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화 (1/148)

1화.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1)


 

서걱.

단두대에 잘려나간 그녀의 목이 형편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처형을 위하여 그 아름다운 암녹빛 머리칼은 잘려나간 지 오래였다.

열기 어린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방금 누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한 사람이 죽었든 간에.

‘마녀가 죽었다!’

‘악녀의 최후에 축배를!’

‘마녀를 몰아내신 태자 전하와 성녀님께 영광을!’

싸늘하게 식은 붉은 것이 사방으로 튀었다. 관중은 열렬하게 환호했다. 결코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는데도.

너의 죽음을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기뻐하고 있었다. 보라, 세상은 이만큼이나 미쳐 있다.

네가 없는 세상은 이만큼이나 끔찍했다. 정말, 끔찍했다.

***

눈을 뜨니 뭔가 몸이 으스스했다. 어쩐지 눈꺼풀이 잘 올라가지 않았고 몸이 축축 처졌다. 머리 한쪽이 쨍하니 아파져 와서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려 버렸다.

“…베 …아.”

‘아, 시끄러워….’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앞에 자꾸 누가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가 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어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낯짝을 올려다봤다.

‘…헉. 잘생겼어.’

한없이 무겁기만 하던 눈꺼풀이 번뜩 뜨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미남이었다. 그것도 그냥 미남이 아니라 로맨스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미남!

‘얼굴만으로 후광이 비친다는 게 저런 건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넋 놓고 관찰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 보이는 사내의 모습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도 빛나는 꿀 같은 금발, 거기에 호수처럼 깊은 푸른색 눈까지!

“와…. 소설 속 왕자님이 이런 사람일까.”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홀로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과 동시에 터져 나온 상대의 호통에 그녀의 중얼거림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나중에 생각하면 참 다행인 일일지도 몰랐다. 솔직히, 쪽팔렸을 테니까.

“…베를리아! 지금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건가!”

‘베를리아…?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의아함이 얼굴에 가득 차올랐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긴가민가하여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잠깐… 혹시?’

“베를리아!”

제가 화를 터트려도 그녀 쪽에서 반응이 없자 사내가 소리쳤다. 그제야 휙 그녀가 다시 남자를 돌아봤다.

‘금발, 청안, 그리고….’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베를리아. 그 이름 하나는 그녀의 기억 속에 꽤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잠깐만, 내가 진짜 베를리아에요?”

“헛소리하지 말고….”

“내가 베를리아 리들턴이냐고!”

왜냐하면, 얼마 전 읽은 로맨스판타지 소설 속 호구 같은 악녀가 바로 베를리아 리들턴이었으니까!

남들은 상상도 못할 돈과 남들은 모르는 거대한 권력, 게다가 완벽한 외모까지 갖춰 놓고 주인공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호구가 되는 이해 안 갈 언니!

“베를리아 리들턴, 내가 너랑 장난칠 시간이 없다는 건 너도 알 텐데?”

마치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사내의 싸늘한 반응을 보니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현실감이 들었다. 휙휙,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몸이 으스스한 건 착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정말로 싸늘한 회색 돌바닥에 앉아 있었으니까.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눈앞에 있는 사내의 이름은….

“카를로스 에덴버.”

“감히 내 이름을 마음대로 입에 올리다니, 죽음을 앞에 두니 정신이라도 나갔나?”

고작 이름 하나 부른 것뿐인데 와그작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 그 표정에 떠오른 선명한 경멸. 반응까지도 하나같이 완벽했다.

소설 속에 묘사된 그대로.

‘하, 왕자 같다 했더니 진짜로 황태자였어?’

그녀가 속으로 소설 속의 진부한 설정을 비아냥거리며 생각했다. 황태자 카를로스 에덴버. 그는 이 소설의 남주인공으로 끝까지 베를리아를 이용해먹는 천하의 빌어먹을 개자식이었다. 그것도 멀쩡한 겉가죽을 사용해서 남들 앞에서는 천하의 성군인 냥 구는.

‘생각하자, 생각해…. 왜, 감옥에 있지?’

“베를리아, 네가 마지막으로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눈앞에서 카를로스가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베를리아를 얼마나 경멸하고 우습게 봤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내의 말을 귀담아들어봤자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깔끔하게 상대의 말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저 자식이 할 말은 베를리아에 관한 경멸, 혐오, 명령, 요구 따위밖에 없었으니까.

‘이 언니가 왜 감옥에 있지?’

황태자가 베를리아를 경멸하든 아니든, 끝까지 빨대 꽂은 모기처럼 이용하는 데는 그녀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베를리아는 적어도 이렇게 쉽게 감옥에 갇힐 위치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베를리아 리들턴!”

‘아, 목청 더럽게 크네.’

그녀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손이 뒤로 묶여 있지만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사방이 폐쇄된 감옥 안, 카를로스의 노성은 쩌렁쩌렁하게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잘생긴 놈도 인성이 막돼먹으면 짜증이 나는구나….’

그제야 고개를 든 그녀가 카를로스를 쳐다봤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은 그래도 잘생기기는 했다. 성질은 참 뭐 같아도.

‘인생에 저렇게 잘생긴 놈을 만나봤어야 알지.’

저런 외모는 연예인들한테나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살던 나라로 생각건대 그런 남배우들은 CG같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 이상 갈 외모인데, 쯧쯧.’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찼다. 저딴 성격으로 짜증에서 그치는 건 그나마 저 외모 덕이 클 터였다. 하여간 제 팔자 제가 꼰다고 그녀는 카를로스가 언젠가 저 주둥아리로 망하리라 생각했다.

“하, 이번엔 제대로 듣도록. 너 따위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으니.”

베를리아가 제 말을 두 번이나 무시했다고 생각해서 그토록 화를 낸 모양이었다. 하긴, 소설 속의 베를리아는 언제나 절절한 신도처럼 카를로스의 말을 들어 주기는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베를리아를 보며 ‘언니, 정신 차려요!’ 하고 내적 외침을 거듭하기는 했지만.

베를리아가 어떻든 카를로스는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까지 그녀를 들들 볶을 게 뻔했다. 그에게 베를리아의 취급이란 뻔했으니까. 쯧, 혀를 찬 그녀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카를로스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카를로스가 만족스러운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꼴을 보며 그녀는 또 속으로 열심히 이죽거렸다.

‘하여간 저 주인공병….’

그리고 그 이죽거림은 오래가지 못했다. 황태자가 그녀의 생각을 뚝 끊어 놓았으니까.

“내일 얌전히 죽도록 해.”

“…뭐라고?”

아주 당당하고 오만하게 그녀에게 명령하는 카를로스의 얼굴은 뻔뻔할 정도로 태연했다. 마치 자신이 말하는 바에 틀린 것 하나 없는 듯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심지어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그녀를 매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소설의 클라이맥스 부분이 떠올랐다.

‘베를리아, 네가 마지막으로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소설 속 베를리아 리들턴은 여주인공을 질시하여 그녀를 암살하려 한 것이 들통나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조사를 시작하자 그에 더불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악행이 드러남으로써 그녀는 결국 처형당한다.

그것도 바로 내일!

‘망할, 하필 빙의해도 처형 전날에 빙의해?’

바로 황족 시해 죄로.

그게 이 소설 속 악녀의 역할을 맡은 베를리아 리들턴의 최후였다. 기억대로라면 황태자의 다음 대사는.

-날 위해 죽어라.

“날 위해 죽어라.”

그래,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진실은 달랐다. 토사구팽. 황태자가 되기 위해 그녀를 실컷 이용해 먹던 카를로스가 마침내 베를리아를 버린 것이다.

“헛소리도 작작 해, 이 천하의 개자식아.”

더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그녀의 입에서는 참아왔던 마음의 소리가 툭 터져 나왔다. 저게 아까부터 헛소리를 씨부린다 싶더니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뭐?”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지거리에 카를로스의 얼굴은 벙찐 기색이었다. 하긴,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참 곱게 대해 주기는 했다. 저 건장한 사내놈을 무슨 불면 날아갈 민들레 홑씨처럼 애지중지.

‘그러니까 제 주제도 모르고….’

솔직히 있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던 카를로스가 황태자가 된 데에는 베를리아의 공이 가장 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짐승도 은혜는 안다는데, 인간이라는 놈이….”

그녀가 경멸을 담아 카를로스를 노려보자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저절로 뒷걸음친 카를로스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어떤 인물인지를.

그럴 만도 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사냥개였다면 몸을 뒤집어 배라도 보여줬을 것처럼 그들에게 맹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거부해 봤자 달라질 건 없을 거다.”

꽤 당황했는지 카를로스가 제멋대로 말을 마무리하고 돌아섰다. 풋, 적나라한 비웃음 소리가 감옥을 작게 울렸다. 이에 뒤돌아 걸어가던 카를로스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푸… 푸하하하!”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만 그녀가 참지 않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드디어 미쳤군.”

그대로 굳어 있던 카를로스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감옥을 나가 버렸다.

***

베를리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며 가 버린 카를로스는 우습게도 감옥의 경비를 늘렸다. 삼엄해진 감시망은 이중 삼중으로 두터워져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는.”

그게 우스워서 그녀는 다시금 웃어 버렸다. 베를리아의 모든 힘을 부숴 버린 것은 황태자와 성녀를 사랑한 조연들이 아니었나. 아니,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정말로 베를리아 리들턴의 모든 것을 자신들이 끝내 버렸다고 말이다.

그래서 자신했던 거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 와 할 수 있는 건 없으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해서 미리 겁을 집어먹고 경비를 늘린 꼴이라니.

‘그래봤자 쓸모없을 테지만.’

그녀가 애초부터 카를로스에게 그렇게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서 본래의 최종 흑막은 베를리아가 아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악녀의 역할은 여주인공과 대비되어 그녀를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지 세계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니니까.

“메리쉬.”

“왜, 이제야 부르십니까.”

그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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