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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422화 (422/442)

422화 단서를 찾다

한편, 월서의 월왕부에서는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우항과 우의는 앞에 앉은 이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 놀란 기색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들이 마주한 이는 육냥, 엄밀히는 북강의 왕자 혁련역지였다.

마른 체구에 차가운 눈빛을 머금은 그에게서는 스산함 내지는 고고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말없이 앉아만 있어도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월왕만큼 강했다.

일찍이 그들이 알던, 월왕비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육냥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도 낯선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월왕은 우항과 우의를 물리고는 육냥을 바라봤다.

“육냥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북강 육왕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고개를 들어 올린 육냥은 미동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뗐다.

“월왕 전하와 한 가지 거래를 논하려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육왕자라고 불러야겠군. 한데 어떤 거래를 말하는 겐가?”

육냥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역병 처방전이 필요합니다. 약이 북강에서 제대로 효험을 보이면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군마 천 필과 무기 삼천 개를 드리죠.”

“그 두 배로 준다면 처방전을 내주지. 그게 불가능하면 북강 왕에게 계속 사정하라 하게. 황제가 자비를 베풀어 치료법을 내줄지도 모르니.”

육낭의 표정이 구겨졌다.

“최대 삼 할까지 더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오 할. 아니면 돌아가게.”

“좋습니다.”

월왕이 만족스레 웃으며, 우항에게 역병 처방전이 적힌 문서를 내주라고 일렀다.

육냥은 문서를 함께 온 호위에게 건네곤 몸을 일으켰다. 두어 걸음 옮긴 그가 우뚝 멈춰 서서는 물었다.

“주…… 월왕비는 잘 계십니까?”

월왕이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훑어봤다.

“잘 지내니 염려 말게.”

잠시간 흔들렸던 육냥의 눈빛이 다시 냉정해졌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육냥이 떠나자 우항이 탄식을 뱉었다.

“전하, 예전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더니, 옷과 자리가 바뀌었다고 저리 사람이 달라질 수 있습니까? 예사 기세가 아닙니다.”

“그가 북강에서 살아서 도망친 게 그냥 운이 좋아서인 줄 아는 겐가?”

육냥은 말재주는 없지만 본디 능력 하나는 출중했다. 거기에 성정도 우직했다. 민방화를 범하지 않으려고 제 팔과 다리를 부러뜨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처방전을 주어도 될까요?”

월왕은 육냥이 약속한 군마와 무기를 받기도 전에 처방전부터 내주었다. 우항은 육냥이 갑자기 말을 바꾸고 나올까 염려가 되었다.

그에 월왕의 안색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육냥이 북강에 당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다. 지금은 자리를 잡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을 거야. 오늘 가져간 처방전이 큰 역할을 하겠지. 요아 곁에 있을 때 보였던 충성심을 보면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야.”

예상을 깨고 육냥이 배신한다 해도 손해 볼 건 없었다. 처방전을 주고 육냥과 목운요의 정을 끊어 낼 수 있다면 그 역시 득이었다.

“전하의 말씀은 육냥이 역병 처방전으로 북강 왕의 눈에 들려는 속셈이라는 것인지요.”

“그렇게 생각이 짧지는 않을 거다. 지금 북강은 내정이 몹시 혼란한 걸로 알고 있어. 내 생각이 맞다면 약으로 민심을 제 편으로 돌릴 거야.”

“설마하니 역모라도 꾸미려는 작정일까요?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월왕에게선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때가 되었다. 대군을 움직이거라.”

육냥이 과녁도 없이 활을 쏠 리 만무했다. 그가 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분명 믿을 구석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정녕 그렇다면 그의 힘을 빌리는 것도 염두에 둘만 했다.

“알겠습니다.”

* * *

구월, 월서로부터 소식이 들려왔다.

군사를 거느린 월왕이 옥계성과 옥문성 두 곳을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한편 침묵을 지키던 북강 왕은 북강 사신들을 풀어 달라고 요구하면서, 변경에 병력을 늘리며 위협의 태세를 취했다.

크게 노한 황제는 그 즉시 변경에 병사를 급파했고, 월왕에 대한 견제에도 나섰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인 대력조 전역에 짙은 전운이 감돌았다.

능서행궁에 머물고 있는 목운요는 정자에 앉아 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잔뜩 좁혀진 미간에서 그녀의 근심이 엿보였다.

그에 허연한이 그녀에게 겉옷을 걸쳐 주며 꾸짖는 듯한 투로 말했다.

“요아야, 홑몸이 아니잖니. 조심해야지. 날이 부쩍 추워졌어.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목운요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미간은 펴져 있었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괜찮아요, 어머니.”

근심이 한가득하면서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억지로 웃는 목운요 때문에 허연한은 마음이 아려 왔다.

“월왕이 걱정되는 것이니?”

목운요가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회임한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그녀의 배는 이제 언뜻 봐도 티가 나게 불러 있었다.

“네. 저 산을 보세요.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온 산이 푸르렀는데, 벌써 가을 느낌이 물씬 나요. 낙엽이 지고, 가지가 앙상해지면 사야께서 돌아오실까요?”

“너무 걱정 말거라. 대여섯 달 되면 온다고 약조하지 않았니.”

멍하게 있던 그녀가 허연한의 말에 간단히 대꾸했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하지만 그 말과 달리 목운요의 눈은 점점 초점을 잃어 갔고, 머릿속은 아득해져만 갔다.

문득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는 허기가 떠올랐다. 연주로 돌아갔다고 했던가.

월왕이 위험하다는 소식에 홀로 강남으로 왔던 허기였다. 그녀의 당차고 결연한 모습에 목운요는 적잖이 놀랐었다.

자신도 월서에서 고난을 겪고 있을 월왕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몸으로 그의 곁에 가는 건 방해만 될 뿐이었다.

허연한이 바람에 흐트러진 목운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미소 지었다.

“바람이 부는구나. 방으로 돌아가자꾸나. 경치를 구경하고 싶으면 따뜻한 낮에 다시 나오렴. 내 같이 오마.”

목운요가 어지러운 생각들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운요를 방으로 데려다준 허연한이 장공주를 찾아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

“요아는 요즘 어떤가?”

“벌써 몇 차례나 조사했는데도 환각제의 출처를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요아가 점점 더 울적해해요. 금란 말로는 밤에는 잠도 설친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몸이 버텨 내지 못할 거예요.”

장공주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능서행궁이 크면 얼마나 크다고 환각제의 출처를 찾지 못하다니……. 다시 샅샅이 조사해 보거라. 분명 문제가 있을 것이다.”

“네. 당장 선령에게 지시해 보겠습니다.”

“선령이라면 믿을 수 있지. 절대 인정사정 봐주지 말라고 하렴. 내 처소도 필요하다면 조사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허연한이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어머니, 그리고 또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장공주는 그녀의 기색만 보고도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허기에 대한 얘기지?”

“어찌 아셨습니까? 사실 그 아이에 대한 얘기입니다.”

장공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연한의 결심 어린 표정을 보자 줄곧 염려되던 마음이 다소 놓였던 것이다.

허연한은 민가에서 자라 궁중에서 흔히 벌어지는 암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순진했으며, 때로는 그 모습이 나약하게 비치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목운요를 위해 강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없더라도 두 모녀가 꿋꿋이 여생을 잘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요는 나와 피로 맺어져 있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과감해져야 할 듯하구나.”

어찌 됐든 목운요는 그녀의 외손녀였다. 그러니 월왕에게 흑심을 보이는 허기가 밉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허연한은 장공주의 방을 나서며 사금과 사기에게 상황을 물었다.

“허기 쪽에 사람을 심어 두었지?”

“네. 부인의 분부대로 쭉 감시하고 있습니다.”

“잘했네. 허기의 동태를 잘 살펴야 해. 허기가 제 말대로 연주로 간다면 몰래 보호해 주게. 하나 중간에 방향을 틀어 월서로 향하면 즉시 붙잡아 행궁으로 데려와. 무슨 수를 써도 좋네.”

“알겠습니다.”

* * *

이후 며칠 동안 선령은 행궁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다. 화초까지 죄다 뽑아 살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하나 다행스럽게도 선령의 소란에 환각제를 쓰던 이가 겁을 먹었는지 최근엔 환각제가 사용되는 일이 없어졌다.

거기에 월왕의 서신까지 받아 목운요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마음의 병이 치유되자 사람 자체도 생기가 돌아 주변인들은 한시름을 덜었다.

그런데도 선령은 여전히 초조함을 거두지 못한 채 방을 서성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도대체 어디를 놓친 거지? 내가 잊고 있는 지점이 무어란 말인가.”

마침 그녀의 방에 들어온 목운요는 쉴 새 없이 서성이는 선령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러다 바닥이 닳아 없어지겠어.”

얼른 걸음을 멈춘 선령이 목운요를 한쪽에 앉혔다.

“어떻게 혼자 왔어? 금란과 금교는 어디 두고.”

“둘은 뜰 입구에.”

“금란과 금교를 항상 대동하고 다니라니까. 가까운 곳이라고 방심하면 안 돼.”

목운요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반짝이는 눈은 별이 흩뿌려진 듯 더없이 맑았다. 어둠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연상되지 않는 눈빛이었다.

“나 때문에 걱정 많았지?”

놀란 선령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너…….”

“나도 내 상태가 이상한 건 알고 있었어. 몸이 내 것이 아닌 양 기운이 나지 않았지. 그러다 어제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더니 마음 가득했던 어둠이 싹 가셨어. 정말 신기하지?”

선령은 기쁜 마음에 황급히 그녀의 맥을 짚었다.

“맥은 정상이야. 다만 근래에 너무 많이 말랐어. 이제 잘 먹고 건강부터 챙겨.”

“알았으니 염려 마. 그보다 환각제에 관해선 뭐 좀 알아냈어?”

그 얘기에 선령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니. 웬만한 곳은 전부 뒤졌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한 가지 빠뜨린 곳이 있어.”

“빠뜨린 곳이라고?”

“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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