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원한이 차오르다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던 허기가 차츰 냉정을 되찾았는지 입을 열었다.
“소녀를 아껴 주신 그분께는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 오랜 시간 품어 온 연정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 월왕비 마마에 비하면 소녀는 미모도, 지혜도 보잘것없습니다. 하지만 전하 곁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전하를 모시고 전장에 오를 수 있습니다. 전하와 함께 황실의 압박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월왕이 냉소를 머금었다.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목운요의 노고가 깃들어 있었다. 목운요가 그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 허기는 모를 것이다. 목운요가 없다면 그의 존재도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을 말이다.
월왕이 냉정하게 뒤돌자 허기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녀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장공주 전하는 몰라도 목운요가 죽는 것까지 모른 척하실 수 있습니까?!”
월왕이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사나움을 넘어서 살기가 이글이글했다.
“지금 뭐라 지껄이는 것이냐?”
이미 뱉어 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허기가 깊게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전하의 추측이 맞습니다. 목운요에게 환각제를 쓴 게 바로 접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소녀에게는 환각제뿐 아니라 회임을 한 것처럼 맥을 바꾸는 약초도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목운요가 회임한 시점이 너무도 절묘했잖습니까?”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략이 먹히지 않으니 이제는 충격 요법으로 강하게 나갈 차례였다. 좋아하는 사람을 얻지 못할 바에야 평생 잊히지 않는 사람이라도 되고 싶었다.
월왕이 곧장 다가가 허기의 목을 틀어잡았다.
“감히 운요에게 손을 대?”
허기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하지만 입을 멈추진 않았다.
“지금 절 죽이면, 목운요도 절대 무사하지 못합니다.”
“또 한 짓이 있으면 죄다 고하라. 당장 말해!”
“컥컥…….”
허기가 기침을 토했다.
“소우의가 거짓 회임을 한 걸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눈치를 못 채다니. 목운요는 임신하지 않았어요. 내가 준 약초를 먹은 것뿐입니다.”
“말도 안 돼.”
“제 의술만 믿고 자신만만한 목운요의 꼴이 우스웠어요. 한데 옆에서 지켜보니 장공주와 제 어미 앞에서는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더군요. 나는 장공주가 아끼는 사람이라 공주부에 손쉽게 드나들었고요. 손을 쓰는 게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죠.”
“또 거짓을 말하는구나.”
착 가라앉은 월왕이 검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년 말대로 그녀에게 가임초를 썼다면, 환각제까지 또 쓸 이유가 없다.”
허기가 스산하게 웃었다.
“이유가 없다니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가임초와 환각제가 만나면 더 재밌는 일이 벌어지거든요. 원래 열 달이 지나면 가임초가 약효를 다하고 사라지면서 고여 있던 피가 나옵니다. 한데 환각제를 같이 쓰면 지혈이 되지 않아 피를 흘리다 죽고 말죠.”
“당장, 죽여 버리겠다.”
월왕의 눈에 핏대가 섰다. 그 말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녀를 살려 둘 수가 없었다.
목이 졸린 허기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악이 받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살아야 목운요도 살 수 있어. 하나 날 죽이면 목운요도 결국 무덤으로 가게 될 거야.”
월왕이 험악한 얼굴로 허기를 노려봤다. 그의 손이 허기의 목을 더 세게 졸랐다. 금방이라도 목이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이제 죽는구나 싶어 허기가 체념하던 그때, 월왕이 그녀의 목을 휙 뿌리쳤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손을 꼼꼼히 닦아 냈다.
“해독제는 어디 있지?”
더없이 냉담한 표정을 한 그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었다. 허기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걸 가까스로 해내는 듯 목소리에서 증오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컥컥…….”
허기가 목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고르지 않은 숨을 겨우겨우 내쉬며, 바람이 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말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월왕이 우항에게 손짓했다.
“저년을 끌고 가서 형틀에 묶어라.”
허기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를 고문하시겠다? 나를 고문하면 죽으면 죽었지, 해독제가 있는 곳은 밝히지 않을 것이다.”
월왕이 비릿하게 웃었다.
“죽어도 이실직고하지 못한다 하였느냐? 고문을 받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보자. 끌고 가라.”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도 참아 내지 못하는 게 고문이었다. 그런데 일개 규방의 처자가 견뎌 낼 리 만무했다.
우항이 즉시 병사 둘을 호출했다. 그들은 허기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꾸물대다가는 심기가 몹시 불편한 월왕의 칼이 목으로 날아들 것이다.
한편 월왕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목운요가 걱정돼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내팽개치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한 시진쯤 지나자 우의가 상황을 보고해 왔다.
“전하, 허기가 전부 자백하겠다고 합니다. 대신 전하께서 직접 오셔야 해독제가 있는 곳을 밝히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월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형장으로 향했다.
기둥에 묶여 있는 허기의 온몸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화선지처럼 창백한 얼굴을 푹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혼절한 듯했다.
처참한 지경으로 고문을 당한 허기를 보고도 월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정신이 들도록 찬물을 부어라.”
“네.”
우의가 옆에 있는 통에서 살얼음이 낀 냉수를 퍼서는 허기에게 들이부었다.
허기가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곧이어 숨을 헐떡거리면서 연신 기침을 했다.
“이제 해독제가 있는 곳을 고하거라.”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월왕을 바라보는 허기의 눈빛에서 미움과 공포가 동시에 스쳤다.
“다른 사람들을 물리세요. 단둘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아직 수작 부릴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덜 혼난 게로구나.”
“아니면 당장 혀를 깨물고 자결할 겁니다. 그럼 목운요를 살리지 못할 텐데요.”
허기의 눈빛은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월서로 오는 내내 월왕과의 재회를 수도 없이 상상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놀랄까? 기뻐할까? 그도 아니면 가엾게 여길까?
물론 데면데면하게 그녀를 맞이할 월왕도 염두에 두었었다. 그때를 대비해 마음을 열게 할 대사까지 부단히 연습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상황을 상상했지만 월왕이 실제로 보인 반응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적으로 치부했고, 가혹한 고문까지 내렸다.
이에 월왕에게 품었던 아름다운 상상들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대신 뼛속 깊은 곳에서 원한이 끓어올랐다.
월왕은 하는 수 없이 우항과 우의에게 물러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이제 말해라. 두 번 묻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허기가 월왕의 수려한 얼굴을 바라봤다. 다시금 그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왔다.
“대체 왜, 왜 목운요한테만 그리 다정하고, 상냥하신 겁니까? 소녀에게는 내줄 마음이 조금도 없으신 겁니까?”
월왕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네가 월왕비가 아닌데 어찌 본 왕의 마음을 바라는 것이냐?”
“하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하나 소녀도 전하를 사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았어요. 지금껏 수많은 혼사를 물렸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강남으로 전하를 찾아갔어요. 제 정성이 가상하지도 않으십니까? 가엾어서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 있잖아요.”
그녀의 하소연에 월왕은 자세를 곧추세운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진정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감정은 더더욱 와닿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목운요 한 사람뿐이었고, 감정도 죄다 목운요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줄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기가 처량하게 웃었다. 자신의 처지가 애처로웠고, 월왕의 냉담함이 미웠다.
“해독제는 내 몸에 지니고 있어요. 풀어 주면 드리죠.”
월왕이 그녀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수작을 부릴 생각이라면 집어치워라. 더는 못 참는다.”
자꾸만 솟구치는 눈물을 참아 보려 허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쩔 수 없죠. 제 머리에 꽂은 비녀 안에 해독제가 있으니 직접 가져가세요.”
월왕이 허기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장식한 비녀를 빼냈다. 비녀를 돌리니 비녀 몸체 안에 백색 가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걸 자세히 살피려는데 진한 향이 코로 끼쳐 오며 정신이 어질해졌다.
허기는 이 틈에 재빨리 월왕이 들고 있는 비녀를 발로 걷어찼다. 월왕의 손가락을 베고 떨어진 비녀가 그의 가슴에 박혔다.
월왕은 낮은 신음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소리를 질러 우항을 부르려 했지만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도무지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쓰러진 월왕을 보고 더 기함을 한 건 허기였다. 그녀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 이건 미약인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와 보세요, 빨리요!”
다급한 부름에 달려온 우항과 우의는 바닥에 쓰러진 월왕을 보고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전하!”
“가서 태의를 불러오겠다.”
우항이 태의를 찾아 곧장 밖으로 내달렸다.
우의는 월왕을 의자에 앉히고는 채찍을 뽑아 허기에게 휘둘렀다.
“전하께 무슨 독을 쓴 것이냐!”
“으윽…….”
계속되는 매질에 허기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나, 나도 모릅니다. 자업자득이겠지요. 나는 모르는 일…….”
태의는 금방 당도했다. 월왕의 상태부터 살핀 그가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다.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하나 어떤 독인지, 소인도…… 소인도 알지 못합니다.”
그에 우항이 품에 소지하고 있던 환약을 꺼냈다.
“월왕비께서 챙겨 주신 해독제입니다. 거의 모든 독에 효과가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겠습니까?”
태의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로 말했다.
“월왕비께서 주신 거라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 드려 보시지요.”
월왕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우항은 더 지체하지 않았다. 어금니를 깨물고 해독제를 그의 입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