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둘째를 낳다
마침 옆을 지나던 우의가 그 말을 듣고는 우항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형제 좋다는 게 뭐야. 때가 되면 나도 불러.”
우항이 입술 한쪽을 끌어 올렸다.
“정말 도와줄 텐가?”
성 공공과 진 총관한테 안 그래도 불만이 잔뜩 쌓여 있던 우항이었다. 그러게 누가 제 수족처럼 부려 먹으래?
그런데 우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말은 네 시체 수습을 해 주겠다는 거였어.”
그렇지, 그 두 노인네를 어떻게 당하리.
우항은 그저 허공에 대고 눈을 부릅뜰 따름이었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한편, 날다시피 하여 방에 도착한 월왕은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기대어 있는 목운요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고통스러운지 손으로 배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월왕의 등으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요아…….”
고개를 들어 월왕을 확인한 목운요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리고 후회가 밀려왔다. 미세하게 떨리는 월왕의 눈빛에서 불안함과 두려움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방법은 너무 지나친 듯했다.
“사야, 전 괜찮습니다. 아이도 무사하고요…….”
월왕이 떨리는 손으로 목운요를 덥석 끌어안았다.
“요아…….”
이에 더 당황한 목운요가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사야, 정신 차리세요.”
그러자 월왕이 움찔하며 떨림을 멈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목운요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월왕은 다시 바들바들 떨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요아, 정말 괜찮느냐?”
“네. 전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건 사야세요.”
목운요가 월왕의 볼을 쓰다듬었다.
“왜 이리 떨고 계십니까?”
“……두렵구나. 너도 어마마마처럼 날 떠날까 봐 무섭다.”
그의 품에 안긴 여인은 그가 평생의 운을 쏟아부어 만난 배필이었고, 마음의 지지대였다. 그런 그녀가 사라진다면 그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 신세나 다름없었다.
“염려 마세요. 전 떠나지 않습니다. 다만 사야가 너무 걱정이 돼요. 계속 이러시면 정말로 제게 지장이 있을지도 몰라요.”
“앞으로는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
월왕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후 며칠 동안 그는 거짓말처럼 식사도 정상적으로 했다.
목운요는 선령의 방법이 통했다고 내심 기뻐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알고 보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멀쩡한 척 연기한 것일 뿐, 식사를 마친 후 먹은 걸 전부 게워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선령도 심히 놀란 듯했다. 그녀는 영안염도 뒷전으로 한 채 월왕의 상태에 대해 연구했지만 도무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그에 목운요는 애만 탔다.
월왕에게 억지로 먹을 필요가 없다고 얘기했지만 그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했다. 한사코 괜찮다고 우기며,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 * *
그렇게 회임한 지 아홉 달하고도 이 주가 지났다.
몸에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더니 아니나 다를까, 양수가 터졌다.
“사야…….”
옆에서 자고 있던 월왕은 번쩍 눈을 떴다.
“왜 그러느냐?”
“아이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월왕은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고 얼굴까지 사색이 되었다.
이내 그가 겉옷과 신발도 갖출 새 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곧 문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머지않아 금수원 안이 하인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로 가득해졌다.
월왕은 영안염을 데리고, 산방 밖에서 초조하게 대기했다. 그 모습을 본 성 공공과 진 총관이 황급히 다가왔다.
“전하, 앉아서 기다리시죠.”
하지만 월왕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그저 산방 문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여자 하인들이 바삐 들락날락거릴 뿐, 그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목운요의 숨결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한 하인이 핏물을 담은 큰 그릇을 들고나왔다. 전장에서 피를 몰고 다니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피비린내가 몹시 역하게 코를 찔렀다.
그러나 다행히 월왕이 거의 쓰러지기 직전에 산방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목운요의 몸 상태가 좋은 덕에 산통 한 시진 만에 아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전하, 경하드립니다. 공주님이옵니다.”
산파와 하인들이 너도나도 축하 인사를 전해 왔다.
월왕은 영안염의 손을 살며시 놓고 산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침상에 누운 목운요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사야.”
월왕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요아, 아이는 이제 그만 낳자꾸나.”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말이었다. 아이를 낳다가 월왕을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월왕이 옆으로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공주가 태어나니 월왕의 증상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기운을 차린 월왕은 이제 완전한 딸 바보가 되어 아이를 품에 안고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영안염이 질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목운요는 그를 더 자주 곁에 두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영안염에게 소홀해진 월왕에게도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영안염이 동생 때문에 홀대받는다고 느끼면 아직 여린 아이가 크게 상처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목운요의 걱정스런 당부를 들은 월왕은 한참을 가만히 고민하더니, 영안염과 딸 영안려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옥같이 귀한 영안려가 새근새근 잠든 요람을 영안염이 살며시 밀어 주고 있었다. 아이는 제법 오라버니 흉내를 내며 작게 소곤거렸다.
“누이, 어서 자라서 이 오라버니랑 같이 놀자. 시간이 다 돼서 난 이만 어머니를 뵈러 가야 해. 요새는 내가 옆에 있어야 기뻐하시거든. 왜 그러신지 모르겠어. 하지만 아버지가 그러셨어. 나는 사내대장부라고. 어머니와 너를 지켜야 한대. 밥 잘 먹고 아버지만큼 커서 매일 널 안아 줄게.”
얼른 그 방을 빠져나온 목운요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염아가 려아를 시샘하지 않는 것 같아요.”
“염아가 얼마나 의젓한 줄 아느냐? 려아를 질투할 리 없으니 염려 말거라.”
* * *
그렇게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금란이 잔뜩 흥분한 채로 달려왔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목운요는 바늘과 실을 내려놓고는 금란에게 되물었다.
“지금 누구라고 하였느냐?”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곧 이곳에 당도하실 겁니다. 어서 마중을 가시어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이를 안고 있는 월왕을 바라보며 얼른 말했다.
“사야, 어서 려아를 내려놓으세요.”
그런데 월왕은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이미 서신을 보내셨다. 한번 방문한다고 하셨는데 이리 서둘러 오실 줄이야.”
목운요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이미 황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구로 걸어오고 있었다.
“월왕, 월왕비, 아주 팔자가 좋아 보이네. 짐이 홀로 조정에서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나? 사냥 한번을 마음대로 못 나가네. 관원들이 얼마나 꼬장꼬장하게 구는지 자네들은 모를 걸세. 조정에 월왕 자네가 없으니 관원들이 아주 살판났어.”
“폐하, 어서 오십시오.”
월왕이 아이를 금란에게 안겨 주고는 목운요와 함께 절을 올렸다.
“어서 일어나게. 오늘 별안간 찾아온 건 긴히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네. 남쪽을 시찰한 김에 잠깐 빠져나온 것이라 한 시진 정도밖에 시간이 없어. 본론부터 말하겠네.”
월왕과 시선을 교환한 목운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 소인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게…….”
황제가 금란에게서 아이를 받아 들고는 좌우로 살짝살짝 흔들었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황후가 마음에 안고 있는 상처를 잘 알지? 그 상처를 치유해 주고 싶어 자네들을 찾아왔네.”
목운요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폐하, 예전에도 아뢴 것처럼 황후 마마는 몸이 많이 상하셔서 아이를 낳으시기 어렵습니다.”
“그건 알고 있네. 하나 황후가 드러내고 말은 안 해도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있어. 그리하여 묻는 것이네. 가임초의 부작용 같은 것이 있는가?”
목운요가 화들짝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가임초라 하셨습니까?”
“그러하네. 그걸 먹으면 임신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나. 그래서 그 약초로 황후가 회임했다고 믿게 하고 싶네. 열 달이 지나면 아이를 낳고 말이야. 물론 황후가 낳은 아이는 아닐 테지만.”
월왕이 찌푸려진 미간으로 불만을 잔뜩 표시했다.
“폐하, 황실의 혈통이 걸린 사안입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황제가 웃었다.
“짐도 아네. 내 어디 함부로 이런 말을 하겠나. 부황께서 꿈에 나타나 짐의 목을 조르실 걸세. 사실 영군릉이 최근에 죽고 남긴 첩실이 하나 있는데, 그 여인이 회임한 지 석 달이 되었다는군. 황릉을 지키는 시위들의 말로는 딸이 확실하다고 해. 태의가 그리 진맥을 했다더군. 아직 누구에게도 발설하지는 않았네. 어찌 되었든 영군릉도 황실의 핏줄이 아닌가? 한데 이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둘뿐이야. 서릉으로 돌아와 짐과 황후의 원을 풀어 주게.”
월왕이 목운요를 쳐다봤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목운요는 황제의 애원하는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외할머니도 서릉이 그립다고 하셨는데, 이 김에 모시고 가면 좋겠어요. 또 려아도 이제 다섯 달이 되었으니 서릉 구경이나 시켜 줘야겠습니다. 폐하, 그 약초는 잘만 사용하면 부작용이 없으니 염려 마십시오.”
황제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황후도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