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허기의 진짜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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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계획을 지시한 월왕은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때, 우항이 식사를 가져왔다.
“전하, 식사하십시오.”
근래 들어 월왕은 늦은 밤까지 격무에 시달렸다. 얼굴은 항시 긴장돼 있었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늘 초조한 모양새로 ‘어서.’, ‘서둘러.’를 입버릇처럼 말했다.
눈을 뜬 월왕의 눈에 실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월왕비에게서 온 서신이 있느냐?”
“아직 도착한 게 없습니다.”
눈빛에 잠시 실망감이 스쳐 간 월왕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소식이 오면 즉시 알리도록 해. 그리고 요즘 역병 치료제를 구한 북강의 상황이 나아지고 있어. 놈들이 기습해 올지 모르니 병사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게.”
“네, 알겠습니다.”
“황실 상황은 어떠한가?”
“폐하께서 군대를 또 파병하셨습니다. 아마 이 주 후면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북강이 폐하께 의탁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아주 흔쾌히 승낙하셨고요. 북강에게 연합해서 월서 대군을 전멸시키자는 암시를 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북강을 언급할 때마다 우항의 말투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쥐처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놈들이었다.
“당장 폐하게 서신을 보내거라. 북강이 완전히 기를 펴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말이야. 지금이 바로 적시다.”
“알겠습니다.”
우항이 물러나자, 월왕은 품에서 향낭을 꺼냈다. 그리움을 가득 담아 향낭을 한참이나 쓰다듬던 그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 어느새 눈빛도 온화해져 있었다.
‘요아, 우리 배 속의 아이도 벌써 여섯 달이 되었겠지. 금방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조했건만, 지키지 못할 말을 해서 미안하구나…….’
월왕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군영에서 올라온 상주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는 월왕에게 우항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전하, 허기 소저가 왔습니다.”
“뭐라고?”
“허비의 여식 말입니다.”
월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자가 여긴 무슨 일로?”
“그건…… 소인도 모르는 일입니다. 군영 밖에서 서성이다가 순찰을 돌던 병사한테 잡혀 온 모양입니다.”
월왕의 얼굴에 경계심이 어렸다.
“군영은 중요한 곳이네. 아무나 들어올 수 없어. 사람을 시켜 돌려보내도록 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답을 한 우항이 큰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
월왕의 처소를 나오자마자 장군이 우항에게 물었다.
“우항, 전하께서는 뭐라 하시나?”
“무엇을?”
“저 소저를 어떻게 하란 말씀은 없으셨나?”
장군이 눈을 찡끗거리며 물었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는 월왕은 수하의 병사들을 각별히 아꼈다. 그래서 모두가 월왕을 크게 무서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미모의 여인이 월왕을 찾아왔다고 하자 장군들이 구경거리가 없을까 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우항은 눈을 부릅뜨고 경고했다.
“허튼소리 할 생각 말게. 전하께서 월왕비 마마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모르는 건가? 입 함부로 놀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거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네. 그 먼 곳에서 월서까지 왔는데 정성이 갸륵하잖아.”
“월왕비께서 매달 보내 주시는 생강차 덕분에 얼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나? 월왕비께 죄송하지도 않아?”
우항의 말투에는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었다.
월서로 오기 전, 금란은 월왕을 잘 감시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허기 때문에 괜한 분란이 생기면 잔뜩 성이 난 금란을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 결코 안 될 일이었다.
“말도 못 하나? 월왕비 마마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네.”
“이상한 데 정신 팔지 말고 어서 훈련이나 하게. 그리고 전하께서 그 소저를 돌려보내라고 명하셨어.”
“돌려보내? 어디로 말인가?”
“온 곳으로 말이네. 멍청하긴.”
“아.”
하지만 허기를 만나러 간 우항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애원하듯 말했다.
“우항, 전하께서 날 보기 싫어하시는 걸 잘 알아요. 하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우항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허 소저,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오. 거기다 전하께서는 조정과 척을 지고 있지 않소. 소저 부친께서 조정의 대신으로 있는 마당에 어찌 찾아온 것이오. 그 연유가 어찌 됐든 간에 소저 부친에게도, 허씨 가문에도 좋을 게 없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전하를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한다고요. 제발 아뢰어 주세요.”
“그리 다급한 일이면 서신을 쓰시오. 그럼 전해는 드리리다.”
“그건 안 돼요. 뵙고 말씀드려야 해요. 월왕비 마마와…… 관련된 일이에요.”
우항이 미간을 좁히며, 허기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내기 위해 그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마마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왜 허 소저를 보낸 것이오?”
“마마께서 모든 일을 서신으로 써 보내시지는 않습니다. 전하께 심려를 끼쳐 드리지 않으시려고요. 그러니 저라도 직접 뵙고 말씀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참말입니다.”
허기의 낯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주저하던 우항이 옆에 있는 병사에게 지시했다.
“허 소저를 잘 감시해라. 전하께 아뢰고 올 터이니.”
“네.”
군영 밖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던 허기는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월왕에게서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그는 꽁꽁 언 얼음처럼 차가웠다.
밤이고 낮이고 그리워하던 그가 앞에 나타나자 허기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까지 왈칵 쏟아졌다.
“전하…….”
월왕은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월왕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냐?”
허기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손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더 머뭇거리면 월왕이 분노할 것 같았다.
“비 마마께서 환각제에 중독되셨습니다. 음식도 못 넘기시고, 맥도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돼 알리지 않고 계십니다.”
월왕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환각제라 하였느냐? 범인은?”
“장공주 전하와 선령께서 행궁을 샅샅이 뒤졌지만 출처를 밝혀내지 못하셨습니다……. 월왕비 마마께서 회임까지 하신 터라 몸도 편치 않아 계속 울적해하십니다. 지금은 또 어떠하실는지…….”
월왕이 날카로운 시선을 허기에게 보내었다. 허기는 심장이 벌벌 떨렸다.
“한데 왜 네가 온 것이냐?”
“소녀…… 그저 월왕 전하를 뵙고 싶은 사사로운 마음에 이끌려…….”
입술을 깨문 허기가 눈에 힘을 주었다.
“사실 전하께만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우항은 내가 신임하는 측근이다. 우항이 듣지 못할 얘기는 없다.”
허기는 난처했지만 이 지경까지 온 이상 체면을 돌볼 처지가 아니었다.
“……전하를 사모합니다. 곁에 있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허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월왕의 눈빛은 잔물결도 없이 잔잔했다.
“그게 월서에 온 진짜 목적인 것이냐?”
“그러합니다. 소녀는 명분도, 지위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전하 곁에 있고만 싶습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허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월왕비 마마에 대한 전하의 마음을 잘 압니다. 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죠. 하나 상관없습니다. 감히 월왕비 마마를 상대로 몹쓸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전하를 볼 수 있는 곳에 머물며 제 식대로 전하를 보필하고 싶을 뿐입니다.”
월왕은 가만히 미간만 좁히고 있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허기가 소매에서 향낭을 하나 꺼냈다.
“전하, 이걸 기억하십니까?”
사용된 천은 낡아 보였고, 바늘땀도 들쑥날쑥 어설펐다. 위에 놓인 수도 조잡하기 그지없는 것이 딱 봐도 초보자의 솜씨였다.
“제가 밤을 새워 만들어 전하께 드렸던 것입니다. 물론 받지 않으셨지요…….”
월왕은 길게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그럼 내 뜻도 알겠구나. 한데 그걸 다시 꺼내는 이유가 무엇이냐? 설마하니 내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을 것 같아 그러느냐?”
허기는 마음이 아팠다. 그의 얼어붙은 표정이 조금이라도 녹길 바랐건만, 헛된 바람이었다. 그의 얼굴은 월서의 높은 산 위를 덮고 있는 눈과 같았다. 마음을 후벼 팔 정도로 차디찼다.
“전하, 소녀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실 수 없으십니까?”
“나를 좋아하니 월왕비에게 시기심이 일어났을 테지? 월왕비에게 환각제를 쓴 것이 네년이냐?”
허기가 황망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월왕의 눈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가 허기의 앞으로 다가가 짓씹듯 말했다.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월왕의 싸늘한 눈빛에 심장 박동이 수직 상승했다. 이제는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전하,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진실입니다. 전하를 사모하는 마음만큼이나 월왕비 마마의 인품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그런 몹쓸 짓을 하겠습니까?”
그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던 그때, 월왕이 시선을 옮기며 명했다.
“우항, 허기를 하옥하라. 면회는 금지다.”
허기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랫동안 월왕에게 연정을 품으며 그를 지켜봤었다. 그랬기에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에게 경계심을 품고 하옥까지 당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전하, 저희가 알고 지낸 정은 무시하신다고 하나, 설마하니 장공주 전하까지 잊은 건 아니시겠지요?”
월왕이 고개를 돌렸다.
“고모님을 염려했다면 네년이 애초에 여길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월왕은 허기와 개인적인 친분이 아예 없었다. 장공주를 뵈러 갔다가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허기는 자신이 목운요와 사랑해서 혼인한 것도 뻔히 알았다. 그런데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 월서까지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장공주를 터럭만큼이라도 생각했을까? 아니, 그럴 리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