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421화 (421/442)

421화 무사하다는 안부

그 시각, 서릉의 서쪽 성문이 열리더니 시위들을 이끌고 월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월왕은 수백에 이르는 시위들을 이끌고 번개 같은 속도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금위군이 매섭게 쫓았다.

뒤쪽에선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우렁찬 고함이 더해져 천지가 뒤흔들렸다. 금위군은 월왕 무리를 바짝 추격하며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때, 별안간 앞쪽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한 무리가 월왕의 길을 막아섰다. 갑옷을 입은 이들은 흡사 금위군처럼 보였다.

후방에서는 금위군이 뒤쫓고, 전방에는 정체 모를 무리가 길을 막은 채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월왕 일행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월왕은 그 와중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장검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쳤다.

“산속으로 간다!”

그러나 그들이 산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그들의 진로에 불을 놓았다. 삽시간에 산은 불구덩이로 변했다.

월왕은 부하들을 이끌고 미친 듯이 질주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감히 산에 불을 지르다니, 지옥에라도 쫓아가 이 원수를 갚아야 이 분노가 풀릴 듯했다.

한편, 북강의 자객이 산에 불을 놓았다는 말에 황제는 화가 나 즉시 자객들을 생포하라 명했다.

산 채로 잡혀 온 자들에게는 심문이 가해지지 않았다. 다만 증언을 글로 적게 한 뒤 그들의 이름을 서명토록 했다.

그러고는 그 문서를 근거 삼아 역참을 포위했다.

이내 도오를 비롯한 북강 사신들이 옥으로 붙들려 왔다. 그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대력조에서 자신들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 자만한 것이다.

그러나 사신 몇몇이 살이 찢길 정도로 곤장을 맞고 쓰러지자, 그제야 그들의 세찬 원성이 뚝 그쳤다.

* * *

불과 사흘 만에 서릉은 전례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월왕이 시위들을 이끌고 서릉을 빠져나가며 반란의 기운을 드리운 데다, 장공주는 월왕비를 유산시킨 황후의 악행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능서행궁으로 떠난 것이다.

게다가 북강 사신들은 공주 일을 보복할 심산으로 월왕이 숨어든 산에 불을 질렀다가 덜미가 잡혀 옥에 갇힌 신세였고, 능서행궁으로 향하던 장공주는 자신을 위협한 자객의 배후를 황제로 지목하였다.

선황에 대한 막심한 불효라고 여긴 그녀는 동원 가능한 원로대신들을 소집해, 황제를 질책하는 상소까지 올렸다.

일련의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자 백성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고, 조정 대신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조회를 열 때마다 열띤 토론이 이어졌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두 차례나 탁상을 뒤집어엎었고, 관원 여덟 명은 귀양까지 보내졌다. 황제의 서슬 퍼런 분노에 조정 대신들은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월왕이 서릉을 나선 것이 모두 황제가 그를 수용하지 못해서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월왕에게 위협을 느낀 황제가 그의 반란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월왕의 아이를 해쳤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월왕을 제거할 떳떳한 명분이 생기기 않겠는가.

하지만 녹록한 상대가 아닌 월왕이 보란 듯이 서릉을 빠져나가, 황제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다는 소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한 소문들은 결국 황제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황제는 그 즉시 소문의 근원지를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금위군은 황실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모조리 붙잡아 곤장을 치면서 보란 듯이 거리를 활보했다.

하지만 황제가 소문을 잠재우려고 노력할수록 백성들의 의구심과 불안감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희망으로 충만했던 생활이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 버린 기분이었다. 어지러운 민심 사이로 두려움의 정서가 서서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황제는 북강 왕에게 국서(國書, 국가의 원수가 국가의 이름으로 보내는 외교 문서)를 보내, 북강 사신들의 행동에 대해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오를 비롯한 사신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러나 황제의 이런 행동은 오히려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황제가 제 잘못을 애꿎은 북강에게 전가한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 * *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여느 때 같았으면 중추절 준비를 하느라고 흥이 나 있을 백성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황궁 내 황제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립이 차를 우려 탁자에 내려놓았다. 숨소리도 신경 써서 조심스럽게 내고 있었다.

“서립, 월왕에 관한 소식은 있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 전해 들은 바가 없사옵니다.”

황제가 인상을 팍 쓰고는 몸을 일으켜 자리를 오갔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갑작스레 나타났다.

“유일, 왔구나! 어서 말해 보거라. 월왕은 어찌 됐느냐?”

“월왕 전하께서는 안전하게 산을 빠져나와 월서로 향하고 계십니다.”

황제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다친 곳은 없겠지?”

“워낙 대비를 잘하셔서 경미한 부상 말고는 강녕하십니다.”

“그럼 됐네.”

황제는 그제야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지는 듯했다.

“고모님 쪽은 어떠한가?”

“장공주 전하께서도 능서행궁에 무사히 당도하셨습니다. 근처에 병력 오천을 배치해 놓은 데다 지세가 높아 수비에 유리한 곳입니다. 대군이 들이닥치지 않는 한 안전하실 것입니다.”

“좋네. 북강 놈들이 이 틈에 애먼 짓을 못 하도록 주시하도록.”

“알겠습니다.”

유일이 돌아간 뒤, 황제가 서립에게 명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들을 엄선해 능서행궁으로 물건을 보내도록 하게. 그곳으로 보내지는 음식이며, 물건이며 전부 꼼꼼하게 검사해야 하네. 조금의 느슨함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지금 당장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상에 올라와 있는 상주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이번 계략은 북강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조정 대신들의 진면모까지 덩달아 검증되었다.

대신들 중 일부는 영락없이 기회주의자처럼 행동했다. 월왕이 실권을 장악할 때는 그의 꽁무니를 바짝 좇더니, 그의 세력이 쇠퇴하자 완전히 등을 돌려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심지어 의덕 장공주의 처벌까지 염두에 둔 의중까지 엿보였다.

황제는 그 소인배들을 생각하자니 울분이 치밀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 * *

능서행궁에서 대기하던 목운요도 월왕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안도하였다.

능서산 중턱에 지어진 능서행궁은 뒤로는 산이요, 정면에는 강이 흐르는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그 풍경을 감상하며 산책하던 목운요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걸렸다.

이에 선령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다 시녀들에게 화초 정리를 지시하는 허기를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허기도 기어이 쫓아왔네. 장공주 전하 곁에 딱 붙어서 시중을 드는데, 무슨 꿍꿍이일까?”

목운요가 활짝 핀 금잔화를 살짝 어루만지며 말했다.

“허기의 아비가 외할머니의 수양아들이잖아. 드러내 말씀은 안 하셔도 내심 허기를 손녀처럼 생각하실 거야. 그리고 외할머니를 보필하러 온 사람을 쫓아내면 나만 속 좁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당할 거야.”

“흥, 장공주 전하를 보살핀다는 건 다 핑계고, 허기는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니까? 바로 네 부군인 월왕 말이야.”

선령이 화가 나 씩씩거렸다.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목운요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 근심 없이 활짝 웃는 걸 보고 있으면 제 마음의 근심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목운요의 웃음을 빼앗으려는 이들을 절대 참아 줄 수 없었다.

그런 선령과 달리 목운요는 태연하기만 했다.

“나도 진작 알아차렸어. 그런데 아직 눈에 날 만한 짓은 안 하잖아. 또 외할머니께서 중간에 계시니 괜히 얼굴을 붉혀 왕래를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허기가 지금처럼 얌전히 지내길 바랄 뿐이야. 만일 선을 넘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래도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항상 주시해. 일이 벌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없으니까.”

선령이 입을 삐죽거렸다. 목운요가 걱정돼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명심할게.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사야께서 월서로 가셨잖아. 지금은 북강을 처단하는 게 우선이니 거기에만 집중하자고.”

“그래. 혹시라도 직접 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으면 나한테 얘기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테니까!”

목운요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대단히 선한 사람은 못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해칠 만큼 악인은 아니었다.

허기가 제 속내를 내비치고는 있었으나 그런 사소한 일로 트집 잡아 죽일 수는 없었다.

물론 제 밥그릇은 제가 챙겨야 하는 법. 만약 허기가 선을 넘게 된다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차 없이 모진 일을 감행할 것이다.

* * *

눈 깜짝할 새 보름이 지나고, 중추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황제와 황후는 궁중 연회를 베풀었다. 아주 성대한 연회였지만 대신들은 즐길 기분이 도통 나지 않았다.

심병괴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조운년의 옆에 자리했다. 평소 죽이 잘 맞아 자주 왕래하고 지내는 사이로, 오늘도 가깝게 앉아 춤사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 흥이 오르지 않았다.

“조 대인, 하운방 일도 잘 안 풀린다면서요?”

하운방 일도라…… 심병괴의 말에 조운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월왕비께서 없으시니 하운방과 불선루의 업무가 마비됐어요. 사실 장사를 얕잡아 봤었는데, 이제 와 보니 장사로 성공하려면 우리 조정 대신 못지않은 능력이 있어야 합디다.”

조운년이 술을 단번에 비워 냈다. 그러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월왕 전하께서 서릉을 떠나시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습니다.”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행여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에는 조운년이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자, 앞으로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합시다.”

“좋습니다.”

술을 단숨에 들이켠 두 사람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폭풍우가 치기 직전의 하늘이 일시적으로 쾌청한 것처럼, 삽시간에 주위가 먹구름으로 뒤덮일 것이 뻔했다.

연회에서 월왕과 월왕비를 언급하는 이는 없었다. 아첨꾼 대신들이 황제의 비위를 맞추며 뀌는 알랑방귀만 들려올 뿐이었다.

황제는 그걸 흐뭇하게 들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뜻을 이루어 더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