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2)
숲의 녹음을 닮은 녹안이 그녀만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묶여 있는 것은 그녀인데 마치 제가 목이라도 졸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웃었고 그럴수록 그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하긴, 베를리아는 죽음에 이르면서도 메리쉬를 부르지 않았으니까.’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한 그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베를리아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메리쉬가 그녀를 찾을 수 없던 까닭이었다.
그는 죽은 베를리아의 목이 광장에 내걸릴 때가 되어서야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피투성이에 엉망으로 잘린 머리칼과 썩어 가는 시체의 모습으로.
그건 베를리아를 단 하나의 구원으로 여기고 살던 메리쉬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일이었다.
“이제야 꿈에서 깨어나서.”
베를리아는 끝까지 자신이 꾸는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꿈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얌전히 꿈속에서 마지막을 기다렸다. 어리석게도.
베를리아 리들턴의 죽음은 그 후 아무도 추모하지 않았다. 바로 눈앞의 남자를 빼고는.
메리쉬 리들턴. 그는 이 소설의 진짜 악역이었다. 제 주인을 잃고 나서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악마와 계약하여 제 영혼의 절반을 내주고 이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는.
“나 좀 풀어 줘.”
숨도 안 쉬는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서 있던 메리쉬가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그제야 움직여 베를리아의 손목을 옥죄고 있던 수갑을 검으로 내리쳐 부숴 버렸다.
애초에 베를리아가 죽지 않고자 했다면 그녀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카를로스와 그들이 그녀의 죽음을 바랐기 때문에 베를리아는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미안하지만, 베를리아.’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바닥에 오래도록 앉아 있던 몸이 휘청거렸다. 그것을 재빠르게 메리쉬가 옆에서 지탱해 주었다.
‘난 안 죽어.’
자신이 어떻게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빙의되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곳에 오게 된 순간 선택지는 하나였다.
살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살 것이다. 그녀의 눈이 기묘한 빛으로 번뜩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검은색 터럭이 자취를 감추었다. 메리쉬가 왔으니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올 뻔했으나 들키지 않기 위해 꾹 눌러 참았다.
일단은 이것으로 되었다. 첫 단추는 썩 잘 끼운 셈이었다.
이야기는 이미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베를리아 리들턴의 삶은 솔직히 그녀가 보기에는 완벽했다. 유일한 오점은 자신의 구원으로 여겼던 카를로스와 그들뿐이었다.
베를리아는 황태자를 사랑했고, 로베르 후작과 황실 기사단장 데니안을 제 친구라고 여겼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이후 세 남자는 완벽히 베를리아의 삶을 망쳐 놓았다.
‘이래서 사람을 구원으로 여기면 안 된다니까.’
그녀가 손을 뻗었다. 무형의 기운이 손으로부터 뻗어져 나가더니 감옥 내부를 점차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토록 단단해 보이던 쇠 철창과 회색 벽돌들이 마치 종잇장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후우… 가자, 메리쉬.”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힘을 쓰려고 하니 금세 식은땀이 났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제 겉옷을 둘러준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안아 들었다. 메리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녀가 제 품에서 벗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나 잠깐 쉴게.”
그녀가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차가운 감옥에 방치당했던 몸이 고단했다. 따뜻한 누군가의 체온이 닿자 몸이 노곤해졌다. 눈을 감자 빠르게 까마득한 어둠이 몰려들었다.
메리쉬의 움직임이 얼핏 느껴지는 듯했으나 그것은 아주 미세했다. 그 미세함보다도 그녀를 잡아끄는 수마의 힘이 더욱 강력했다.
그날 황궁에 큰 소란이 일었다. 최악의 범죄자들만 가둬 놓는, 황궁의 지하실 맨 밑바닥의 감옥. 그곳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가장 경비가 삼엄하여 개미 한 마리도 쉬이 드나들 수 없다고 알려진 그 철의 요새였던 그곳이.
잔해 밑에서, 베를리아 리들턴의 시체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 흔적조차도.
***
오랫동안 차가운 돌로만 이루어진 감옥에서 몸을 혹사시켰기 때문일까, 베를리아는 오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결국, 선잠이 들었던 베를리아가 눈을 떴다. 몽롱한 시야에 짙은 녹빛 시선이 들어왔다.
“…베를리아 님.”
집요하던 시선이 순식간에 온순함의 탈을 쓰고 순종적으로 굴어온다. 그 표정이 전환되는 모습은 참으로 극적이라 베를리아가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베를리아의 우미한 손끝이 메리쉬의 뺨에 살풋 닿았다. 그 순간 기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은밀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말투와 서늘하게 닿아오는 온기. 그것이 그를 사로잡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메리쉬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베를리아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메리쉬 리들턴. 그는 원작에서 황태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악마와의 계약은 등가교환이 원칙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악마가 인간에게 받을 것은 응당 그들의 영혼뿐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귀환.
악마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메리쉬가 바랐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 그 존재, 그 하나만.
-불가하다.
-어째서!
-한낱 인간이 물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악마는 메리쉬의 첫 번째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거대한 존재는 일말의 거절 이후소원을 들어 줄 수 없는 이유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메리쉬는 그대로 길을 잃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메리쉬의 유일한 길이었으므로, 한 곳에 갇힌 자는 끝내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다시 한번 울부짖은 메리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리들턴의 이름을 이어받아 흑마법으로 이루어진 단체, ‘므시아’를 부활시킨다. 베를리아가 주인이었던.
베를리아가 차가운 땅속에서 그 혼조차 바스러지는 동안 황태자는 그녀가 남긴 것들로 날개를 달고 높이 날아올랐다. 메리쉬 리들턴은 므시아보다 더한 힘이 필요했다.
-카를로스 에덴버의 파멸.
베를리아 리들턴이 죽는 순간 메리쉬의 삶은 파괴당했다. 그런 그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메리쉬가 아는 건 이제 단 하나였다. 모든 것을 망가트리는 것.
악마는 메리쉬 리들턴의 원대로 카를로스를 죽일 힘을 주었다.
‘그러지 마.’
문득 생각이 났다. 오직 복수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메리쉬를 보며 책 속 글자가 그이기라도 한 것처럼 안타깝게 매만졌던 일이.
‘제발.’
그건 뇌를 거치지 않고 흘러나온 중얼거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때 진심으로 메리쉬가 불행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차피 메리쉬에게는 닿지도 않을 텐데.
그녀는 원작을 읽을 때부터 내내 카를로스 에덴버가 싫었다. 그러나 그는 책 속의 주인공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주인공이니까. 파멸만이 메리쉬의 역할이었다. 왜 겨우 그런 자로 인하여 파멸하는가.
결국 메리쉬의 염원은 닿지 않았다. 주신의 가호를 받은 카를로스 에덴버는 주인공의 법칙대로 승리했다.
상념에서 깨어난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미소 지었다.
“매번 내 곁에서 그렇게 지키고 있었잖아. 너도 좀 쉬어야지.”
메리쉬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베를리아의 손이 물 흐르듯 거둬졌다. 그녀의 한 마디에 순간 그들을 둘러쌌던 긴장감 어린 분위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마치 찰나의 꿈이었던 것처럼.
그제야 숨쉬기를 허락받기라도 한 것처럼, 메리쉬는 저도 모르게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전 베를리아 님의 곁을 지키는 게 좋습니다.”
쉬라는 베를리아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은 메리쉬가 말했다. 어지간하면 그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말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지만, 불안했다. 그녀는 황태자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메리쉬.’
그 일련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시선에 담으며 그녀가 속으로 웃었다. 메리쉬에게 베를리아는 세계였다.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사랑조차도.
그녀는 메리쉬가 탐이 났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베를리아 리들턴을 위해 죽던 그가.
‘나는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쉬의 파멸을 막을 수 있어서. 그녀는 이제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널 가질 거야.’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랏빛 눈이 탐욕으로 영롱하게 빛났다.
“그래, 그럼.”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침대의 하얀 시트 위를 사륵 매만졌다.
그녀가 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긋하게 덧붙였다.
“피곤하면 옆에서 좀 쉬어도 좋고.”
순간 무표정하던 메리쉬의 얼굴이 빠르게 무너졌다. 그 표정에 떠오른 선명한 감정들에 눈이 즐거웠다.
비로소 인간미가 돌기 시작하는 그 잘생긴 얼굴을 눈에 담으며 베를리아가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지하 감옥에 있었던 탓에 아직은 몸이 고단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무엇이든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심지어는 원작 속의 냉혹한 악역, 메리쉬조차.
그녀는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쉬어둬도 좋으리라.
점차 의식이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동안에도 내내 메리쉬는 베를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고요한 척 애쓰는 녹빛 시선은 내내 그녀에게 머물렀다.
“…베를리아 님.”
베를리아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완전히 잠든 듯 했다. 확인하듯 다시 베를리아를 불러봤으나 대답은 없었다. 메리쉬가 잠든 베를리아에게로 처음으로 손을 뻗었다. 마치 금기를 범하는 성직자처럼 조심히, 조심히.
조금 전 망설임 없던 베를리아와는 달리 그의 손끝은 아주 조심히 그녀의 뺨에 닿았다. 채 온전히 만져 보지도 못한 채로 겨우 손끝만의 온기에 의지해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무언가 달랐다. 메리쉬는 그 여운에 사로잡혀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깊은 밤이 지나 새벽이 밝아오는 그 시간 내내.
“베를리아.”
희미하게 세상을 밝혀오는 아침 햇살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메리쉬가 작게 내뱉었다. 작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막힌 숨을 토해내듯이.
그건 어떤 욕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