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다음 생에도
* * *
혼례 당일이 되었다.
황제와 황후가 세 사람에게 혼수를 하사하면서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명문가 여식도 누릴 수 없는 호사가 월왕비의 시녀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금란과 금교는 하운방에서 지은 혼례복을 입고 등장했다. 하운방의 자수 솜씨는 날이 갈수록 정교해져 이제는 목운요의 지시 없이도 훌륭한 의복을 지어내는 경지였다.
한편 목운요의 제안대로 데릴사위를 들이기로 한 선령은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랑 옷을 입었다. 어쨌든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데릴사위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던가!
다행히 하운방 자수공들은 임기응변에 능했다. 치마를 거부한 선령을 위해 기마복을 화려하게 치장한 것이다. 선령이 턱하고 걸치니 자못 근사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목운요가 금교와 금란을 위해 준비한 선물도 서릉 안을 들썩거리게 했다. 물품들이 하나같이 일품 관리 여식의 혼수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선령에게 하사한 선물도 만만치 않았다. 예물을 소익의 가마 앞에 무심하게 던져 놓았던 것이다.
어깨가 쫙 펴질 만한 예물을 보내게 된 선령은 여느 신랑들이 하는 것처럼 잘생긴 말을 타고 그를 맞이했다. 그런데 소익이 말 등으로 잽싸게 올라타서는 선령의 뒤에 자리했다.
선령의 미간이 구겨졌다.
“넌 데릴사위야. 내가 널 맞이하러 온 거니 가마에 타.”
“누님, 내가 너무 무거워서 가마꾼들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여기서 공주부가 오죽 멉니까? 가마꾼들이 중간에 못 하겠다 드러누우면 어째요. 혼례 때는 맞춰 가야 할 거 아닙니까?”
소익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자 선령이 입을 실룩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뒤에 타는 건 안 돼. 내 앞으로 와. 내가 말을 몰고 갈 테니.”
선령의 허리를 끌어안은 소익은 아주 느긋했다.
“누님, 내 키가 커서 내가 앞에 앉으면 누님 시야를 가립니다. 지금 이 자세가 딱 좋아요. 내 말 들어요. 혼례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늦으면 씁니까? 이랴!”
선령은 내심 못마땅했지만 소익의 말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였다.
길시가 되었다.
금란과 금교는 함께 목운요를 찾아와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 목운요는 나이로만 치면 그들보다 어렸다. 하지만 지독한 생활고에서 벗어나 안락하게 살 수 있게 된 건 오롯이 목운요의 덕이었다.
“일배는 미천한 소인들을 거두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덕분에 떠돌이 생활을 면하고 안락한 거처를 얻었습니다.”
“이배는 가르침에 대한 감사입니다. 자수 기술을 가르쳐 주시고, 예법, 도덕을 가르치시어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배는 마님의 너른 마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소인들을 위해 혼수를 손수 마련해 주시고, 혼례를 올려 주시며, 저희를 아랫것 이상으로 대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목운요도 금란과 금교의 세심한 보살핌에 항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 목운요에 대한 그 둘의 고마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목운요를 만나고 금란과 금교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목운요가 그 둘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그래요. 고마워요. 하나 우리 사이에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목운요는 사서가 건넨 붉은 천을 그 둘에게 정성스럽게 씌워 주었다.
“이제 가 봐요.”
두 사람의 길시는 선령보다 일렀다. 선령은 금란과 금교가 예식을 마치고 신방에 든 뒤에야 식을 거행했다.
선령은 황실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는 여인이었다. 선황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월왕까지 구한 공로가 혁혁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에 걸맞은 하사품을 내리려 했지만 선령은 한사코 거절하였고, 결국 약선골을 재건하는 정도로 타협을 보았다.
혼례당은 월왕과 월왕비의 측근인 선령의 혼례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신랑과 신부의 혼례복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혼례는 내 난생처음이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런 구경을 또 언제 해 보겠소.”
소익의 혼례복은 특별히 개량한 것이라 여타 신랑의 것보다 옷 선과 문양이 훨씬 부드러웠다. 거기에 신부치고는 늠름한 선령이 옆을 지키고 있으니 누가 봐도 데릴사위를 맞이하는 혼례였다.
평범한 사내라면 데릴사위가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명색이 사내대장부라면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소익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의 신랑이 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 됐든 그것이 중요하랴.
이윽고 혼례 진행 관리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목운요의 눈에 행복에 겨워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선령이 들어왔다. 목운요의 입꼬리도 선령을 따라 올라갔다.
‘선령이 이번 생에는 제 행복을 찾았구나. 이제는 이전 생의 아쉬움을 전부 만회할 수 있겠어.’
* * *
혼례가 끝나자 목운요는 장공주, 그리고 월왕과 함께 궁으로 돌아왔다.
황제와 황후는 근래 옥화궁을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다. 물론 그 이유는 이제 몸까지 뒤집을 정도로 자란 영안염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에 목운요는 내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황후는 다시 한번 회임을 하길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했다.
조카를 실컷 보던 황제와 황후가 처소로 돌아가자, 목운요는 아들을 토닥이며 잠을 재웠다.
영안염은 요 몇 달간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살도 제법 토실토실 올랐다. 특히 양 볼은 보는 사람마다 한 번씩 손이 갈 정도로 하얗고 보드라웠다.
또래에 비하면 여전히 작았지만, 그래도 막 태어났을 때에 비하면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다.
아이가 잠이 드니 월왕이 들어왔다.
“염아는 잠이 들었나?”
“네. 폐하께서도 방금 돌아가셨어요. 조정에 긴히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
고개를 끄덕인 월왕이 요람 옆에 앉아 소곤대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북강에서 화친서 서명을 요청하는 서신이 도착했다. 월서 접경의 북강 땅 일부를 넘길 테니 포로로 붙잡혀 있는 혁련저를 풀어 달라고 하는군.”
목운요는 순간 놀라서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서 그러자고 하시던가요?”
“그래. 이미 윤허하셨다.”
“육냥이 혁련저 대신 왕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목운요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육냥은 도화족, 그리고 그 근방의 부족들을 제 편으로 포섭하여 군대를 이끌고 북강성까지 치고 들어갔다. 그대로 왕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왜 그걸 포기한 걸까.
목운요의 손을 살며시 잡은 월왕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나름의 계획이 있겠지.”
물론 그 계획은 목운요와 연관이 있으리라.
이후에도 북강 쪽 소식은 이따금씩 날아들었다. 혁련저가 왕으로 즉위하긴 했으나, 도화족 등의 북강 삼 대 부족 수장들이 조정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북강 왕은 허수아비 신세가 된 것으로도 모자라 손발까지 완전히 묶여 버렸다. 더 불행한 건 몸이 자꾸만 허약해져 앞으로 아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강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와중에도 육냥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목운요는 사람을 시켜 그 행적을 뒤쫓았지만 역시나 오리무중이었다.
* * *
어느새 중추절이 다가왔다. 영안염도 벌써 십팔 개월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해 몸은 여전히 비실비실했지만, 말은 천재인가 싶을 정도로 빨리 익혀 지금은 제 의사를 또렷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태어난 이후 줄곧 황궁에 머무른 영안염은 장공주부에 놀러 가는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중추절이 되니 그간의 답답함을 한 시진 가까운 칭얼거림으로 쏟아 냈다. 달래다 지친 월왕과 목운요는 결국 아이와 바깥나들이에 나서기로 했다.
월왕의 품에 안긴 영안염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목운요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야 때문에 염아 버릇이 잘못 들겠어요.”
영안염을 단단히 부축한 월왕이 말했다.
“이만큼 컸으니 밖에 나와 구경할 때도 됐지.”
영안염은 그간 걸핏하면 열이 나고 병이 나서 목운요의 속을 태웠었다. 이번엔 웬일인지 별 탈 없이 지나가 오랜만에 마음을 놓았는데 갑자기 외출을 하려니 또 걱정이 밀려왔다.
제 어미의 걱정 어린 안색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영안염이 월왕의 품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목운요에게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러고는 짤막한 팔을 뻗으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뽀뽀, 뽀뽀.”
“그래. 이 어미 화 안 났어. 대신 나가서 말 잘 들어야 한다. 함부로 뛰어다니면 안 돼. 알겠니?”
“응응.”
궁을 나서자 날이 차가웠다. 목운요는 제 손으로 만든 작은 모자를 영안염에게 씌워 주고는 모자가 잘 어울리는지 확인했다.
영안염은 출긍에 신이 났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고, 특히 길가에서 파는 탕후루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목운요는 월왕 대신 영안염을 안아 들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자꾸나. 아버지께서 사 오실 거야.”
“염아 무거워. 내릴래.”
영안염이 품에서 내려와 그녀의 옆에 섰다. 그러다 북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휙 돌리더니 까르르 웃으며 목운요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목운요가 방심한 틈에 아이가 그만 손을 놓고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염아……!”
인파에 밀린 영안염이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조그만 아이를 보지 못했다. 아이 위로 발이 덮치려는 순간, 누군가 허리를 굽혀 재빨리 아이를 들어 안았다.
화들짝 놀라 황급히 달려간 목운요는 얼이 빠진 채로 영안염을 안고 있는 이를 바라봤다.
“육냥…….”
육냥의 눈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주인님.”
육낭의 옷차림을 보고 목운요는 그만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북강에서는 반년 전에 떠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실종이 된 줄로만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육냥의 행적을 찾을 수 없던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육냥은 자신의 복장 때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소인, 실종된 것이 아닙니다. 그간 계속 마마 곁에 있었습니다.”
목운요는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왜 그렇게까지 한 것이냐?”
육냥은 그림자 호위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 부위에는 풀과 꽃으로 ‘한 일’자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유일을 대신해 뽑혔음을 의미했다.
육냥은 영안염을 목운요에게 넘겨주었다.
“마마를 지키고 보필하는 것이 소인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왜 이리 어리석은 게야? 난 월왕과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어. 네가 내 곁을 평생 지켜도 내 마음은 변치 않아.”
목운요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가슴이 너무 아파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육냥의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떠오를 뿐이었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이번 생이 안 되면 그다음 생에, 그다음 생도 기회가 없으면 그다음 생을 기다릴 것입니다. 마마께서 하신 말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소인이 언제 돌아오든 소인의 자리를 남겨 두시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