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형제의 난
이번 소동의 근원지는 북강 사신들이 아니었다. 김씨 성을 가진 한 언관이었다.
“폐하, 태의에게 월왕비 마마의 맥을 짚도록 명해 주십시오. 그 결과, 진정 회임한 것으로 판명이 나면 엄히 다스려야 하실 것입니다.”
월왕이 싸늘한 얼굴로 등장했다. 마치 검 한 자루가 움직이듯 그에게서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언관의 앞까지 다가간 그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방금 무어라 했나. 본 왕이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다시 말해 보시오.”
월왕의 무시무시한 위압감에 언관은 두 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눈으로도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월왕 전하, 국상 기간에 회임을 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선황에 대한 대역죄입니다. 엄중히 벌하여야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그래? 그럼 어찌 처벌해야 하겠나.”
“……마땅히 태아를 지우고, 삼 개월 동안 배궤(拜跪, 절하고 꿇어앉음)를 해야…….”
이야기를 듣던 월왕이 언관의 멱살을 붙잡아 던져 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발로 차서 호수에 빠뜨렸다.
“감히 본 왕의 아이를 해하려 들다니, 죽어 마땅한 죄이다.”
“월왕!”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황제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어찌 조정의 관원을 저리 함부로 대하는 게냐!”
목운요가 염려돼 연극을 계속해 나갈지 말지 고민하던 황제는 월왕의 눈짓에 따라 성실히 입을 움직였다.
월왕의 눈빛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럼 제가 잘못하기라도 했단 말씀입니까?”
“자네가 아무리 친왕이라고는 하나, 짐이 있는 자리에서 조정 관원에게 그리 무례하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하, 저자가 감히 소인의 아이를 해하겠다고 입을 놀렸습니다. 그걸 두고 무례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설마하니 제 아이를 해치려고 드는 자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라는 말씀은 아닐 테지요.”
“무엄하도다!”
황제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짐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호수에 빠졌던 언관이 가까스로 물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 분노가 서린 월왕이 다시 그를 발로 걷어차 물에 처박았다.
폐하의 분노가 이어졌다.
“월왕, 자네……! 정말이지, 짐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가?”
다른 관원도 더는 참지 못하고 분에 차 호소했다.
“폐하, 월왕 전하가 감히 폐하 앞에서 경거망동하며 조정 관원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왕비는 국상 기간에 회임까지 한 바, 선황은 물론이고 폐하께도 이보다 더한 불충은 없을 것입니다. 폐하, 부디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언관의 말이 지나친 감은 있었으나 황실의 법도를 보면 잘못된 말은 아니었다.
미간이 잔뜩 좁혀진 황제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태의는 어서 월왕비의 맥을 짚으라.”
월왕이 싸늘한 얼굴로 소양궁 입구를 막아섰다.
“폐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월왕, 짐을 황제라고 여긴다면 길을 비키게.”
황제의 눈빛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월왕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어쩌실 겁니까?”
이를 힘줘 다문 황제가 옆에 있는 금위군 총령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금위군들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월왕 주위를 둘러싸며 월왕을 향해 칼날을 겨눴다.
“다시 한번 명하네. 비켜서.”
월왕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폐하께서 저에게 칼을 겨누시는 날이 올 줄이야. 상상도 못 한 일입니다.”
“짐도 인내할 만큼 인내했네. 그런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감히 짐의 명령을 거역하는 걸로 대갚음하는 것인가?”
그때, 선령이 걸어 나와 꽁꽁 얼어붙은 대치 상황을 깨며 황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
“폐하, 한 궁녀가 월왕비 마마를 호수로 밀치는 것을 소인이 똑똑히 보았습니다. 월왕비 마마의 회임과는 별개로 사람을 물에 빠뜨리는 것 자체가 큰 죄인 줄로 아옵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자네는 누군가.”
황제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제 말이 몇 번이나 무시되자 황제의 불쾌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소인은 월왕비 마마께서 부리는 시녀입니다. 방금 소인이 끌고 온 궁녀가 바로 월왕비 마마를 밀친 자입니다. 부디 죄를 따져 물어 주십시오.”
월왕이 매서운 눈초리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황후 마마께서 연회를 베푸시는 날입니다. 이런 중요한 날에 궁녀 따위가 겁도 없이 왕비에게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폐하, 궁녀들이 언제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 배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이제는 황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월왕, 설마 황후를 의심하는 것이냐?”
“그것은 직접 물어보면 알 일입니다. 폐하, 설마 물어보려니 겁이 나시는 건 아니겠지요?”
황제가 콧방귀를 뀌고는 명했다.
“궁녀를 깨워라. 얼굴에 물을 끼얹어.”
금위군이 황급히 물을 대령해 궁녀의 얼굴에 끼얹었다.
궁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바로 눈을 떴다. 그녀가 눈앞의 광경에 놀랐는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폐, 폐하…….”
“어느 궁 소속이냐?”
“……소인은 소양궁 소속입니다.”
그렇다면 황후의 밑에서 일하는 궁녀가 분명했다.
“네가 월왕비를 밀어 물에 빠뜨린 것이냐?”
“소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네년이 한 짓을 본 사람이 있거늘!”
월왕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바른대로 고하면 네 가족은 무사히 살려 둘 것이다. 하나 네년이 계속 허튼소리를 지껄이면 네 가족들과 지옥에서 만날 것이니 그리 알거라.”
월왕의 노골적인 협박에 황제가 노여움을 드러냈다.
“월왕!”
“폐하, 어찌 이리 흥분하십니까? 소인이 이년에게 배후를 캐내기라도 할까 봐 그러십니까?”
“어찌 그리 말을 함부로 하는가! 자중하게.”
“소인은 오늘 기필코 사실을 밝혀낼 것입니다. 그러니 막지 마십시오.”
“무엄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의덕 장공주 전하 납시오.”
황제와 월왕이 일제히 장공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장공주는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궁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살벌한 자세로 서 있는 금위군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내 탄식이 흘러나왔다.
“경사스러운 날에 이 무슨 난리인가? 선황께서 임종 직전 한 말을 벌써 잊은 겁니까? 형제지간에 서로 도와 한마음으로 대력조를 지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선황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다투다니, 선황께 부끄럽지도 않은 겁니까?”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고모님, 이 일은…….”
장공주가 그 말을 자르며,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는 궁녀를 향해 말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죠. 월왕비가 내 외손녀라고는 하나 편을 들 생각은 없어요. 월왕비가 정녕 국상 기간에 회임을 하였다면 월왕과 함께 벌을 받아야 할 겁니다. 그 일은 그렇다 치고, 월왕비를 해하려 한 저 궁녀의 죄는 씻을 도리가 없지요. 저년을 당장 끌고 가서 입을 열 때까지 쳐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위군이 궁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궁녀가 황후를 향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황후 마마, 살려 주십시오! 소인은 마마께서 시키신 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국상 기간에 회임을 한 월왕비가 부덕하다며, 물에 빠뜨려 유산을 시키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마,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일순 낯빛이 바뀐 황후가 인상을 쓰며 일갈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장공주 전하, 모든 건 황후 마마께서 소인에게 시키신 일이옵니다. 소인은 감히 월왕비 마마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이유도, 담력도 없습니다.”
궁녀가 울며불며 애원했다.
월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황후를 쏘아보았다.
“황후 마마, 왕비가 평소 마마를 그리도 존경해 모셨건만……. 마마께서 편찮으실 때 밤낮없이 보살핀 게 누구입니까. 제 왕비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녀를 해치려 하십니까?”
자리에 있던 부인들과 소저들은 놀란 얼굴이었다. 황후가 저런 끔찍한 계략을 꾸몄을 줄이야.
“폐하, 장공주 전하. 저는 월왕비를 해하라고 지시한 적이 결코 없사옵니다.”
황후가 다급한 음성으로 해명했다.
그러자 궁녀가 황후 옆에 선 상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양 상궁도 그때 함께 있었습니다. 말 좀 해 보세요!”
얼른 무릎을 꿇은 양 상궁은 고개만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월왕이 서슬 퍼런 얼굴로 물었다.
“양 상궁, 궁녀의 말이 사실인가?”
“……황후 마마, 소인을 용서하시옵소서.”
말을 마친 양 상궁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금위군이 그녀를 구해 냈지만 이미 숨은 끊어진 뒤였다.
비록 황후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이에 장공주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더 심문할 것도 없으니 저 궁녀는 당장 끌어내 죽이십시오. 그리고 오늘 연회는 여기서 마치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가 이맛살을 좁히며 말했다.
“고모님, 방금 월왕비를 두둔하지 않으실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폐하께선 사건을 전부 끄집어내 들쑤시고 싶은 겁니까?”
장공주의 목소리가 차츰 높아졌고, 눈빛에도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월왕도 일찌감치 얼어붙은 표정으로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제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결론을 내렸다.
“고모님의 말씀대로 사건을 다시 조사한 뒤 논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제야 장공주의 낯빛이 온화해졌다. 그녀가 자리에 있는 대신과 부인, 그리고 소저들을 쓱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어서 돌아가 쉬세요. 불필요한 일은 빨리 잊는 게 좋습니다. 괜한 근심일랑 만들지 말고요.”
“네.”
하지만 북강 사신들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누군가 항의를 하려고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어느새 금위군의 칼을 빼앗아 잡은 월왕이 사신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내 이미 숱한 북강인들을 죽였다. 목숨 하나 더 없애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북강 사신은 놀라서 말을 집어삼키고는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한 채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