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월왕의 입덧
“바보 같은 녀석…….”
그녀가 자리를 비워 둔다고 한 것은 그가 북강에서 버티기 힘들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육냥은 북강에서 만인의 꼭대기에 있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한낱 호위를 자처하며 돌아오다니.
육냥의 눈에 웃음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이내 그림자 호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월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아.”
양손에 들고 온 탕후루를 목운요와 영안염에게 하나씩 나눠 준 월왕이 사랑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제 아내와 아들을 바라봤다.
“어서 맛 좀 보거라. 아주 달다.”
영안염은 신이 나 발을 동동 굴렀다. 목운요는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솟구치는 눈물을 애써 내리눌렀다.
월왕은 목운요의 손을 꼭 부여잡고는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었다. 따듯한 손의 온도가 마음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요아, 중추절이 지나면 서릉 밖으로 나가 보자꾸나. 남해부터 유람하는 게 어떻겠느냐.”
목운요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 *
강남 금수원.
불선루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면서 새로운 터를 찾아 옮기게 되어, 금수원은 다시 월왕의 소유로 돌아왔다.
금수원의 작은 정자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가만히 앉아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선녀처럼 고운 여인에게서 몽롱하고도 우아한 기운이 스쳤다.
구름 문양이 수놓아진 긴 치마의 밖에 걸친 얇은 명주 겉옷이 미풍에 나부껴 살랑거리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자그마한 꼬마가 품에 계화를 한 아름 안고 달려왔다.
“어머니, 어머니, 염아가 꽃을 따 왔어요!”
정자에 앉아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달려오는 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이를 품에 안으려 자연스럽게 팔을 뻗었다.
그런데 검은 의복을 입은 사내가 불쑥 나타나서는 아이를 냉큼 들어 안았다.
“염아, 이 아비가 한 말을 잊은 게야?”
이 여인과 사내는 다름 아닌 황실을 두 해 가까이 떠나 있던 목운요와 월왕이었다.
영안염은 벌써 네 살배기 꼬마가 돼 있었다. 그간 정성을 다해 영양을 보충해서인지 영안염은 이제 또래 사내들처럼 건강했다. 아니, 외려 또래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컸다.
영안염이 얼굴을 붉히며 난처한 듯 말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염아가 그만 깜박했어요.”
더없이 엄격한 부자 사이의 모습에 목운요가 피식 웃고는 염아에게 손짓했다.
“염아, 이리 오렴.”
영안염이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목운요와 거리를 벌리고 멈춰 섰다. 목운요의 배로 시선을 떨군 영안염이 조심스러운 듯 말했다.
“어머니의 배 속에 누이가 있어 염아가 더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월왕이 영안염의 눈높이에 맞게 몸을 낮추고는 등을 토닥였다.
“기특하구나. 오라비가 누이를 보호해야지.”
정말이지 못 말리는 월왕이다. 목운요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야, 일주일 전에 회임한 걸 막 알았어요. 이제 겨우 두 달째입니다. 그리 조심하지 않아도 되어요.”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월왕과 영안염이 미간 모양을 똑같이 하고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하오.”
“맞아요. 누이를 잘 지켜야 해요.”
본래 월왕은 자식은 염아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생사를 오가는 출산의 고통은 한 번이면 족했다. 목운요에게 그 고통을 또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목운요는 딸아이를 원한다고 내내 소원처럼 말했다. 결국 목운요의 간절한 바람에 월왕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금란과 금교가 새로 빚은 월병을 갖고 목운요를 찾아왔다.
“마님, 채청이란 아이가 만든 것입니다. 맛이 아주 좋아요. 어서 드셔 보셔요.”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긴 월병에는 꽃문양이 가지런하게 박혀 있었고, 새하얀 외피를 통해 안에 담긴 소가 어렴풋이 비치는 것이 얼른 하나를 집어 먹게 만들었다.
목운요가 한 입 베어 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맛이 좋네요. 사야도 드셔 보세요.”
그런데 맛있는 월병을 앞에 둔 월왕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월병이 눈앞에 있는 것뿐인데 그 냄새가 역했다. 이내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구석으로 냅다 달려가 헛구역질을 시작하였다.
한편 저벅저벅 걸어오던 선령은 안색이 말이 아닌 월왕을 힐끔 보고는 보란 듯이 월병을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 낸 그녀가 목운요 옆에 앉아 말했다.
“월왕은 아직도 저래?”
목운요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회임한 걸 들은 뒤부터 먹는 족족 게워 내고 있어. 외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먹기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그에 선령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월왕에 대한 미움도 눈 녹듯 녹아내렸다.
“비슷한 증상을 본 적이 있어. 쉰 살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어서 첩실을 여럿 들이고서야 겨우 아들을 얻은 이가 있었지. 어렵게 얻은 자식이라 그렇게 걱정을 하더니 월왕과 같은 증상을 보이더라고. 아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그랬을 거야.”
목운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그렇다니까.”
선령은 이 상황이 꽤나 재미있는 눈치였다.
월왕은 원체 차가운 성격이라 목운요를 제외한 모두에게는 얼음 왕자로 불렸다. 그런데 이제 보니 세심하다 못해 임신부보다 태아를 더 걱정해 대신 입덧까지 하고 있었다.
목운요도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심각해져서는 질문을 했다.
“낫게 할 방법은 없어?”
“여인이 입덧을 하는 것과 같아. 약을 써도 별 소용이 없지.”
“그럼…… 그냥 지켜봐야 하는 거야?”
얼마간 그러다 말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월왕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처음에는 그래도 채소는 먹더니, 시일이 지나자 씹는 음식은 전혀 삼키지 못했다. 흰 쌀죽만 마시며 겨우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이러니 목운요도 걱정이 돼 안절부절못했다. 자신과 선령의 진단이 잘못된 건 아닌가 싶어 의원을 불러 진맥을 해 봤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그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월왕이 목운요 옆에 앉아 그녀의 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요아, 오늘은 불편한 곳 없었느냐?”
월왕은 매 시진마다 힘든 건 없는지 묻는가 하면 매일 시간을 정해 태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제 걱정은 마세요. 전 오히려 사야가 염려됩니다. 많이 마르셨어요.”
월왕이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다.”
사실 월왕은 요즘 들어 잠도 설치기 일쑤였다. 눈을 감으면 목운요가 염아를 낳은 뒤 기절했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숨이 막혀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목운요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지금도 자신 걱정에 근심이 깊은 그녀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오나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
목운요가 월왕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사야, 걱정 마세요. 우리 아이는 무사히 태어날 것입니다.”
“그렇고말고.”
* * *
월왕의 입덧을 웃음거리로만 여기던 선령은 월왕이 하루가 다르게 마르고, 목운요가 그 모습을 보며 시름이 깊어지는 것을 보고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법으로 입덧을 없애 보면 어떨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운요는 선뜻 뜻이 이해되지 않았다.
“월왕은 네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어 저러는 거잖아. 그러니 아예 네 몸이 아픈 것처럼 연기를 하는 건 어때? 그럼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 입덧이 사라질지도 모르지.”
잠시 고민하던 목운요는 이 제안이 퍽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좋아. 한번 시도해 볼게.”
월왕이 염아와 바깥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데, 우항이 황급히 다가왔다.
“전하, 마마께서 산책을 하시다 넘어지시어 복통을 호소하십니다. 어서 가 보십시오.”
우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항의 품에 묵직한 것이 안겨지더니, 눈앞으로 무언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새 사라진 월왕에 놀란 우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많이 마르셨어도 기운은 여전하시네.”
감탄하며 고개를 숙인 우항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한 영안염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우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님, 왜 그러십니까?”
“어머니를 보러 갈 거야. 날 내려 줘!”
영안염이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다.
월왕을 꼭 빼닮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우항은 영안염의 얼굴에 월왕을 대입해 보았다. 이런, 눈만 버렸다.
한참을 버둥거려도 우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꽉 붙들고만 있자, 영안염은 애처로운 모습으로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며 슬퍼했다.
그때 금란이 그 광경을 보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우항,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순간 영안염의 눈이 간절해졌다.
“어서 날 좀 내려 줘. 어머니를 보러 갈 거야.”
금란은 황급히 영안염을 제 품으로 데려왔다. 글썽이는 영안염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한테 데려다줘.”
그러면서 영안염이 고개를 돌려 우항을 노려봤다.
우항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가 얼른 금란을 뒤쫓으며 상황을 해명했다. 밤에 각방 신세를 면하려면 이 길뿐이었다.
“금란, 아까 한 말 거짓말인 거 알지? 비 마마께서 다치셨다는 거 말이야.”
이는 물론 금란도 목운요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안염을 울리는 게 정당화되지는 않았다. 생각하니 또 성질이 났다.
“당신 할 일이나 해요.”
우항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영안염은 금란의 등에 업혀 우항을 약 올렸다.
……억울해. 우항이 중얼거렸다.
“왕자님이 아무래도 버릇이 없어지신 것 같단 말이야. 이게 다 성 공공과 진 총관님이 오냐오냐해서 그래. 쳇, 두 사람에게 복수라도 해야지, 이거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