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세 쌍의 합동 혼례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월왕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목운요를 보고는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일어났느냐?”
“네. 아이는 언제 깼어요?”
“얼마 안 된다.”
아이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라치면 서툴러지는 스스로가 월왕도 낯설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더 투박해지는 사람의 심리일까? 월왕은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만 보아도 마음이 아려 쓰다듬고 싶었다.
목운요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사야께서 좀 더 봐주세요. 전 왜 이리 졸음이 쏟아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래. 더 자거라. 아이는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월왕은 뿌듯하게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목운요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가 어미 목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어미를 찾아 손을 버둥거렸다.
월왕은 아이를 말려 보려 나름의 애를 썼지만 아이는 월왕의 마음을 몰라줬다. 어미에게 가겠다며 입을 내밀고 울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놀란 그가 얼른 아이를 목운요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금세 까르르 웃는 얼굴이 되었다. 녀석, 어미만 찾는군.
* * *
사흘이 지나고, 궁중 연회 날이 되었다.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해 연회는 분위기가 아주 흥겨웠다.
월왕의 탄핵을 상주하던 대신들은 북강이 토벌된 직후 좌천되어 조정에서 쫓겨난 뒤였다. 그러니 더 이상 황제와 월왕의 깊은 우애를 두고 시비를 걸며 충동질하는 이는 없었다.
월왕에게 술을 권하던 황제가 서립에게 성지를 낭독하도록 했다.
“……월왕을 병견왕으로 봉하며, 그의 아들 영안염을 안군왕으로 봉하노라……. 이와 더불어 마땅한 물품을 함께 하사하노라.”
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어 올리며 축하의 뜻을 전했다.
월왕은 감사를 절을 올렸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어서 일어나게.”
“소신, 폐하께서 윤허해 주셨으면 하는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황제는 월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번에 짐작했다. 그래서 못내 아쉬움이 밀려왔다.
“말해 보게.”
“폐하, 소신은 식견이 얕고 학문도 변변치 못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는 건 그나마 할 만하지만, 정사를 돌보는 건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또 북강과 운노가 화친서를 연달아 보내와 대력조의 국경이 평안해졌습니다. 하여 소신은 이제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강산을 유람하며 좀 게으름을 피우고 싶습니다.”
“월왕, 자네…….”
월왕의 침착하고 담담한 눈빛에 황제는 그저 남몰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월왕이 황위 다툼에서 빠지기로 결심을 한 건 순전히 목운요를 곁에서 더 보살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이제 북강이라는 문제까지 해결했으니 그로서는 도리를 다한 셈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높은 자리에 오르니 외로움이 따라붙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계속 줄어들었다. 그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조카가 크는 걸 옆에서 좀 더 지켜보고 싶었다. 월왕과 월왕비를 붙잡아 둬야 하는 이유는 이렇듯 많았다.
“월왕, 염아가 아직 어리지 않나. 서릉에 몇 년 더 머무는 게 아이한테도 좋지 않겠나? 서릉 근방에도 경관이 근사한 곳이 꽤 많네. 그럼 짐의 말대로 하는 걸로 알겠네. 자, 술이나 드세.”
황제는 월왕이 황궁을 떠나는 걸 윤허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월왕도 단호한 황제의 태도에 더는 제 의견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사실 황제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아이가 아직 어리고 허약하니, 건강해질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연회가 끝이 나고, 월왕은 술기운이 제법 올라 있었다.
목운요는 아이가 계속 걱정되는 데다가 대전에 진동하는 술 냄새 때문에 머리도 지끈거려 일찍 처소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뒤늦게 돌아온 월왕을 맞이하려 몸을 일으켰다.
“사야, 왜 이리 취하셨어요?”
월왕이 평소보다 한참이나 더딘 속도로 눈을 깜박거렸다. 목운요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요아, 술 냄새가 지독하겠군. 미안하다.”
“일단 씻으시어요. 더운물을 준비하라고 이를게요.”
“아니, 네 옆에 있고 싶다.”
“그럼 세안이라도 하세요.”
“그것도 싫어…….”
월왕이 목운요의 목덜미로 얼굴을 묻고는 자꾸만 파고들었다.
“요아, 사랑한다.”
목운요는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따스한 감정을 느꼈다.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너도 날 사랑하느냐?”
목운요가 품에서 살짝 빠져나와 벌게진 월왕의 귀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따스하고 영롱했다.
“사랑하지요. 사야와 머리가 희어지도록 함께하고 싶어요.”
월왕이 웃었다. 평소처럼 입꼬리만 미세하게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입을 헤벌쭉 벌린 채 바보처럼 한참을 웃어젖혔다. 그러곤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럼 이제 육냥을 그리워하면 안 된다.”
목운요는 술기운이 전해지는 월왕의 얼굴을 매만지며 살짝 웃었다.
“육냥은 북강의 왕자입니다.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육냥을 시샘하시다니요.”
월왕은 그러겠노라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는 목운요를 와락 품었다.
“육냥뿐이 아니다. 소청오도 생각하지 말거라. 그놈은 아직도 널 마음에 두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제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북강 왕을 죽여 큰 공을 세운 소청오가 곧 서릉으로 돌아올 터였다. 황제는 인재라면 파격적으로 등용했다.
그렇다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언짢았다.
소청오…….
강성에서 마주한 사내가 떠오른 목운요는 그 생각을 떨치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소청오는 자신을 뼛속까지 증오해도 모자랐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흠모한다니, 월왕의 과한 상상이었다.
“알았어요.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아요. 항상 사야만 생각할게요. 이제 됐지요?”
“그래.”
월왕은 목운요를 더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며 불안하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목운요가 먼저 정적을 깼다.
“사야, 제가 얼굴을 닦아 드릴게요. 우리 어서 쉬어요.”
“알겠다.”
월왕이 목운요 몰래 눈가를 훔쳤다. 술과 밤이라는 요소가 마음속 두려움을 크게 만들었고, 목운요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치자 감정이 북받쳤다. 하지만 목운요에게는 이런 나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목운요가 월왕의 얼굴을 닦아 주려는데, 갑자기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침상 위로 내려왔다. 놀란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야!”
월왕이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요아, 이렇게 보고 있어도 그립다.”
안군왕으로 책봉된 아이가 장공주에게 보내져 둘만 남은 밤이다.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인 셈이었다. 이 귀한 시간을 허투루 쓸 순 없었다.
* * *
이튿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목운요가 잠에서 깼다.
목운요의 세안을 도우러 온 금란과 금교는 자꾸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장공주 전하께서 보양하시라고 대추연밥차를 보내셨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목운요가 거울을 통해 두 사람에게 눈을 흘기었다.
“서릉으로 돌아온 데다 문제들도 다 해결이 됐는데, 금란도 이제 우항과 혼례를 올려야죠?”
잠시 머뭇거리던 금란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이리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운요가 빙그레 웃었다.
“서릉에 이미 처소를 마련해 뒀어요. 우항과 혼인을 한 뒤 옮겨 가 살아요. 그리고 서릉에 있는 가게 한 칸을 내줄 참이에요.”
“네? 아뇨! 소인은 혼인을 해도 계속 마마를 모실 것이어요.”
금란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집도, 가게도 필요치 않습니다.”
“집이 없는 건 나무에 뿌리가 없는 것과 매한가지예요. 당장 살지 않으면 세를 내주면 되죠.”
혼례 장소를 어디로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목운요에게 금교가 투정 어린 말을 했다.
“마마, 소인은요? 금란 언니만 예뻐하시는 것입니까? 소인도 혼인하고 싶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놀란 목운요가 얼빠진 얼굴로 금교를 쳐다봤다.
“누, 누구와?”
“당연히 우의이지요. 어찌나 무뚝뚝하던지, 마음 돌리느라 애먹었어요. 돌부처가 따로 없다니까요? 하지만 혼인을 하고 하나하나 가르치면 눈치코치가 생기겠죠.”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선령이 박장대소하였다.
“금교, 요것. 아주 앙큼하네. 나한테 약이 잔뜩 있다. 가루로 된 것도 있고, 환으로 된 것도 있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 내 공짜로 내줄 터이니.”
목운요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것 가르치지 마. 그런데 오늘은 경사가 한둘이 아니구나. 선령, 소익과는 어때? 합동 혼례 준비라도 해 볼까?”
“시집가는 건 싫어. 그럼 자유를 잃잖아.”
선령이 몸서리를 치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목운요가 짓궂은 눈빛으로 말했다.
“시집을 가지 않고 부군을 얻으면 되지. 소익을 장가오게 해서 약선골 데릴사위로 삼아.”
동그랗게 뜬 선령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지금 당장 가서 물어봐야겠어.”
결국 금란, 금교, 선령은 합동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장공주는 공주부를 혼례 장소로 흔쾌히 내주었다.
금란과 금교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일개 종 주제에 감히 장공주의 처소를 쓰다니, 그건 아니 될 일이었다.
놀람을 넘어서 벌벌 떠는 두 사람을 보며 목운요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경릉성에서 서릉까지, 그리고 서릉에서 다시 월서까지. 내 옆을 한결같이 지켜 준 게 두 사람이었어요. 내 가족도 두 사람처럼 지극정성으로 보필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어요.”
잠시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던 선령에게 금란과 금교가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선령은 그 시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괜스레 헛기침을 하였다.
“흠흠, 이런, 잠깐 딴생각을 했네. 방금 무슨 얘기 중이었어? 설마하니 혼수 얘기를 한 건 아니지?”
“공주부에서 혼례 올리는 게 괜찮은지 얘기 중이었어.”
“뭘 고민해? 운요와 우리가 예사 사이던가. 그리고 장공주 전하께서 공주부를 혼례 장소로 쓰라 하신 건 그만큼 우리를 아끼신다는 뜻이야. 영 마음에 걸리면 앞으로 곱절로 갚으면 될 노릇이고. 거절하면 장공주 전하께서 얼마나 서운하시겠어.”
금란과 금교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목운요를 쳐다봤다. 목운요가 미소와 끄덕임으로 화답하였다.
“그럼…… 감사히 뜻을 따르겠습니다, 마님.”
금란과 금교는 고마움을 전하며, 끝에 ‘마마’ 대신 ‘마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호칭을 바꿨을 뿐인데 목운요가 한결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