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아이? 아이!
전갈을 받은 황후는 몹시 기뻐했다.
“폐하께서 곧 대신들과 함께 칠석 행사를 관람하러 오실 테니 최선을 다해 주게. 제일 두각을 나타내는 이에게 큰 상을 내리겠네.”
이내 황후가 여인들을 대동하고 소양궁을 나와 어화원 호수 쪽으로 향했다. 넓은 공간에는 여러 색상의 밝은 등이 걸려 있었다. 아주 그윽한 광경이었다.
궁녀는 바늘과 붉은 실을 여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월왕비, 이쪽으로 오게. 자네 솜씨가 좋으니 내 옆에 있으면 내 실력도 덩달아 늘지 누가 아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히려 제가 그 덕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어서 시작하지.”
그 말과 함께 등에 불이 붙으며 유유히 밤하늘로 떠올랐다.
여인들이 저마다 바늘에 붉은 실을 끼우려는데 별안간 호수 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호수를 유심히 바라보던 누군가가 비명을 내질렀다.
“호, 호수에…… 호수에 귀신이……!”
호수에는 창백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얼굴은 푸르뎅뎅했고, 두 눈은 붉게 충혈돼 그 모습이 흡사 귀신 같았다.
여인들은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했다.
불길함을 직감한 목운요가 황후와 함께 뒤로 물러서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힘껏 밀었다. 그 순간 목운요의 발이 미끄러지면서 호수에 빠져 버렸다.
황제의 근처에 있던 월왕은 여인들의 비명을 듣고 불길한 예감에 곧장 달려갔다. 누군가가 목운요를 호수에 빠뜨리려 하자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물로 뛰어든 월왕이 목운요를 끌어안고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 숨을 틔워 줬다.
목운요는 다행히 숨을 고르게 쉬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앞에 아까 물 위로 떠올랐던 귀신 형체가 보였다. 그녀가 황급히 손을 뻗어 월왕의 목을 감싸고는 얼굴을 묻었다.
“사야……!”
느닷없는 소동에 정신이 나가 있던 황후는 정신을 다잡고는 허둥대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호통을 쳤다.
“모두 진정하게! 여봐라, 지금부터 함부로 움직이는 자는 즉시 체포하거라!”
“알겠습니다!”
곧이어 황제도 신하들과 함께 현장에 당도했다. 물에 빠진 목운요를 발견한 황제의 미간에 빠르게 주름이 스쳐 갔다.
원래 계획은 실수로 목운요의 옷에 차를 쏟아 화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목운요가 회임한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황제와 눈이 마주친 황후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첩자들에게는 사람을 붙여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하나 그런 그녀의 계획을 알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연극은 계속돼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전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한편 목운요는 두려움이 들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야, 아이를…….”
목운요를 품에 안은 월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요아, 이만 돌아가자꾸나.”
그때, 갑자기 도오가 앞으로 나섰다.
“월왕 전하, 왕비 마마께서 많이 놀라셨을 텐데 태의를 불러 진맥이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북강 사신들과 월왕의 껄끄러운 관계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런 기회를 북강에서 놓치면 그게 더 의아할 터였다.
“신경 꺼라.”
월왕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왕비께서 회임을 하셨다고요. 그것도 장례 기간에 말입니다. 진맥을 하지 않겠다는 건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뜻입니까?”
“헛소리 집어치우라 했다.”
월왕에게서 칼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물에 빠져 옷이 흠뻑 젖었지만 그의 기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반면 목운요는 기운이 없어 그의 손을 잡았다.
“사야, 어서 옷을 갈아입고 싶어요. 배의 느낌이 이상해요.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해요.”
북강 사신들의 귀에 그녀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들으셨사옵니까? 월왕비가 회임한 사실을 제 입으로 실토했습니다. 틀림없이 태중에 아이가 있사옵니다!”
월왕은 순간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후에야 그의 두 눈에 섬광이 번쩍였다.
“아, 아이? 아이라 한 것이냐?”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한기를 느낀 그녀가 월왕의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입을 꽉 다문 월왕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목운요를 품에 안은 채 소양궁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황후는 넋이 나간 와중에도 궁녀들에게 월왕을 도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북강 사신들은 포기하지 않고 월왕을 막아섰다.
“월왕 전하, 국상 기간에 월왕비가 회임을 했습니다. 이건 선황에 대한 크나큰 불경…….”
사신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월왕이 그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발로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사신은 그대로 멀리 날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본 왕의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즉시 북강으로 쳐들어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도오가 얼른 다른 사신들에게 눈짓을 했다. 월왕을 절대 저대로 보내서는 안 되었다.
“폐하, 월왕이 하는 짓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정말이지, 법도도 없고 하늘도 없는 자입니다. 이건 폐하를 능멸하는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냉철한 표정의 도오는 낭랑하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폐하께서는 북강이 성의를 다하면 양국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데 월왕이 도발적인 언사를 내뱉어 폐하의 약조를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희 북강도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사실 월왕으로선 목운요에게 찻물을 붓는 계획이 그녀에게 어떠한 위험도 생기지 않기에 허락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회임을 했을지도 모르는 목운요가 호수에 빠졌다. 한시라도 빨리 젖은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데 북강 사신들이 앞을 가로막고 훼방을 놓자 월왕은 크게 노했다.
“전쟁을 걸어올 용기를 낸다면야 본 왕이 피할 이유가 없지. 나중에 꽁무니나 빼지 마시오.”
월왕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깊은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 기세에 숨이 턱 막힌 도오의 눈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황제로 즉위한 이가 영군유인 것이 다행으로만 느껴졌다. 월왕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면 북강의 앞날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을 것이다.
도오가 주춤하자 월왕은 냉소를 머금고는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폐하, 이자들이 계속 길을 막도록 두실 참입니까?”
월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데다 목운요가 조금 전에 한 말을 들은지라 황제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망했군. 목운요가 정말 임신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황제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서 월왕비의 옷을 갈아입혀 주거라. 황후는 태의를 부르시구려.”
그때, 선령이 혼절한 궁녀를 한 손으로 끌고 나타났다. 그녀는 궁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목운요의 맥부터 짚었다.
“월왕 전하, 어서 가시지요.”
“알겠다.”
이번에는 북강 사신들도 더는 길을 막지 못했다.
* * *
선령은 서둘러 목운요의 옷을 갈아입히고 수건으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꼼꼼히 닦았다.
“운요, 좀 어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차를 마신 덕분인지 목운요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이제 괜찮아.”
선령이 다시 목운요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이 안정적으로 잡히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겁도 없다. 위험하지 않다고 하더니 호수에 다 빠지고, 이게 무슨 일이야? 무사하니 망정이지, 놈들의 계략대로 됐으면 어쩔 뻔했어.”
선령은 두려움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목운요를 보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제 안심해. 아까 물에 떠 있던 귀신 얼굴은 만두피로 만든 가짜였어.”
목운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끌고 온 궁녀는 누구야?”
“널 호수로 밀쳤던 년.”
칠석 행사를 벌이던 시각,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선령의 눈에 혼란을 틈타 수작을 부리려는 궁녀가 보였다. 그 즉시 달려가 저지하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월왕이 제때 나타나 목운요를 호수에서 건져 내자, 선령은 재빨리 궁녀를 뒤쫓았고 독을 써 쓰러뜨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목운요가 이불을 걷고 침상에서 내려오려 했다.
선령이 그런 목운요를 얼른 말렸다.
“맥박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조심해야 해. 왜 일어나려는 건데?”
“계획이 절반까지 왔는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이런 기회는 또 없어. 그 궁녀의 배후 세력이 누군지는 몰라도 황후 마마가 제일 먼저 의심을 받으실 거야. 그럼 북강 쪽 사람들도 철석같이 믿을-”
“일단 네 몸부터 챙겨. 이 상황에서도 북강 놈들 생각뿐이야?”
“절반의 성공으로 끝낼 수는 없어. 어미 마음이 편해야 배 속 아이도 잘 클 것 아니야.”
목운요가 기어이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선령이 황급히 그녀를 붙들어 침상에 앉혔다.
“어리석게 굴지 마. 북강 사신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면 여기 있어야 해. 일단 편히 누워 있어. 내가 나가 볼 테니.”
선령이 방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월왕이 그녀를 붙들고 목운요의 상태부터 물었다.
“부인의 몸은 어떠한가.”
“마마께서는 아직 잠들어 계십니다. 다행히 맥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선령은 목운요의 상태가 회복되었다고 알리며 그를 안심시켰다.
월왕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잔뜩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이 스르륵 풀렸다. 입꼬리는 자꾸만 위로 올라갔고, 눈에서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전하, 태의가 마마의 맥을 짚어 보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그 말에 월왕의 얼굴에 걸렸던 웃음이 차츰 사라지며 그 자리를 진한 살기가 채웠다.
다행히 제때 구조한 덕에 목운요가 큰 탈 없이 무사했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늦어 상황이 잘못됐을 걸 상상하니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분노에 선령은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목운요의 사람 보는 안목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최소한 이 남자라면 그녀를 안전히 지켜 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밖에서 다시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월왕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