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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424화 (424/442)

424화 사라진 허기

종일 바삐 다닌 탓에 목운요는 다리와 배가 영 욱신거렸다.

그 모습에 선령이 다가와 팔을 부축하고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괜찮아?”

“다섯 달이 되니 태동이 부쩍 늘었네.”

선령은 조심스럽게 배에 손을 얹어 보았다. 그런데 태동이 느껴지지 않자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가 날 싫어하나 봐.”

“게으른 녀석이라 자는 걸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 싫어해도 의모인 너는 좋아할 테니 걱정 마.”

그러자 선령이 기쁘게 웃으며 부드러운 손길로 목운요의 배를 어루만졌다.

“아가, 태어나면 이 의모가 좋은 것 많이 선물해 줄게. 다 자라서 어느 집 아가씨가 마음에 들면 얘기해. 내가 침실에 데려다 놓을 테니.”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 낸 목운요가 선령을 슬쩍 밀치며 나무랐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이 버릇 잘못 들어.”

“버릇을 잘못 들이긴, 아껴 줘도 모자랄 판인데. 요즘 세상에 착하기만 해서는 살아남지 못해. 조금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지. 넌 다 좋은데 그 마음 착한 게 문제야. 사람들한테 괴롭힘당하기 십상이라니까?”

불현듯 목운요에게 몰래 환각제를 썼던 허기가 떠올랐다. 허기를 생각하니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제 손에 잡히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리게 하겠다고 선령은 이를 박박 갈았다.

“그나저나 독을 새로 연구한다고 하지 않았어? 진전은 있고?”

독에 대한 주제가 나오자 선령의 눈이 번뜩였다.

“이야기한다는 걸 깜박했네. 거의 완성돼 가. 강에 풀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할 정도야. 언젠가 북강 놈들한테 써도 될 거야. 북강으로 흐르는 강이 전부 월서에서 흘러드는 거라고 들었어. 수원을 찾아서 거기에 독을 쏟아부으면-”

목운요가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그 독 연구는 그만둬.”

“왜? 북강을 처치하고 싶잖아. 이것만 풀면 북강을 무릎 꿇리는 건 식은 죽 먹기인데?”

“북강을 굴복시키고 싶지. 맞아. 그러나 너한테 죄업을 쌓게 할 마음은 추호도 없어.”

목운요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걷혔다.

“그러니 앞으로 그 연구는 그만둬.”

당황한 선령은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을 위하는 목운요의 진심이 느껴진 탓이었다.

“나는…… 아니야. 그만두라면 그만둬야지. 차라리 잘됐어. 배합도 까다롭고, 들어가는 약재도 귀해서 은자만 축냈는데. 이제 고생은 접고 매일 수양아들이나 보러 와야겠다. 크면 의술도 가르치고, 독술도 전수하고, 얼마나 좋아? 청출어람이라고, 나보다 실력이 더 뛰어날지 또 누가 알겠어?”

“그래.”

목운요가 그제야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시무시한 독만 연구하지 않는다면 무얼 지도해도 좋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사제가 왔는데 보러 가지도 않고 행궁 밖에 묵게 했다면서?”

그 말에 선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귀찮은 녀석이니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약선골도 없어져서 이제는 사제와 사저라고 부르기도 어색하다고.”

“듣기로는 그 사제가 아주 열정이 넘친다던데. 행궁에 못 들어오니 그 옆에 오두막을 짓는다나?”

선령이 이를 갈며 말했다.

“머저리 같은 놈! 금교, 금란, 마마를 모셔다드려. 난 가서 저놈 좀 손봐 줘야겠으니까. 감히 오두막을 지을 생각을 해? 정신이 나갔지, 아주. 욕을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도 아니고!”

그녀가 씩씩거리면서 떠나자, 금란이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듯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비 마마, 선령과 그 사제라는 사람하고 혹시…….”

“원래 이런 일은 본인만 모르는 법이죠. 금란도 이렇게 훤히 아는데 말이에요.”

목운요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소인이 보기엔 꼭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사이 같아요. 그리고 사제라는 사람의 무공이 높다는데 선령이 때리면 맞고만 있다니까요? 한번은 선령한테 맞아서 두 눈이 시퍼렇게 멍까지 들었어요. 얼마나 우스웠는지 몰라요.”

그에 금교가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항도 금란 언니한테 그러던데? 평소에는 그리 날렵한 사람이, 언니 앞에서는 손발이 얼어서 물 양동이 하나 나르면서도 절반은 흘리잖아.”

금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꾸 없는 말 지어낼래?”

“없는 말이라니?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건데? 비 마마, 북강 일이 해결되면 금란 언니와 우항의 혼례를 치러 주세요. 북강도 처치하고, 두 사람의 혼례도 올리고 겹경사잖아요. 정말 신나겠다!”

얼굴이 홍당무가 돼 버린 금란을 본 목운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요. 금교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있으면 숨기지 말고 얘기해요. 내 꼭 성사시켜 줄 테니.”

“에이, 소인은 평생 비 마마 곁을 지킬 거예요.”

* * *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운 목운요는 처소로 돌아가 오침에 들었다가, 한 시진이 지난 후에야 깨어났다.

나른하게 몸을 일으키는데 배에서 어렴풋하게 태동이 느껴졌다. 이를 놓칠세라 얼른 배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가, 어미다…….”

그녀의 말이 들렸는지 배 속 아이의 움직임이 더 커졌다. 배도 살짝 부풀어 오른 듯 보였다.

목운요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아이의 존재가 더없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눈에 차오르는 물기를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아가, 네 부친께서 네가 크는 걸 못 보니 얼마나 섭섭하실까. 부친께서는 우리를 지키려고 나쁜 사람들을 혼내러 가셨단다.”

태동을 느낀 뒤로, 목운요는 매일 아이와 이렇게 말을 나누었다. 그러면 마음속 답답함이 스르륵 사라지곤 했다.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목운요는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물었다.

“누가 왔느냐?”

사금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와 목운요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인, 월왕비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혹시 어머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사금이 입술을 깨물며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전해 드릴 일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했습니다.”

목운요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말해 보게.”

“분부를 받고 허씨 가문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는데, 바로 며칠 전에 허기가 실종됐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사금은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 감시하고 있었건만, 어느새 놓치고 만 것이다.

“어쩌다 행적을 놓친 것이지?”

“연주로 돌아간 뒤 허기가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감시하던 녀석이 방심했던 모양입니다. 큰비가 내려 무너진 인근 민가를 도우러 갔는데, 그사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목운요가 살며시 손을 제 배로 가져갔다.

“알겠다. 이 일은 어머니께 비밀로 하거라.”

“하나…… 부인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허기의 상황을 물으십니다.”

“어머니께 심려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 어머니께 아뢴다고 사라진 허기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괜한 걱정만 더해 드리는 게 아니겠나.”

“알겠습니다.”

사금이 물러가자 금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목운요를 쳐다봤다.

“월왕 전하의 일편단심을 마마께서도 잘 아시죠?”

“사야의 변심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허기의 배후가 마음에 걸릴 뿐.”

“배후요?”

“어릴 적부터 곱게만 컸을 허기가 그런 희귀한 환각제를 구한 것도 그렇고, 내 몸에 귀신같이 수를 쓴 것이 아무래도 냄새가 나요. 그리고 감시자를 방심하게 만들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어요. 이 어디 귀하게만 자란 아가씨가 할 행동인가요?”

그 말에 금란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그럼 혹여 허기가 월왕 전하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않나요?”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기 뒤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기를 사야가 있는 곳으로 보내려는 건 틀림없어요. 단순히 나와 사야의 관계를 깨뜨리려고 그 먼 길을 갈까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필시 더 큰 음모가 있을 테죠.”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나요?”

“필묵을 가져와요. 사야께 조심하라고 서신을 보내야겠어요. 최대한 허기보다 먼저 당도해야 해요.”

“네.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 * *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른 북강의 역병이 일시적으로나마 잡히자, 역모를 꾀하던 부족들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북강의 최북단, 즉 월서와 인접한 곳의 부족들은 힘을 합쳐 혁련역지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섰다.

월왕과 목운요의 도움으로 역병 치료제를 발 빠르게 구한 육냥 덕에 그를 따르는 부족들 중에는 사망자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육냥은 냉철한 성정과 더불어 남다른 수완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어 명성 또한 날로 높아졌다.

그 상황을 전해 들은 혁련저는 혁련역지를 죽여 버리겠다며 성화를 부렸다.

“전하, 그저 잡종 놈일 뿐입니다! 대력조에서 좀 살더니 사기 치는 법만 배웠나 봅니다. 그걸 믿고 겁도 없이 설치고 있어요. 병사 이천이면 놈에게 본때를 보이고도 남습니다!”

그에 북강 왕이 미간을 구겼다. 안색도 음울했다. 근래 들어 미간을 찌푸릴 일이 많아졌다. 순풍에 돛 단 듯 왕위에 올랐다고 기뻐했건만, 사소한 실수로 단단히 제 발등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저 아우, 혁련역지는 예전의 비실비실하던 녀석이 아니네. 수하에 거느리는 이는 적지만, 그중에 도화 부족이 있어. 예전에 몇 차례나 반란을 도모했던 부족이 아닌가. 그 무력이 만만치 않단 말일세.”

혁련저는 이를 힘껏 깨물었다. 그는 머리 쓰는 재주는 없어도 영 바보는 아니었다.

북강 왕이 도화 부족을 없애지 못한 건 그들의 막강한 무력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이 혁련역지와 한패가 되었다. 열불은 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따로 대책이 있으십니까?”

“정면으로 공격할 수는 없네. 우회 전술을 펴야 해. 담 아우에게 도오가 심어 놓은 세작을 투입하라고 이르게.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혁련저가 입을 실룩거렸다.

“한낱 여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인이라고 얕잡아 보면 안 되네. 여인들도 작정을 하면 사내 못지않아. 혁련역지에게는 이전에 혼약을 맺은 남릉을 보냈어. 월왕 일은 쉽게 풀릴 걸세. 곧 자신의 왕비를 지극정성으로 아낀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그게 약점이 되어 발목을 잡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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