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아이 이름 짓기
성문 입구에 다다르자 길 양옆으로 줄지어 선 관리들이 보였다.
목운요는 황제의 정성이 고마웠다. 하지만 과분한 환영 의식이라는 생각에 왠지 멋쩍어졌다.
“조용히 환궁하고 싶다고 폐하께 부탁을 드렸더니, 폐하 대신 예부 관리들을 전부 보내신 것 같습니다.”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목운요의 손을 꼭 잡은 월왕은 만족감으로 마음이 충만했다. 조정이니, 정사니 이런 것들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폐하의 성정이 본래 그러하다. 냉궁에 있는 나를 보러 담을 넘다 떨어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 그러고도 뭐가 즐거운지 그칠 줄을 몰랐어. 선황이 계실 때는 그나마 몸을 사렸는데, 이제 황제가 됐으니 거리끼실 게 있겠느냐?”
월왕과 목운요는 서로의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를 낀 채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월서는 그들에게 생사를 건 사랑을 확인시켜 준 곳이었다. 그곳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은 한 뼘 더 자라났고, 서로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달았다.
마차가 서릉 입구에 멈춰 섰다. 그러자 예부 관리들이 황급히 다가왔다.
“월왕 전하, 월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두 분의 처소는 옥화궁으로 마련해 뒀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월왕이 마차 가리개를 걷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차를 몰아 궁으로 향했다.
태화전 입구에는 황제와 장공주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고, 황후도 장공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곁에 서 있었다.
“전하, 월왕비와 월왕은 왜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까요?”
장공주도 그녀의 손을 살짝 두드렸다.
“나도 이리 멀쩡한데 자네가 더 안달이 났구려. 곧 도착할 걸세.”
“월왕비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모자가 무사하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직접 보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황후 민방화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 알현을 아뢰는 소리가 들려왔다.
“월왕, 월왕비, 혜의 부인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왔나 봅니다.”
월왕과 목운요는 황궁 입구부터 시작해 태화전까지 깔린 붉은 융단에 발을 내디뎠다.
월왕의 품에는 아이가 안겨 있었다. 본래 목운요가 안고 들어가려 했지만 어디 순순히 그러라고 할 월왕이던가. 태어날 때만 해도 새끼 고양이처럼 조그맣던 녀석이 두 달 만에 제법 자라 목운요가 안기에는 버거운 감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연한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가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보배는 쉽게 구해도 천상배필은 만나기 어렵다고 했거늘, 딸아이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월왕을 만난 황제는 기쁜 마음에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월왕을 얼싸안고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품 안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고는 가까이 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월왕, 어서 일어나게. 월왕비와 혜의 부인도 그만 일어나도록. 이 아이가 짐의 조카인가?”
황제는 품위도 잊은 채 바로 손을 뻗어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 세심한 손길로 아이의 작은 얼굴을 매만지며 체온을 확인했다. 추위에 먼 길을 오느라 고뿔이라도 걸리지 않았는지 염려됐던 것이다.
“바람이 차네.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어서 처소로 가서 쉬시게.”
한 가족 사이에 거창한 허례허식은 불필요했다. 대화는 나중에 천천히 나누면 되었다.
황제는 그저 먼 길을 왔을 월왕 내외가 먼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연회도 사흘 뒤로 정하고 일단 옥화궁으로 향했다.
황제와 황후가 아이를 번갈아 품에 안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이, 월왕과 목운요는 장공주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저희 돌아왔습니다.”
장공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그래. 무사히 왔으니 되었다.”
무수한 위험이 도사리는 여정에서 무탈하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어서 황제를 비롯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북강의 일도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월왕과 목운요도 무사히 돌아왔으며, 거기에 그 둘의 아들까지 세상에 태어났다. 겹경사에 그간의 걱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웃음소리만 옥화궁 안을 꽉 채웠다.
황제와 황후는 조카를 품에 안고 놓을 줄을 몰랐다. 월왕이 그만 자신이 안고 있겠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자네는 좀 쉬게. 아이는 나와 황후가 잠시 봐줄 터이니.”
황제와 황후는 아이를 무슨 보배라도 되는 양 바라보고 있었다.
월왕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아이가 그리웠다. 그런데 황제와 황후가 아이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저도 모르게 눈을 흘기게 됐다.
황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를 안은 채 기쁨에 한껏 취해 있었다.
“아이 이름은 생각해 둔 게 있는가? 짐이 서책을 한참 뒤져서 몇 가지를…….”
“폐하, 송구하오나 외자로 이름을 지어 뒀습니다. 염(念)이옵고, 아명은 염아라고 하면 어떨까 합니다.”
염아라…….
왠지 마음이 벅차오른 목운요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이름이 탐탁지 않았다.
“외자로 짓는다? 염아 항렬의 돌림자는 ‘안’ 자가 아닌가? 그러니 영안염(寧安念)으로 이름을 지어야 옳네.”
“폐하, 염아는 제 자식입니다. 황족의 항렬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줄 압니다. 염이라는 외자가 소인은 마음에 듭니다.”
‘염’이라는 글자는 목운요가 고생스럽게 아이를 출산하던 때를 상기시켜 주었고, 월서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월왕에게는 이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안’ 자가 꼭 들어가야 하네. 고모님, 어떠십니까? ‘안’ 자가 더해져야 이름이 듣기에도 더 좋지 않습니까?”
황제의 김이 팍 새어 버렸다. 조카의 이름을 뭐로 지을까 신이 나서 고민했는데 월왕이 이미 생각해 놓은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쏘냐. 장공주라면 제 편을 들어줄 것이다.
장공주는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안’ 자까지 붙이니 더 듣기 좋군요.”
황제가 이름을 하사하고 있었다. 그것도 황자와 같은 돌림자를 써서 말이다. 아이에게도 좋은 연이 생기는 셈이었다.
월왕은 그래도 ‘염’이라는 외자가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라는 입장을 내세워 황제와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했으나, 목운요까지 흐뭇하게 미소를 짓자 불타오르던 경쟁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부인도 좋아하는데 우겨서 무엇하리. 다시 보니 영안염도 썩 마음에 드네.
이후로 몇 마디 말을 남긴 황제와 황후는 월왕 내외가 편히 쉬도록 몸을 일으켰다.
월왕은 빠른 동작으로 그들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냉큼 제게로 가져왔다. 황제와 황후는 섭섭한 마음에 기분까지 언짢아졌지만 월왕은 아이의 아비였다.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목운요의 손을 꼭 잡은 장공주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야윈 목운요가 안쓰럽기만 했다.
“많이 말랐구나.”
목운요는 장공주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더없이 포근한 느낌에 마음마저 따스해졌다.
“다들 아이를 낳으면 몸이 불어서 고민인데, 전 이리 살이 빠졌으니 이것도 복이라면 복이지요.”
“말은 잘하는구나.”
아이를 출산하는 일은 생사를 오가는 고통이라고 했다.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장공주는 그 먼 곳에 있던 목운요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투정을 하기는커녕 뭐가 좋은지 연신 웃으며 자신을 안심시키는 목운요를 보니 더 가슴이 아려 왔다.
“외할머니, 월서에서 그리 잘 지냈는데도 외할머니 주방장이 해 주던 음식이 정말 그리웠어요. 어서 그 음식을 먹고 싶어요. 월서에서 못 먹었던 거 오늘 잔뜩 먹어 볼래요.”
목운요의 말에 장공주는 얼른 곡 마마를 불러 음식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그래. 먹고 싶은 걸 모두 만들어 주마.”
“역시 전 외할머니뿐이에요.”
이내 하나같이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올라왔다. 맛 또한 일품이었다. 목운요는 밥을 평소보다 곱절은 더 먹었고, 장공주는 복스럽게 먹는 목운요를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주방장에게 후한 상까지 내릴 참이었다.
한 끼 식사를 배불리 마친 이들은 각자 처소로 돌아갔다. 이제 온전히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다.
일부러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이동했지만, 마차에서 긴 시간을 머무르다 보니 극도의 피곤이 몰려왔다.
목운요와 월왕은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이가 중간에 깨자 월왕이 얼른 나지막한 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목운요의 단잠을 방해해선 안 되었다.
아이의 배를 토닥토닥 어루만지며 다시 스르륵 잠이 들려 하는데, 아이의 칭얼대는 소리에 번쩍 눈이 뜨였다.
아이의 가슴에 손을 살포시 올려놓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 외려 입을 크게 벌리고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월왕도 아이를 따라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미리 데워 둔 우유를 작은 수저로 떠먹였다.
원래 배가 부르면 새근새근 잠이 들던 아이가 오늘은 웬일인지 말똥말똥하기만 했다. 손발을 계속 버둥거렸고, 월왕이 잠시라도 시선을 돌리면 바로 울 준비를 했다.
그러자 월왕이 눈을 크게 뜨고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아이는 겁을 먹기는커녕 신이 났는지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그 모습에 월왕은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목운요는 날이 어둑해져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월왕은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방 안을 오가며 아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아이의 주먹을 감쌌다가, 턱을 쓰다듬었다가, 또 제 이마를 아이의 이마에 맞댔다가 하면서 아이가 예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목운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월왕의 부성애가 저리 깊었다니, 부자지간의 즐거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