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고행길
* * *
사흘이 지났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목운요도 떠날 채비를 했다.
길가에 세워진 마차 옆에는 장공주와 허연한, 그리고 평상복을 입은 황제와 황후가 배웅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목운요가 다가오자 황후 민방화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월왕비…….”
미안한 마음만 앞서서 뭐라 위로해 줄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목운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후 마마, 괘념치 마세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계략일 뿐입니다.”
민방화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제 와서 말을 해 봐야 무슨 도움이 될까. 그저 마음속으로 안녕을 빌어 줄 뿐이었다.
“길이 험할 테니 각별히 조심하시게. 자네도, 아이도 무사해야 해.”
“네, 마마.”
한쪽에 선 황제는 미간을 좁힌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속으로만 월왕을 해한 자를 능지처참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목운요가 장공주와 허연한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외할머니, 어머니. 이제 떠나겠습니다.”
장공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가 내린 성지를 사서에게 전달했다.
“조심해야 한다.”
“네. 명심할게요.”
갈 길이 멀었다. 목운요는 금란, 금교, 그리고 사서와 사화를 대동한 채 마차에 올랐다. 이제 정말 마차가 떠날 차례였다.
한데 그때, 허연한이 마차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목운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
허연한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왜, 놀랐니?”
“어떻게…….”
“너를 말릴 수 없으니 이 어미가 같이 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더구나. 이미 네 외할머니와도 얘기가 된 일이란다. 널 무사히 데려오기로 했어.”
허연한이 더없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목운요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험한 여정일 거예요. 혹여 무리가 되실까 염려됩니다.”
“그런 걱정 말거라.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이보다 더한 고생도 숱하게 했어. 그런데도 우리 두 모녀가 잘 견뎌 오지 않았니. 지금은 호위 무사가 보호까지 해 주는데 힘들 게 뭐 있니? 그리고 난 네 어미야. 눈앞에 불바다가 펼쳐져도 너를 지키며 건널 거란다.”
무어라 입을 떼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목운요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단호하게 결심한 듯 행동했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월서에 도착할 때까지 월왕이 버텨 주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고된 여정에 배 속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심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평생 후회로 남을 짓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곁에 있으니 이제까지의 불안과 염려는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한한 용기가 피어났다.
허연한이 한 팔로 목운요를 끌어안고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마음 편히 먹으렴. 별일 없을 게야.”
마차가 떠나자 장공주는 행궁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와 황후도 그 뒤를 따랐다.
이내 황제는 절을 올리며 무거운 음성으로 사죄하였다.
“고모님, 이번 일은 전부 제 불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당황한 장공주는 얼른 황제를 일으켜 세웠다.
“폐하, 이 무슨 짓입니까?”
“월왕이 이런 위험에 빠질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장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월왕은 폐하의 아우지만 신하이기도 합니다. 폐하의 어명을 받들어 대력조의 안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마, 그리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좀 더 신중해야 했는데 너무 큰 모험을 감행한 것 같습니다. 다른 수를 썼더라면 월왕이 그런 위험에 놓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군자는 이미 결정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더욱이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황제입니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다 설령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건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황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애써 입을 다물었다. 죽음도 불사하며 자신을 도운 월왕에게 행동으로 직접 보답할 작정이었다.
* * *
시간이 하루하루 흘렀다.
목운요와 함께 객사에서 쉬던 허연한이 부드러운 손길로 딸아이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본래도 가느다란 다리가 며칠 새 더 야윈 듯했다.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이 막혔다고 하니 길이 뚫릴 때까지 이곳에서 쉬자꾸나.”
목운요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그사이 금란이 따뜻한 물을 가져와 목운요의 발을 씻겨 주며 안쓰러운 듯 말했다.
“마마, 살은 쪽 빠지셨는데 발은 너무 부었습니다.”
마차 의자를 아무리 푹신하게 덧대어도 장시간 이동하니 편할 리 없었다. 거기에 목운요는 홑몸도 아닌지라 발이 퉁퉁 부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는 허연한의 얼굴을 본 목운요가 제 발을 가져와 손가락으로 꾹꾹 찔렀다. 그러자 부은 발에 작은 웅덩이 두 개가 생겼다.
목운요는 허연한에게 제 발을 쓱 보여 주며 개구쟁이처럼 말했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허연한은 퉁퉁 부은 발에 사람 눈처럼 나 버린 두 개의 구멍을 보곤 피식 웃었다.
“곧 어미가 될 사람이 이런 장난이나 치고.”
“어머니 앞에서는 언제나 철부지 딸인걸요.”
“그래. 그러려무나.”
허연한이 목운요를 침상에 눕힌 뒤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푹 자렴. 일어날 때쯤이면 눈도 그치겠지. 그때 떠나자꾸나.”
“네.”
눈을 감은 목운요는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월왕이 혼절한 뒤, 황실 군대와 월서 군대는 치열한 격돌을 벌였다.
그런데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몰라도 반란을 꾀한 월왕이 천벌을 받아 곧 죽게 생겼다는 말이 떠돌았다.
이 불길한 소문에 월서의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우항은 그간 하루도 빠짐없이 월왕에게 해독제와 묽은 죽을 먹이며 그의 목숨을 지켜 내고 있었다. 하지만 우항의 노력에도 월왕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이대로 간다면 정말이지 며칠 버티기도 힘들 것 같았다.
우의가 막사 장막을 걷고 들어오며 어깨에 수북이 쌓인 눈을 털어 냈다.
“전하는?”
우항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로야. 차도가 없으시네. 전하께 온 전갈은 없어?”
“눈이 무섭게 내려서 늦어지고 있는 듯해. 근 십 년 동안 이런 눈은 처음이네.”
폭설 때문에 고역인 건 북강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군영에 떠도는 얘기를 조속히 잠재워야 해. 당장 장군들을 소집해서 병사들 단속을 당부하는 게 좋겠어.”
“그래.”
그때, 막사 밖에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룁니다. 밖에 여인 하나와 사내 하나가 와 있습니다. 여자 이름은 선령이고, 남자는 소익이라 합니다.”
우항과 우의가 눈을 번쩍이며 황급히 달려 나갔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이가 드디어 온 것이다!
선령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안색이 멀쩡한 우항과 우의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월왕이 아직 목숨 줄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한편 우항은 의아한 눈초리로 선령과 함께 온 사내를 쳐다봤다.
선령이 눈치껏 대답했다.
“제 사제 소익입니다. 믿을 만한 녀석이죠.”
“우선 들어오시죠.”
선령은 막사로 가는 내내 월왕에게 무슨 약재를 썼는지, 식사는 무얼 했는지, 어떻게 중독이 됐으며 증상은 어떠한지를 세세하게 질문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았다. 증상이 너무 희귀했기 때문이다.
막사 안의 월왕은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정신을 잃은 이후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한 터라 몸은 여윌 대로 여위었고, 양 볼도 푹 꺼져 있었다.
선령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월왕의 손목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잠을 잘 때처럼 맥이 묵직하고 느렸다.
우항이 조급한 나머지 재촉하듯 물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상처부터 확인하죠.”
월왕의 옷을 열어젖힌 선령의 미간이 일순 찌푸려졌다.
“비녀에 찔린 겁니까?”
“맞습니다. 독 가루를 비녀 자루에 넣어 놨더군요. 비녀에 찔린 상처가 검게 변하더니 탁한 피가 계속 흐릅니다. 태의가 독을 빼냈는데도 차도가 없어요.”
“그 비녀는요?”
“여기 있습니다.”
우의가 비녀를 선령에게 건넸다.
비녀를 살펴본 선령의 표정이 구겨졌다.
“대체 무슨 독에 중독되신 겁니까?”
“독에 중독되신 게 아닌 듯합니다.”
“독이 아니라고요? 그럼 대체 왜 깨어나질 못하십니까?”
우항은 속이 타들어 갔다. 선령의 의술은 대력조 제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어두우니 이제 정말 가망이 없는 건가 싶어 막막하기만 했다.
“독충인 듯합니다.”
선령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월왕의 맥만 봤을 때는 독에 중독됐다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상처를 보니 의학 서적에서 봤던 기록이 불현듯 떠올랐다.
“독충이요?”
우항이 놀라 되물었다.
“남려족은 이미 멸망하지 않았습니까? 독충도 그때 함께 완전히 박멸됐을 텐데요.”
“그래도 살아남은 것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하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선령이 결연한 표정으로 답을 줬다.
“저 혼자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월왕비께서 당도하시면 구전금침으로 혈맥을 막은 뒤 약재를 써서 독충을 빼내야 합니다.”
“비 마마요?”
우항과 우의는 심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월왕비 마마께서도 오십니까?”
선령이 그들을 노려봤다.
“두 사람이 서신을 보내 놓고 놀라는 겁니까? 그 때문에 월왕비께서 오시는 것 아닙니까?”
월왕의 생명이 위독해서 내린 결정인 만큼 그 둘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서신을 읽은 목운요가 절망에 휩싸였던 모습만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었다.
우항과 우의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월왕비마저 위험한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