 그녀의 죽음 따위는 간단히 잊고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베를리아 리들턴은 주인공이 아니니까.
“그러면 타피나 남작가를 고발한 것이…!”
베를리아의 여상한 태도에 카를로스가 이를 갈았다. 타피나 남작가는 그리 세가 크지 않기는 해도 오랫동안 황태자를 지지해 온 가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그가 4황자일 적부터. 그렇기에 카를로스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마지막 처리까지도 믿고 맡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 가문이 고발당했다. 무려 신전에게. 카를로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전이 왜 갑자기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나왔는지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고한 저를 고발하여 오명을 쓰게 만든 것을요.”
“하, 그대의 죄는 그것 하나가 아닐 텐데?”
신전이 베를리아의 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을 만한 조건. 카를로스는 주인공답게 그 머리가 마냥 우매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금세 둘 사이에 있었을 거래를 눈치채고는 기가 막힌다는 듯 묻는다.
그 말이 그녀는 우스웠다. 물론 베를리아 리들턴이 오래전 황족을 시해한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글쎄요. 정말 제가 그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카를로스 에덴버가 할 말은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똑바로 카를로스를 바라봤다. 색이 진한 자안이 가늘게 뜬 눈매 사이로 여유롭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살던, 당신들을 위해 죽어 주던 베를리아 리들턴은 당신들이 직접 죽여 버렸다.
황태자의 입이 다물렸다. 악다문 턱이 분노로 인해 떨려왔다. 잔뜩 굳어 있는 어깨와 한 차례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는 시선이 제법 기세가 사나웠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베를리아는 두렵지 않았다. 무력으로든, 권력으로든.
“무얼 믿고 그리 방자하지?”
베를리아의 말은 자신을 황족 시해 죄로 고발한다면 진실을 발설하겠다는 암묵적인 뜻을 품고 있었다. 절대로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정통성도, 다른 귀족 가문의 뒷배도 떨어지는 4황자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까닭이 무엇이었겠는가. 그 길이 마냥 깨끗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의 개.’
모두가 그렇게 베를리아 리들턴에 대해 비아냥거렸다. 여인으로서의 자존심도 팔고 황태자에게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그가 발이라도 핥으라고 하면 기꺼이 핥을, 천박하고 악독한 여자.
사실 그렇게 욕한다는 건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실은 베를리아 리들턴이 자행해 온 그 모든 일이 누구의 입으로부터 나왔을 것인가를.
그러면서도 모두가 입을 모아 욕하는 것은 베를리아 리들턴뿐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 격으로 황태자는 그저 성군이라 받들었다.
“대신관님,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어요?”
“됐다, 저 여자와는 할 말이….”
황태자는 더 이상 베를리아와 말을 섞기 싫다는 듯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럼 이야기 나누시지요, 태자 전하, 리들턴 백작님.”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대신관이 기꺼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로스의 서슬 퍼런 시선이 대신관을 향했다. 감히 황태자인 자신보다도 베를리아를 우선시한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긁은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상대는 대신관이었고 이곳은 신전이었다. 결국, 황태자는 이를 악물며 문이 닫히는 것을 보더니 자리에 앉기 위해 몸을 돌렸다.
물론 그것은 시도로 그쳐 버렸다. 원래라면 대신관이 앉아 있었어야 할 상석에 베를리아가 이미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황태자에게 자리를 비켜줄 생각 따위 일도 없었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지?”
신전이라서 무기를 반입할 수 없었던 것만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베를리아에게 칼을 들이댈 듯했다. 그것을 모른 척, 베를리아는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한 채로 카를로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지진 않을 테지만, 앉으시는 게 낫지 않으시겠어요?”
“네가 정녕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것인가?”
대놓고 모욕적이었다. 황태자에게는 여전히 한낱 평민에 지나지 않을 여자에게 그 아래로 굽히고 들어오라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으니까. 그가 위협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마치 이 자리에서 베를리아의 목을 졸라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엇을 믿고 방자하냐 하셨지요.”
베를리아의 자안이 희열에 번뜩였다. 그녀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잔인하게 굴었던 황태자의 자존심을 꾹꾹 짓밟아 줄 이 순간을.
“므시아가 정말로 없어지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