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일촉즉발의 상황
그렇게 일각쯤 지났을까. 월왕이 차도를 보였다. 시퍼렇던 입술도 제 빛깔을 찾았고, 호흡도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은 아직도 혼미한 상태였다.
우항이 황급히 곁에 서 있는 태의를 불렀다.
“어찌 된 일입니까? 해독제가 말을 듣는 것 아니었습니까?”
태의가 월왕의 맥을 짚어 보았다.
“해독제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 독이 너무 강해 이걸로는 완전히 제거가 힘든 듯합니다.”
“그럼 한 알을 더 먹여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 보지요.”
우항은 월왕의 입을 벌리고 환약을 한 알 더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이각이 지나도록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태의는 심장이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 몇 차례나 진맥을 한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의술이 더 높은 의원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독에 능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서릉에 선령이라는 이가 독에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자를 불러오시면 전하의 독을 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녀에 찔린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고, 그 주변 살갗도 검게 물든 상태였다. 다른 해독제를 써 봐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결국 우의는 월왕을 막사 안으로 들어 옮긴 뒤 다시 허기를 심문했다.
그러나 아무리 형벌의 수위를 높여도 허기는 비녀에 담긴 게 어떤 독인지 정녕 모르는 듯했다.
* * *
깊은 밤, 조용한 군영의 분위기는 더없이 무거웠다.
잠시간 고민을 하던 우항이 붓을 들어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그에 우의가 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누구에게 쓰려는 거야?”
“상황이 심각해. 폐하와 장공주 전하, 그리고 월왕비 마마께 알려야 한다고.”
“월왕비 마마는 회임 중이시잖아!”
우의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하지만 우항은 결심이 선 듯 입에 힘을 줬다.
“나도 알아. 하지만 월왕비 마마만이 전하를 구할 수 있어.”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우의는 굳은 표정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월왕과 월왕비는 부부간의 정이 남달랐다. 월왕의 변고를 들은 월왕비는 열 일 제쳐 두고 월서로 향할 텐데, 회임한 몸으로 경황없이 움직이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들은 갚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셈이었다.
“그럼 월왕비께 알리는 것 말고 좋은 수가 있어?”
북강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고, 계획은 가장 중요한 시점에 와 있었다. 마무리만 잘하면 성공이 코앞인데 월왕이 쓰러지고 말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우의는 침상에 누워 있는 월왕을 바라봤다. 잠시 말없이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쓸게. 난 어차피 혈혈단신이잖아. 전하께서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으면 그만이야.”
“우의, 자네!”
“자네에겐 금란이 있잖나. 이 서신을 쓴 걸 알면 금란이 가만히 있겠나? 자네와 상종도 안 할 걸세.”
우항이 무어라 항의하려는데, 우의는 이미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월왕의 심복이 서신을 품고 행궁으로 향하자, 우항은 의구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우의, 허기 말이 사실일까?”
“뭐가? 월왕비 마마께서 회임하지 않으셨다는 것?”
“월왕비 마마께서 그걸 알아채지 못하셨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나도 그래. 혹 복용하셨다면 분명히 이상을 눈치채셨을 거야.”
상황이 이리되고 보니 우항은 몹시 한스러웠다.
“정말 상상도 못 했어. 평소에 그리 얌전하던 허기가 이런 흉측한 짓을 꾸밀 줄이야. 미리 알았으면 진즉에 없애 버렸을 텐데.”
“허기를 잘 감시하라고 일러뒀어. 전하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살려 둬야 해. 반응을 보니 비녀에 독이 든 걸 몰랐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누군가 배후에서 몰래 조작을 했다는 거 아니겠어?”
우항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기가 누구와 접촉했는지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볼게.”
“가임초와 미약을 언급하는 걸 보면 북강이 깊이 연루된 것 같아. 일단 북강 쪽부터 조사해 보는 게 좋겠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육냥에게도 연락을 취해 보지.”
“조용히 움직이자고. 전하께서 쓰러지신 일이 새어 나가면 북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하지만 북강은 이미 월왕의 상황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잔뜩 흥분한 혁련저가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전하, 정말 절묘한 계책이었습니다. 허기 따위가 월왕을 쓰러뜨리다니요!”
북강 왕 혁련엽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근래 줄곧 긴장에 휩싸였었는데, 잠시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이리 순조롭게 풀릴 줄은 몰랐네. 전부 담 아우가 치밀하게 전략을 짠 덕분이야.”
혁련담은 고개를 저었다.
“도오가 미리 첩자를 심어 두어 가능했습니다. 여인이, 특히 사랑에 빠진 여인이 한을 품으면 귀신보다도 무서운 법이지요. 다만 혁련역지 쪽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남릉과 혼약을 맺은 혁련역지는 그녀를 대신해 죽는 것도 마다치 않았었다. 그가 노예로 팔려 간 것도 남릉이 큰 이유였다.
하지만 남릉을 다시 마주한 혁련역지는 다짜고짜 그녀의 목을 베었다. 인정사정없는 칼부림이었다.
북강 왕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 녀석은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 큰 골칫거리인 월왕을 처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이제는 저 아우가 나설 차례인가?”
혁련저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월서를 짓밟아 놓고 오겠습니다.”
“절대 상대를 얕봐서는 안 돼. 월서 대군은 평범한 병사들과는 달라. 방심하면 크게 당하는 수가 있어.”
“네, 깔끔하게 이겨서 승전보를 갖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혁련담이 돌연 입을 열었다.
“전하, 저 형님. 제게 좋은 수가 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게 뭔가? 말해 보게.”
“저희가 황제와 월왕 모두에게 의탁 서신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월서를 치고 들어가면 의심부터 할 것입니다. 월서 지역을 함락해도 황제가 점령을 윤허할지 의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황실 병사로 위장을 해서 월서 쪽을 살살 건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실과 월서 사이의 원한을 키운 뒤에 계획대로 어부지리나 누리면 어떨는지요.”
“거 좋은 수로군.”
* * *
북강 왕은 졸병 한 무리를 황실 병사로 변장시켜 야심한 시각 옥계성으로 침투시켰다. 수비병들을 죽이고 성문에 불까지 지르는 대담한 도발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월서의 장군들이 곧장 월왕을 뵙기를 청했지만 우항과 우의에게 가로막혔다.
“왜 전하를 뵙지 못하게 하는 겁니까?”
월왕이 중독돼 혼절했다는 건 중대한 사건이었다. 끝까지 숨길 수는 없을지라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군사들에게 소식이 들어가면 분명 군심이 동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항과 우의는 장군들을 조심스레 막사 안으로 안내했다.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월왕을 발견한 이들이 크게 노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대체 누굽니까? 북강 놈들이 자객이라도 보낸 겁니까?”
우항이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허기입니다. 누군가가 허기를 이용해서 전하를 공격했습니다. 다행히 월왕비께서 주신 해독제를 사용해 일단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하나 북강이 쳐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장군들,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위기를 이겨 냅시다.”
“월왕 전하를 위해서라면 이까짓 목숨은 아깝지도 않습니다.”
“좋습니다. 전하께서 미리 작전은 짜 두셨으니 그대로만 움직이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허기는요? 당장 죽여서 죄를 치르게 합시다.”
우항이 흥분한 듯한 장군들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허기는 붙잡아 뒀습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진 그냥 두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은 장공주 전하와 월왕비 마마로부터 소식이 올 때까지 상황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리고 북강이 기습하지 못하도록 삼엄한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장군들은 작전의 가닥이 잡혔는지 수하들에게 지시하기 위해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사이 월왕의 맥을 집중해서 짚던 태의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우항은 크게 실망하였다.
* * *
변경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반란을 도모하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월서에서도, 황실에서도, 극소수의 측근들이 극비리에 연극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대다수 사람들은 이 모든 분란이 거짓인 걸 알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황실 병사로 보이는 이들이 월서를 급습하자, 월서 군영에는 팽배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최대한 전투가 크게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우항과 우의가 애를 썼지만 전투는 그 뒤로도 몇 차례나 벌어졌고, 양 진영 사이의 갈등은 점차 깊어져만 갔다.
그즈음 능서행궁의 목운요는 딴 곳에 정신이 팔린 듯 느릿느릿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평소 빠르게 장부를 확인하던 그녀의 모습과는 몹시 달랐다.
금란이 가져온 간식을 한쪽에 내려놓고는 목운요에게 권했다.
“비 마마, 좀 드시고 하세요. 장부는 나중에 보시고요.”
벌써 목운요는 열흘 넘게 이 상태였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없었고, 일에도 영 집중을 못 했다.
그 모습에 선령은 혹여나 또 환각제에 중독된 건 아닌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환각제가 원인은 아니었다.
목운요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금란에게 물었다.
“사야의 소식은 없나요?”
“마마, 소식이 도착하려면 시일이 걸리잖아요.”
“……그렇죠. 한데 왜 이리 마음이 불안한지 모르겠어요.”
목운요가 제 배를 쓰다듬었다. 배 속에서 부드러운 발길질이 느껴졌다. 입꼬리가 올라간 목운요는 찰나지만 행복해 보였다.
“아이를 가진 여인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마마께서도 회임을 하셨으니 걱정이 늘어나는 건 정상입니다. 월왕 전하께서는 분명 잘 지내고 계실 거예요.”
금란이 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을 달랬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미소 지은 목운요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작이 확연히 둔해져 있었다.
금란과 금교가 얼른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비 마마, 산책이라도 하시려고요?”
“네. 종일 방에만 있으려니 따분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