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북강의 시커먼 속
“뭐?”
선령이 눈을 깜빡였다.
“말도 안 돼. 너도 의술을 익혔으니 이상한 게 있었다면 바로 알아챘을 텐데…….”
목운요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내 증상이 어디 알아채기 쉬운 환각제처럼 보였어?”
선령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다 목운요의 몸에 아직 환각제가 남아 있을까 싶어 황급히 그녀의 몸을 살폈다.
“전혀 예상치 못했어. 네 몸에 직접 약을 썼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장 가까운 곳은 방심하기 마련이지. 나 역시 증상이 나아지고서야 깨달았어.”
“대체 누가 이런 고약한 짓을 한 거지? 더욱이 네 몸에 직접 약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입을 굳게 다문 목운요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선령은 그 표정에서 누군가를 읽어 냈다.
“……설마 허기?”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이유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허기뿐이야.”
“당장 가서 조사해 볼게.”
선령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허기의 이름을 댄 것인데, 정말 범인일 줄이야. 진즉에 알았다면 입에 독을 처넣어 사태를 미연에 방지했을 것이다.
“확실해지기 전까진 아무에게도 발설하면 안 돼.”
“알겠어.”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근래 상황이 적힌 보고서를 빠르게 훑어 나갔다. 월왕이 역병 처방전을 육냥에게 넘겼으니 이제 은자를 벌어들일 차례였다.
이틀간 환각제의 흔적을 찾던 선령은 드디어 단서들을 잡아냈다.
“네 예상대로였어. 허기의 처소에서 환각제의 흔적을 발견했지 뭐야.”
목운요는 전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그쪽은 다른 이를 시켜서 마무리할게. 넌 다른 일을 좀 해 줬으면 해.”
“내가 도울 일이 뭔데?”
“전에 구해 놓으라고 했던 약재는 어떻게 됐어?”
선령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슬슬 북강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목운요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북강을 도울 역병 치료제를 만들려는 건데 곤경에 빠뜨리다니.”
“내가 말실수를 했네. 돕는 거지, 그럼. 그런데 어떻게 도울 작정인데?”
“지금 양쪽 군대가 전부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음모나 계략은 소용이 없지. 북강 왕족에게 거래를 제안할 거야. 나에게 당신들 병을 치료할 약재가 있으니 원한다면 은자를 내놓으라고.”
북강 왕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약재를 살 것이다. 혼란한 민심을 잡지 못하면 백성들이 그들을 찢어 죽일 판이었기 때문이다.
선령이 양손을 맞부딪혔다.
“좋은 생각이야. 이 얼마나 떳떳한 돈벌이야! 계획이 정해지면 알려 줘. 절대 실수 없이 처리할 테니까.”
* * *
목운요가 암암리에 계획을 세우는 사이, 대치하던 월서 군대와 황실 군대는 첫 번째 교전을 벌였다.
황실의 대군은 옥계성과 옥문성을 완전히 포위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도리어 매복에 걸려들어 병력만 속절없이 잃은 채 패퇴하였고, 이천 명의 병사는 포로로 붙잡혔다. 당분간은 전쟁을 치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게 패배하고 만 것이다.
한편, 역병 처방전을 확보한 육냥은 곧장 여러 장의 서신을 써서 북강의 각 부족에게 보냈다.
이에 북강 왕은 화가 나 펄쩍 뛰었다. 역병 처방전을 얻은 뒤 그걸 무기로 부족들을 완전히 굴복시킬 참이었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육냥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북강 왕은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급했다. 현재로선 분풀이를 할 여유가 없었다. 민심을 되찾으려면 처방전에 적힌 약재를 구하는 것이 시급했다.
처방전에 쓰이는 약재를 전부 구하지 못한다면 몇 가지 약재라도 몽땅 사들여 다른 이들도 필요한 약재를 구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명령을 수행하러 갔던 이가 얼마 안 돼 돌아왔다.
한데 그가 아뢰기를, 북강에 있는 약재의 상당 부분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단에서 싹 쓸어 갔으며, 가격까지 터무니없이 올라 살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쨍그랑!
북강 왕 혁련엽이 찻잔을 내동댕이쳤다. 그런데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탁자까지 뒤집어엎었다.
“이런 망할! 그동안 헛짓을 한 꼴이 아닌가! 계획대로 차근차근 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다른 놈들이 파 놓은 함정에서 멍청하게 놀아나고 있었어.”
옆에 서 있던 혁련저가 불같은 성미를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렸다.
“전하, 제가 진작부터 혁련역지를 살려 두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노예의 더러운 피를 받은 자식 놈인데 어디 떳떳한 짓을 하겠습니까? 보세요, 돌아오자마자 하는 짓을!”
반면 혁련담은 침착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혁련역지는 더 이상 우리가 멋대로 대하던 노예가 아닙니다. 이번에 역병 처방전을 구해 온 걸로 부족들 사이에서 명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아십니까? 사람을 죽일 때 죽이더라도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섣부르게 행동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나 혁련저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그가 불만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사람 죽이는 데 뭐 그리 명분을 따지나? 번거롭게 말이야.”
혁련담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었다. 행동만 앞서고 지략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혁련저에게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때, 북강 왕 혁련엽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대력조에 인재가 났구만. 상단을 이용해 약재를 사들일 생각을 하고 말이야. 이제는 백성들을 치료하려면 은자가 얼마나 들든 돈을 주고 약재를 사 와야 하네.”
“은자가 드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 약재를 갖고 장난질을 하는 게 정말 큰일이죠”
혁련저가 끼어들었다.
“약재로 수작을 부려 우리 북강을 물 먹이면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일 텐데요.”
“형님, 명성과 이익 둘 중 뭐가 더 중합니까?”
혁련담이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명예를 버려서 대력조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그까짓 것 똥통에도 처박을 수 있었다.
북강 왕이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담 아우는 좋은 수가 없나?”
“미리 약재를 사재기한 이의 목적은 돈, 아니면 우리 백성들의 목숨일 것입니다. 며칠 더 참고 기다려 보는 게 좋겠습니다. 누군가 접근을 해 오면 은자를 바쳐 약재를 손에 넣고, 그렇지 않으면 월왕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혁련엽이 생각을 이어 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하지.”
그러나 혁련저가 다시 반발하고 나섰다.
“그럼 대력조 놈들한테 은자를 갖다 바치는 꼴 아닙니까? 놈들이 얼씨구나 하고 입을 벌릴 텐데요.”
서로 눈길을 교환한 혁련엽과 혁련담의 얼굴에 진한 먹구름이 드리웠다.
“대력조도 지금 내부가 순탄치는 않아. 지금은 우리가 은자를 바치지만, 곧 이자까지 쳐서 토해 내야 할 거야. 담 아우, 대력조 황제와 월왕 양쪽에 의탁할 테니 도움을 달라고 연락을 취하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혁련저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전하, 우리가 언제부터 남한테 붙어서 목숨을 부지했습니까?”
“저 아우, 머리 쓰는 법 좀 배우게. 정치는 힘만 갖고 풀리는 게 아니야. 지금 대력조는 내분이 일고 있어. 그 둘의 싸움을 구경하다 우리는 어부지리로 이득만 보면 돼. 의탁이든 뭐든 말로는 못 할 게 뭐가 있나. 저들이 경계를 늦추고 방심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지. 때가 되면 자연히 길이 열릴 걸세.”
양쪽에 몸을 낮추면서 동시에 그들을 이용한다. 대력조 황실과 월왕이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면 제일 먼저 득을 보는 건 북강일 터였다.
“알겠습니다. 전 그만 돌아가서 군사나 훈련시켜야겠습니다. 전하, 제 수하의 기병들이 피를 묻히지 못한 지 한참이 됐습니다. 몸을 풀 때가 됐다고요.”
“걱정 말게. 곧 그때가 올 걸세.”
* * *
의탁을 알리는 북강의 서신이 도착했다. 하지만 월왕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한쪽에 휙 던져 놓았다.
“다른 소식은 없는가?”
“월왕비 마마께서 보내신 서신이 막 도착했습니다.”
월왕은 화색이 만면하여 우항이 건넨 서신을 얼른 받아 들었다. 겉에 적힌 친숙한 필체를 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요아의 서체가 날이 갈수록 수려해지는군.”
내용을 정독한 월왕은 서신을 소중히 품에 넣은 뒤 우항에게 분부했다.
“상단에게 움직이도록 명해라. 북강 놈들한테 제대로 한번 뜯어내야겠군. 하나 필히 조심하라고 당부하도록. 약재는 잃어도,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보호하거라.”
“알겠습니다.”
우항의 눈이 번쩍였다. 그동안 몸이 간지러워 못 살 지경이었는데 드디어 제 솜씨를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보름 뒤, 북강에서 보낸 은자, 보석 등이 운반되었다.
선령은 행궁으로 끝없이 들어오는 행렬에 놀란 숨을 내쉬었다.
“약재가 이리도 값이 나간다고?”
“예전 같으면 하찮은 물건이지. 하나 지금은 북강에게 팔잖아? 값을 좀 높게 불러서 안 될 게 없지.”
그에 선령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무섭다, 무서워.”
앞으로도 절대 목운요를 적으로 둬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선령이었다.
목운요는 그런 선령의 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적을 대할 때는 모름지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해. 우리가 열세에 처하면 북강은 우리보다 더 잔혹하게 나올 거야.”
“아예 약재를 팔지 않아도 되잖아. 역병을 고치지 못하면 북강은 알아서 자멸할 테니까.”
목운요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북강이 진정 다급해지면 제 나라의 역병을 대력조에 퍼트리거나, 마지막 한 가닥 힘까지 짜내서 우리를 압박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모두에게 악수일 뿐이야.”
그러니 눈앞의 기회를 이용해 역병 처방전을 최대한 써먹는 것이 현명했다.
“듣고 보니 그렇군. 북강 사람들은 성격이 포악하기로 유명하니. 북강에 잡혀간 사람들 중에 멀쩡히 살아남은 이가 드물다던데, 놈들이 막무가내로 침범해 오면 엄청난 목숨이 희생되겠지.”
그에 빙그레 웃은 목운요가 고개를 돌려 장부에 은자를 기록한 뒤 행궁 창고에 옮겨 놓으라고 분부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