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3)화 (3/148)

3화.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3)


 

거울을 바라봤다. 허리까지 오는 암녹색의 긴 머리칼, 선명한 보라색의 눈동자. 소설은 베를리아 리들턴이 독과 같은 아름다움을 품었다고 묘사했다.

그에 반해서 입고 있는 옷은 사랑스러운 느낌이 강한 레이스와 프릴이 달린 옷이었다.

‘…우웩.’

한 마디로 정말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베를리아 리들턴의 취향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냐고?

그거야 어느 소설이나 그렇듯이 여주인공인 안젤라 애거스틴이 현재 사교계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를리아는 그런 사교계 유행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그녀가 관심이 있었던 건 세 남자에게서 이따금 떨어지는 애정뿐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가 간절히 바랐던 그 모든 애정이 안젤라에게는 너무나 쉬웠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단 하나라도 안젤라를 닮고 싶어 했다.

‘어리석고 가엾은 베를리아 리들턴.’

그녀가 가만히 거울 위에 비춘 제 모습을 더듬었다. 황태자와 후작, 기사단장이 베를리아에게 가끔씩 던져 주는 애정은 적선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애정이란 걸 받아 본 적이 없던 베를리아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겨우 그딴 적선 같은 것에 제 모든 것을 걸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한참 자고 일어나니 개운했다. 메리쉬가 데려다 놓은 안전가옥은 황태자조차도 모르는 장소였다.

베를리아는 제 목숨은 그렇게 내팽개쳤으면서도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안전만은 철저히 확보해 두었다. 제가 죽은 후에도 자신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비참한 삶을 살 일이 없도록.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준비를 해 두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그들을 믿었다면 이런 것들을 대비해 두었을까?

“재스민.”

“예, 주인님.”

이름이 불리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칼 같은 단발을 한 붉은 머리칼의 하녀가 튀어나왔다.

“가라고 했더니, 내 말을 듣지 않았구나.”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리들턴 가에서 명령 불복종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재스민이 바로 무릎이라도 꿇으려는 것을 그녀가 웃으며 고개 저었다.

어차피 재스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재스민은 훗날 메리쉬의 복수를 도와 그의 오른팔이 되기 때문이다. 베를리아가 망설임 없이 옷장을 가리켰다.

“저 안에 든 거 다 버려.”

옷장 안에는 안젤라 애거스틴에게나 어울릴 법한 옷들이 잔뜩 있을 터였다. 그러니 베를리아에게는 필요 없다.

‘너는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잖아.’

그녀는 살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소설 속에서 제 속을 뒤집어 놓던 그 뻔뻔한 낯짝의 주인들에게 나름의 복수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내가 베를리아 리들턴이야.’

무엇보다 이곳에는 충분히 그녀를 사랑해 줄 사람들이 있었다. 소설 속의 베를리아 리들턴은 자신이 해바라기라도 되는 것처럼 황태자의 애정만을 갈구했기 때문에 끝까지 몰랐던.

솔직히 말해서 그날, 설정대로 카를로스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구원이 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가 그런 자들 따위에게 목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전으로 가야겠구나.”

“예, 모두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 말에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인 재스민이 사라졌다.

텅 빈 방에서, 베를리아는 그나마 레이스나 프릴 따위는 달리지 않은 가장 간단한 형태의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옷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입은 베를리아는 아름다웠다.

나올 곳과 들어갈 곳이 확실히 구분된 몸매와 어린 날의 훈련을 통해 탄력적으로 가꿔진 자태는 솔직히 옷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독과 같은 아름다움….’

거울을 다시 바라본 그녀는 그 말에 공감했다. 창백하기까지 한 하얀 피부에 올라간 눈꼬리와 선명한 눈매, 피부와 대비되게 핏빛이 진한 입술. 천사 같다며 찬양받던 안젤라의 청순한 매력과는 확실히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베를리아 리들턴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증오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바랐던 누구도 사랑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미소하자 거울 속 자안이 요사스레 깊어졌다. 그녀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이 아름다움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

“리들턴 백작님…? 어떻게 여기에….”

신관이 의아함을 표시하며 마차에서 내린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백작위는 평민이었던 베를리아가 황태자와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해 사들인 작위였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삶은 곳곳마다 카를로스에게 맞춰져 있었다.

“지금 바로 대신관을 불러와요.”

“그게 무슨….”

신관이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녀를 얼마나 업신여기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럴 법도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일 뿐, 베를리아 리들턴이 사실은 평민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는 자가 없었다.

황태자를 사랑한다며 그를 쫓아다니는 제 주제도 모르는 여자. 이 나라에서 베를리아 리들턴의 취급은 딱 그 정도였다.

탁.

그때 신관의 앞에 장부 하나가 던져졌다. 그 무례함에 이제 신관의 얼굴은 대놓고 찌푸려져 있었다.

“빨리 불러오는 게 좋을 텐데.”

베를리아의 뒤로 마치 그 신관을 압박하듯 용병들이 늘어섰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그녀의 앞에서 허리를 굽히기 싫어 꼿꼿이 서 있기만 하던 신관이 주춤주춤 장부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 장부를 살펴본 신관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오늘부로 신전에 기부되던 모든 금액을 회수할 예정이니까.”

그 장부 안에는 황태자 카를로스의 이름으로 오랜 시간 신전에 기부되었던 모든 내역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하, 진짜 얼마나 호구 짓을 한 거야. 이 언니는.’

리들턴은 오래도록 이 나라 에덴버의 뒷세계를 주물러오던 가문이었다. 비록 태생부터 귀족은 아니었으나 이 세계에서만큼은 황제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으니 그간 축적해 왔던 재산의 양은 참으로 막대했다. 몇 년 동안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아무렇지 않게 신전에 기부해올 만큼. 그것도 황태자의 이름으로.

그 막대한 재산으로 억 소리 날만한 기부금을 신전에 퍼부은 이유는 하나였다. 왜? 그게 황태자에게 신전의 힘을 실어 줄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모든 금액을, 리들턴 가에서 기부해 오셨다는 말입니까?”

대신관이 나름 차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물론 그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베를리아가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철저히 군림하는 자의 태가 났다.

애초에 베를리아 리들턴은 군림하는 위치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겨우 누군가의 발아래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존재 따위가 아니라.

“못 믿겠다면 말죠.”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 베를리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독을 머금은 꽃은 그 겉모습만큼은 그 어느 꽃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 웃음 하나에 대신관의 시선도 홀린 듯 따라붙는다.

그러다가 마치 자신이 마녀에게 홀리기라도 했다는 것 마냥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휙휙 젓는다.

우습다. 보라고 한 적도 없는데 제가 홀려 놓고는 그런 취급을 한다는 건.

“어차피 내일 당장부터 달라질 신전 사정을 보면 알 테니까.”

마침 내일은 한 달에 한 번 황태자의 기부금이 들어오는 바로 그날이었다. 매달 21일. 첫 기부는 황태자의 탄일이었다. 그 후 매달 21일에 맞춰서 기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전에는 매년, 매달, 매일 신도들의 기부금이 들어온다. 그러니 이런 막대한 금액이 들어오는 날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건 최소한 베를리아가 이 일에 관련된 인물임을 의미했다.

대신관의 표정이 당장에 정중하게 바뀌었다.

‘이래서 돈의 힘이란.’

황태자 카를로스는 어느 순간부터 베를리아가 자신을 그깟 돈으로 휘두르려 든다며 질색했었다. 허약한 황권을 증오했던 그는 자신을 휘두르려 드는 모든 것을 증오했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카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겨우 그딴 돈으로 날 휘두르겠다는 것인가?

베를리아는 단 한 번도 돈으로 황태자를 휘두르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퍼부은 애정만큼의 애정을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처절한 베를리아의 외침에 황태자는 도리어 그녀를 경멸하게 되었다.

<베를리아는 황태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했다. 돈을 아낌없이 퍼붓고 제 힘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상대에게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베를리아는 자신이 한 것들을 대가로 황태자의 마음을 요구했다. 그래서 카를로스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끔찍하게 싫었다.>

소설은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그 모든 것들이 베를리아 리들턴의 일방적인 강요와 폭력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사실 생각해 보면 또한 소설 어디에도 카를로스가 그것을 끝까지 거부했다는 말은 나와 있지 않았다.

<베를리아 리들턴을 보고 있을 때면 카를로스는 자신의 나약한 위치를 자각하게 됐다. 그건 더없이 끔찍했다. 저런 여자 따위, 자신이 힘만 있었다면 휘둘리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악녀의 가문이 가진 힘으로 인해 악녀를 쉽게 내치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참으로 진부한 설정이 아니던가? 그녀가 빙의한 이 소설 또한 그랬다. 원작은 카를로스를 악녀의 횡포를 참아야만 하는 가엾은 존재로 묘사했다.

‘걔들이 왜 불쌍해?’

그러나 그녀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저들도 필요해서 베를리아를 이용한 주제에 알맹이만 홀라당 빼먹고 자기네들 사랑 찾아가겠다고 하면 어느 누가 머리 돌지 않고 배기겠는가?

주는 만큼 돌아오길 바라는 것. 그건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다.

4황자였던 카를로스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베를리아 리들턴이 가진 것들을 이용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그녀가 품은 감정을 알고 있었다. 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필요했기에 모른 척했을 뿐.

“…어떻게 해 드려야 기부금을 회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전을 돌아가게 하는 기부금의 1/3 이상이 리들턴의 것이었다. 그러니 당장 그것을 회수하겠다고 나서면 신전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베를리아가 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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