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서릉 복귀
한편, 제민도 군영을 가득 채운 맛있는 음식 냄새에 업무 얘기를 나눌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일단 음식부터 먹자고 월왕에게 간절한 눈으로 제안했다.
월왕은 흔쾌히 승낙했다. 본래 제민에게 따로 식사를 준비해 주려고 했으나 그는 굳이 생강차를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물론 월왕도 평소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사이이다 보니 그들의 음식을 먹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은 데다 목운요가 염려돼 입맛이 없었다. 해서 제민이 허겁지겁 생강차를 비우는 것만 구경했다.
“월서에 와 있는 동안 말도 못 하게 고생했습니다. 눈이 내려 군량 공급이 끊기는 바람에 이렇게 실컷 먹어 본 게 언제인지……. 실례를 범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전하, 혹시 남은 생강차가 많이 있습니까? 이 뜨끈한 생강차를 저 혼자 마실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병사들에게도 맛을 보여 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이 생강차는 전부 왕비가 조달해 오는 것이라 본 왕도 잘 알지 못하네.”
월왕은 딱 잘라 말했다.
“아, 왕비 마마께서도 이곳에 오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혹여 소인이 직접 찾아뵐 수 있을까요?”
제민의 청에 월왕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제민은 그런 월왕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월왕비는 인정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직접 찾아가 정중히 청하면 마음씨 좋은 월왕비가 생강차를 조금이나마 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많이도 필요 없었다. 부상 입은 병사들이 마실 것만 얻어도 충분했다.
월왕의 허락을 받고자 제민은 저녁이 늦도록 꾸물거리며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월왕이 지위로 압박해 그를 쫓다시피 보내 버렸다.
월서 대군에게 저녁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잔뜩 기대하고 있던 황실 병사들은 빈손으로 돌아온 제민을 보고 어깨가 축 늘어졌다.
“월왕 전하께서 저녁 식사도 대접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민은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쓸모없는 놈들. 고작 생강차 갖고 그리 침을 흘리는 게냐?”
“고작 생강차가 아닙니다. 그 안에 생강에 고기까지 들어 있고, 향신료도 듬뿍 넣어 향은 또 얼마나 진한지……. 솥에 넣고 끓여서 마시면 한겨울에도 끄떡없을 것 같던데요. 혹 대인께서도 못 드신 겁니까?”
제민은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월왕 전하가 이리 속이 좁을 줄이야!
* * *
처소로 돌아온 월왕은 막사 안의 장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침상에 옆으로 누운 목운요가 아이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고, 하늘거리는 촛불의 따스한 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백옥처럼 고운 그녀의 얼굴에 촛불의 빛까지 더해지니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인기척을 들은 목운요가 흥얼거리던 동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월왕을 발견한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야, 오셨어요?”
월왕이 몸을 일으켜 앉은 목운요를 품에 꼭 안았다.
“요아, 우리가 대승을 거뒀다.”
목운요가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난 멀쩡하다. 네가 손수 만들어 준 향낭이 있는데 다칠 리가 있겠느냐?”
월왕은 목운요의 머리에 제 턱을 묻었다. 그녀의 달콤한 향을 맡으니 온몸의 긴장이 스르륵 풀렸다.
“요아, 이제 돌아갈 수 있다.”
“월서 도성이 지척인데 한번 가 본다 하고 여태 갈 기회가 없었네요. 한데 아이도 어리고 날까지 추우니 다음을 기약해야겠어요.”
월왕이 목운요를 감싼 팔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함께할 여생이 아직 기니 조급할 것 없지.”
“그래요.”
* * *
한편, 북강의 도성은 혁련역지가 이끄는 병사들에 의해 포위돼 있었다.
북강 왕과 혁련담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에 도성을 지키던 이들도 전투력을 상실한 채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그에 혁련역지의 수하들은 일제히 기쁨의 환호성을 터트렸고, 도화족의 우두머리인 도화경은 무릎을 꿇고 혁련역지에게 절을 올렸다.
“왕자 저하, 나라의 주인 자리는 하루도 비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왕자 저하께서 왕으로 즉위하셔야 합니다.”
가만히 서 있던 혁련역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성안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 모친께서는 대력조 사람이고, 나 역시 대력조에서 지낸 시간이 기네. 왕위를 맡을 자격이 없어.”
“저하, 영웅은 출신을 묻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혈통, 이력은 전혀 중요치 않사옵니다.”
“긴말 말게. 난 이미 결심을 굳혔어. 북강의 안정을 도모하고 나면 혁련저를 풀어 달라고 대력조 황실에 서신을 보낼 걸세. 혁련저가 왕위를 잘 계승하도록 자네가 보좌하게.”
도화경은 아연실색했다.
“저하, 소인은 그런 능력이 없사옵니다. 더욱이 혁련저는 용맹하긴 하오나 어리석은 인물입니다. 중임을 맡기에 적절치 않습니다…….”
“그만하라 했네. 나에게는 더 중한 일이 남아 있네. 북강에 오래 머물 수 없어.”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목운요 생각뿐이었다. 그가 편히 거할 곳은 두렵도록 큰 북강 도성이 아니라, 목운요의 곁이었다.
대패한 북강이 투항하고 화친을 청한다는 소식이 대력조 전역에 파다하게 퍼지면서 백성들은 그야말로 흥분에 휩싸였다.
월왕의 명성이 한층 격상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와 목운요의 목숨을 건 사랑 이야기에 온 백성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황제는 승전보를 듣고 능서행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모님, 월왕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장공주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이런 기쁜 일이 있나. 잘됐습니다, 잘되었어요.”
미리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황제의 입을 통해 다시 듣자 그 감격이 몇 배로 불어나는 듯했다.
황제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고모님, 월왕을 짐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병견왕(幷肩王)으로 봉해야겠습니다.”
“폐하와 동등한 왕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월왕과 월왕비는 조정 일에 뜻이 없습니다. 보석이나 하사하면 충분할 듯합니다.”
“아닙니다. 오래 고심한 일입니다. 월왕에게 맞는 지위는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게다가 두 내외의 아들이 아직 이름이 없지요? 짐이 좋은 이름을 하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왕으로 봉하겠어요.”
“폐하, 그건 안 됩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한테 너무 과한 자리입니다. 혹여 감당하지 못할까 저어됩니다.”
장공주는 월왕의 승전보를 받고 기뻐 방방 뛰는 황제를 보고 그간의 걱정이 기우라고 생각했다. 천자가 된 황제가 안하무인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내심 걱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월왕이 지킬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두 형제가 낯을 붉힐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 *
황실 대군이 서릉으로 복귀하는 와중에도 월서 대군은 계속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한편 목운요는 고집불통인 월왕을 어찌하면 좋을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사야, 산후조리는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월왕이 세게 고개를 저었다.
“요아, 북강을 제압했으니 조정에도 급한 일은 없다. 그러니 서둘러 돌아가지 않아도 돼. 장모님께서 출산한 여인은 한동안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고 하시더군. 딱 열흘만 더 있다 가자꾸나.”
목운요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벌써 한 달째 목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씻지 못한 찝찝함이 이미 극한에 달해 있는데 또 열흘을 지체해야 한다니, 정말이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저한테 냄새가 나 못 견디겠어요.”
그에 월왕이 냉큼 목운요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코를 갖다 대었다.
“무슨 말이요? 향긋한 냄새만 나는데.”
부끄러운 목운요가 월왕을 황급히 밀쳤다.
“저리 가세요. 기분이 별로라 혼자 있고 싶습니다.”
“요아…….”
목운요의 처소에서 쫓겨나면서도 월왕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럼 쉬거라. 나는 가서 마차를 잘 만들고 있는지 점검할 테니.”
월서로 가면서 나름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너무 급작스런 행차라 마차에 손볼 부분이 많았다. 게다가 지금은 아이까지 생겼기 때문에 마차를 더 안락하게 꾸며야 했다.
토라진 목운요가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막사 밖에 있던 월왕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 막사 앞을 떠날 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행복한 얼굴로 서 있던 월왕이 마차를 점검하러 아쉬운 발걸음을 떼었다.
황제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대군이 서릉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월왕 내외는 없이 제민만 당도하자 황제는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열닷새가 지나자 월왕과 목운요도 서릉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들뜬 황제는 도착 며칠 전부터 궁중 연회는 어떻게 베풀 것이며, 월왕의 공적을 치하하려면 무얼 하사해야 하는지를 고심했다.
심지어 성문으로 친히 마중 나갈 생각까지 했지만, 말을 꺼내자마자 대쪽 같은 언관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미 한차례, 승리하고 돌아온 대군을 맞이한 바 있는데 월왕 내외의 마중까지 나간다면 그건 더 이상 환영 의식이 아니라 상전을 떠받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예법을 중시하고 강직한 언관들을 어찌 설득하리. 때때로 황제에게는 달갑지 않은 충언을 하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원칙과 도리는 존중되어야 했다. 게다가 월왕도 서신을 보내 조용히 환궁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온 터였다.
* * *
마차 창밖으로 성문이 어렴풋이 보였다. 금란과 금교는 희색이 만면하여 소리쳤다.
“마마, 서릉이 보입니다.”
목운요가 마차 가리개를 살짝 걷어 보았다. 익숙한 길과 풍경을 보자 그녀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이들은 장공주를 뵈러 능서행궁부터 들를 참이었다. 그런데 이를 미리 직감한 황제가 장공주를 먼저 황궁으로 돌아오도록 조치해 두었다. 그래야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황궁에 닿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