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왠지 모를 박탈감
“뭐?”
선령은 제 귀를 의심하며 어리둥절해했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뭘 그리 놀라? 나와 사야는 폐하를 믿어. 폐하께서는 형제지간의 우애를 저버릴 분이 아니야. 그리고 시위들을 심어 놓은 것도 만일에 대비한 거지, 정말 그리 행한다는 것이 아니야.”
“그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생각을 정리한 목운요가 답했다.
“우리로서는 마땅한 대비를 하는 것이야.”
선령이 눈을 깜박이더니 목운요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갑자기 네가 좋아지려고 해.”
목운요가 선령의 손을 살며시 내쳤다.
“이런, 그럼 소익은 어쩌고?”
선령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 그놈까지 신경 써야 해?”
“그래? 누가 설련화 얘기를 했더니 소익이 광주리를 짊어지고 혼자 산을 올랐다던데?”
“그러거나 말거나 난 관심도 없어.”
“지금은 삼월 초야. 월서는 봄이 더디게 찾아와 산 곳곳이 얼어 있지.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텐데.”
그에 선령이 벌떡 일어나서는 아이를 목운요의 품에 조심히 돌려놓았다.
“나 깜박한 일이 있어. 약재가 제대로 준비됐는지 봐야 하는데. 그럼 쉬고 있어!”
그러더니 겉옷도 제대로 여미지 않은 채 막사를 뛰쳐나갔다.
마침 죽을 가지고 오던 금란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선령이 맨날 마음에도 없이 소익에게 야박하게 대했는데, 마마께서는 역시 수완이 좋으십니다.”
“누가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마음을 열지 못할 거예요.”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아는 목운요였다. 월왕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까지 그녀도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내야 했던가…….
선령도 그때의 그녀처럼 주저하고 있었다. 누군가 등을 살짝만 떠밀어 주면 쓸데없이 소중한 시간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금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목운요는 웃음을 가득 머금고는 금란을 바라봤다.
“선령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금란도 우항과 다퉜다고 들었는데.”
금란이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마, 어찌 아셨습니까?”
“척 보면 알죠. 우항과 우의가 결단을 내려 준 것이 난 고마워요. 서신이 며칠만 늦게 당도했어도 사야를 영영 뵙지 못했을 테니.”
“그건 그렇지만, 비 마마께서 고생하신 걸 생각하면 열불이 납니다.”
“금란이 날 걱정하는 것처럼, 우항도 제 주인이 염려될 것 아니에요. 우항의 입장도 헤아려 줘야죠. 북강 쪽 일이 해결되면 둘의 혼례를 준비해 줄게요. 어때요?”
“마마……. 급하지 않습니다. 우항을 좀 더 혼내 줄 참이에요. 행동이 앞서는 그 버릇을 고쳐야 해요.”
“그래요. 언제든 마음이 풀리면 얘기해요. 혼례 물품은 이미 준비해 뒀으니.”
“마마, 어찌 천한 소인을 위해 그렇게까지……. 송구합니다.”
* * *
그 시각, 북계산 골짜기.
혁련담은 피범벅이 돼 있었고, 그의 호위들도 절반은 죽고, 절반은 중상을 입은 채였다.
그 앞에서 월왕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영락없는 죽음의 신 같았다.
월왕은 사람이 개미라도 되는 듯 무참히, 냉정하게 죽였다. 그 많은 목숨을 죽이고도 태연하기만 한 그에게 혁련담은 진정 두려움을 느꼈다.
“월왕, 이번에 살려 주면 이 은혜는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소.”
“북강 왕은 재능은 뛰어나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지. 혁련저는 용맹하나 지력이 없어 중임을 맡기기 어렵고. 북강 땅에서 머리라고 할 만한 건 자네가 유일하지. 그러니 허기를 뒤에서 조종한 것도 분명 네놈일 터.”
혁련담이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설마 눈치챈 것인가!
그 반응에 월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안 그래도 매서운 기운이 더 강하게 전해졌다. 그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역시 네놈 소행이군.”
“월왕, 그저 관심을 끌려고 했던 일이오. 독충을 없애는 방법까지 다 준비해 뒀다고. 마지막 날에 구해 줄 생각이었다오. 내 설마하니 목숨이라도 노렸겠-”
혁련담은 월왕을 설득할 말을 짜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목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목에서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혁련담이 눈만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 가라.”
월왕이 냉정하게 장검을 내리그었다.
질겁한 북강의 병사들은 그 누구도 감히 월왕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시체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때, 우항과 우의가 다가왔다.
“전하.”
“투항하는 자는 포로로 끌고 가고, 반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도합 십만의 병사를 이끌고 출병한 북강은 이만 명이 죽어 나갔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투항하여 포로가 되었다.
산골짜기 위에서 말을 달려 내려온 제민이 월왕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소인, 전하를 뵈옵니다. 그간 북강을 속이느라 얼마나 고생이셨습니까? 오늘 이리 북강에게 대승한 것은 모두 월왕 전하의 공덕입니다. 소인의 절을 받으십시오.”
황실 대군과 월서 대군은 북강 군대를 섬멸하고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그런데 제민의 말에 그들의 궁금증이 단숨에 풀려 버렸다.
월왕이 황제 폐하께 그리 저항한 것이 전부 북강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거야? 어쩐지 이상하더니만, 이런 사연이 있었군!
그제야 내내 마음을 졸이던 병사들도 전쟁이 끝났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 목숨이 날아가는 것에 기꺼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제민은 월왕을 따라 월서 군영으로 향했다. 군영 곳곳에 초소가 삼엄하게 설치돼 있었고, 수비 체계도 흠잡을 데 없이 질서정연했다.
제민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소인, 서릉으로 돌아가면 전하께 병법을 꼭 배워야겠습니다.”
“좋네. 언제라도 찾아오게.”
황실 병사들은 북강 포로들을 이끌고 월서 군영으로 향했다.
월왕의 반란이 북강을 치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 양쪽 군대는 금세 한데 섞여 어울렸다.
황실 병사들은 월서의 추위에 몸이 얼어붙어 콧물을 질질 흘리며, 감탄스러운 얼굴로 월서 병사들을 쳐다봤다.
“이런 곳에서 지내느라 고생이 많았겠수다.”
월서 병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별거 아니오. 옥계성은 그나마 살 만한 거요. 월서 고원에 못 가 봤겠지? 거긴 사시사철 눈이 녹질 않소. 기러기들이 뭣도 모르고 갔다가 머리가 얼어붙어 버리지.”
황실 병사의 입이 벌어졌다.
“이렇게 환경이 열악한데도 그리 잘 싸운 거요? 부끄럽소이다.”
“그래도 살 만하오. 처음에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지. 한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소. 전부 월왕비 마마 덕이오.”
“살 만하다 했소?”
황실 병사는 몰래 입을 샐룩거렸다. 월서 병사가 괜스레 허풍을 부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건량이라도 먹으면 다행일 터인데, 살 만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군영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에 입 안 가득 군침이 고였다.
황실 병사는 얼른 월서 병사의 갑옷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이게 무슨 냄새요? 월왕비 마마께 드리는 식사를 만드는 게요?”
“마마의 주방은 따로 있소. 전투를 마치고 왔으니 우리도 배는 채워야 할 것 아니오. 저기 부뚜막에 연기 피어오르는 거 보시오.”
황실 병사는 그만 넋이 나가 버렸다.
“대체 무슨 음식이기에?”
“궁금하면 좀 이따가 함께 먹읍시다. 아, 외부인한테는 식사를 주지 않지.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 아침밥을 배불리 먹어 지금은 그리 배가 고프지 않소. 이따 내 것을 나눠 먹는 건 어떻소?”
황실 병사는 내적 갈등이 일었다. 본래 거절하려 했으나 음식 냄새 때문에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거절의 말이 목구멍으로 꿀꺽 들어갔다.
“좋소. 그럼 체면 불고하고 신세 좀 지겠소.”
북강 포로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온 황실 병사가 월서 병사에게 어서 음식을 받으러 가라고 재촉했다. 꾸물거리다 밥이 동나기라도 할까 봐 퍽 초조한 듯했다.
월서 병사는 그가 많이 굶주린 줄로만 알고 얼른 제 몫의 음식을 받아 왔다.
“그릇도 가져왔으니 어서 들게나.”
월서 병사가 도자기 단지를 열고는 향이 진한 생강차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잡곡으로 빚은 찐빵 두 개도 건넸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황실 병사는 생강차의 향을 깊이 음미했다. 역시나 이 향이었다.
생강차는 기름에 볶아 만들어 황금빛을 띠었다. 거기에 적당히 볶은 고기에 밴 향긋한 불 향이 은근하게 올라왔다. 그걸 한 잔 들이켜니 뜨거운 기운이 배 속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설마…… 이걸 평소에 마시는 게요?”
“그렇소. 전투에 나갈 때는 이것만 마시면 금세 배가 꺼져서 건량도 함께 먹지. 기력이 있어야 적들도 죽일 것 아니오. 한데 이 생강차가 보양식은 보양식이오. 여기 병사들 중에도 빼빼 말랐다가 이걸 마시고 포동포동 살이 오른 녀석들이 적잖게 있소.”
황실 병사의 표정이 오묘해지는 걸 본 월서 병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설마 그쪽에는 생강차가 공급되지 않소?”
“있기야 있소. 딱 한 번. 그냥 먹을 만했지…….”
그가 마셨던 것도 생강차는 생강차였다. 하나 쌀가루로 만든 생강차에는 생강 잎이 가뭄에 콩 나듯 있었고, 고깃덩이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데 월서 병사들의 생강차는 자신이 예전에 마셨던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환상의 맛이었다.
그사이 월서 병사가 꿀꺽꿀꺽 생강차를 마시고는 트림까지 시원하게 뱉어냈다.
“예전에 성 공공이 계실 때는 너무 먹는다고 욕도 어지간히 먹었지. 월왕비 마마의 재산을 죄다 우리들이 탕진한다고 말이오. 말하고 보니 마마의 덕을 많이 봤네 그려.”
황실 병사는 더 우울해졌다. 이런 생강차라면 그들도 너도나도 앞다퉈 마셨을 것이다. 생강도, 고기도 듬뿍 담긴 생강차가 어디 흔하던가! 황실 병사는 시샘이 나서 배가 살살 아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