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월왕비의 회임
후원에 들어선 월왕에게서는 조금 전까지의 흉포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요아, 나 때문에 놀랐느냐?”
“그럼요. 너무 무서워서 지금도 심장이 뛰어요.”
목운요는 약상자에서 붕대를 꺼내 상처를 감싸 주며 정색했다.
월왕은 얌전히 손을 맡긴 채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쪽같이 하려다 보니 그만……. 이 정도면 되었겠지?”
“네. 얼마 후면 여기 상황이 도오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
사실 월왕은 북강 사신들이 낚기 위해 방금까지 열연을 펼친 것이었다.
그는 오늘 종일 시달렸던 일을 떠올리자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월왕이 목운요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요아, 넌 모를 것이다. 내가 오늘…….”
그 순간, 목운요가 질색을 하며 그를 밀어냈다.
“사야, 어서 씻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냄새가 너무 고약합니다.”
“이런, 깜빡했군. 어서 갈아입지.”
월왕이 황급히 멀어졌다.
피 묻은 옷을 갈아입지 않아 온몸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거기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려고 들이부은 술 냄새까지 혼합되니 냄새가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목욕을 마친 월왕은 목운요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는 처소로 돌아왔다. 만족스러운 듯 목운요를 품에 안은 그가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목운요가 월왕의 품에서 몸을 빼내고는 물었다.
“사야, 어찌 그리 한숨을 쉬십니까?”
“우리 둘만 서로 의지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목운요가 곧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월왕이 그녀의 손을 힘주어 부여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요아,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다.”
그의 마음속 공간은 무척이나 작았다. 목운요를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꽉 차 버려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목운요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사야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목운요가 월왕을 손을 잡아 제 배에 올려놓았다.
“장차 사야의 자식을 낳을 거예요. 여자아이가 될 수도, 남자아이가 될 수도 있겠지요. 설마 우리의 자식을 바라지 않으시는 건가요?”
흠칫 놀란 월왕이 손으로 목운요를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신과 목운요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 것이란 상상을 하니 긴장된 손끝이 주책없이 떨렸다.
“설마…… 회임을 한 것이냐?”
목운요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가 그리 빨리 들어설 리가 있겠어요?”
국상을 치르고 겨우 이 주가 막 지난 시기였다. 설사 아이를 배었다고 해도 벌써 태기가 느껴질 리 만무했다.
월왕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손을 뻗어 목운요를 꽉 끌어안은 그가 턱으로 그녀의 머리를 쪼아 대듯 콕콕 눌렀다.
“우리 어서 아이를 하나 낳자꾸나.”
그는 어릴 적에 모친을 잃은 터라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의 감정을 잘 몰랐다. 그렇기에 제 자식에게만큼은 자신이 결핍을 느꼈던 부분을 모조리 보상해 주고 싶었다.
월왕이 침울한 기색을 보이자 목운요도 마음이 아렸다.
“그래요. 사야의 아이를 낳아 드릴게요.”
순간 월왕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더없는 기쁨이 감추려야 감춰지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뭐라 지을까?”
“사야께서 지어 주세요.”
“그래. 서책을 뒤져 고민해 보지. 아이 옷도, 침상도 준비해야 할 테고, 아이를 돌볼 시녀, 유모도 필요할 테지. 참, 심부름을 할 하인에, 호위…….”
월왕이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이가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데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들일까, 딸일까?”
목운요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들부터 낳고, 딸을 낳아요. 그래야 오라비가 커서 누이를 지켜 주지요.”
“그래. 옳은 말이야. 아들부터 낳아야지.”
사내 녀석이면 아무래도 더 튼튼할 테니 키우면서 육아 비법을 익혀, 그다음에 태어날 딸아이를 능숙한 솜씨로 돌보면 될 것이다. 만약 목운요처럼 가냘픈 딸아이가 첫째로 태어난다면 감히 부서질까 품에 안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한데 아들 녀석이 태어나면 우리 왕부가 너무 비좁지 않나? 사냥을 좋아하면 어쩌지? 폐하를 찾아가 집을 넓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야겠군. 망아지도 구해 와야겠어. 마장(馬場)도 두어 곳 지어야 하니까…….”
목운요가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 보는 월왕의 들뜬 모습이었다.
“사야, 천천히 생각하셔요. 아직 회임도 하기 전입니다.”
“회임하고 준비하면 너무 늦지 않을까?”
월왕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목운요를 쳐다보았다.
“요아, 뭐 먹고 싶은 음식은 없느냐? 몸을 잘 보살펴야 해. 그래야 건강하게 아이도 낳…….”
거기까지 말한 월왕이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에 슬픔이 스쳐 갔다.
아마 선대 황후가 떠오른 것일 터였다. 선대 황후는 월왕 마음에 맺혀 있는 응어리였다.
목운요는 애써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폐하와 사야의 연기는 이 정도면 충분한 듯합니다. 이제는 저와 황후 마마의 실력을 감상해 보시어요. 도오의 귀에 제 가짜 회임 소식이 금세 들어갈 것입니다.”
월왕이 목운요를 지극히 아끼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도오는 분명 이 미끼를 덥석 물 것이다.
도오가 첩자를 심어 놓은 것을 파악한 목운요는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상황을 꾸몄다. 그것도 국상 기간에 회임한 것으로 말이다. 이건 그야말로 대역죄였다.
“요아, 이런 일까지 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설령 연극이라고는 하나 목운요에게는 당분간 속 시끄러운 나날이 예고돼 있었다.
“곧 지나갈 테니 걱정 마세요. 그나저나 오늘 서재의 물건들이 망가져 버렸던데, 성 공공에게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기록해 놓으라고 하세요. 북강을 잠재우고 나면 폐하께 다 물어내라고 해야겠어요.”
“알겠다.”
한편, 목운요가 입덧처럼 헛구역질을 몇 차례 한 것을 본 첩자는 재빨리 도오에게 서신을 보냈다.
서찰을 확인한 도오는 의기양양하게 웃어젖혔다.
“천지신명이 우리 북강의 편이로구나.”
* * *
얼마 뒤, 서릉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불효하기 짝이 없는 월왕과 그 왕비가 국상 기간에 동침하여 회임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에 궁은 발칵 뒤집혔다.
관원들은 월왕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곧장 황제에게 올렸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장례 기간에 회임을 한 건 선황에 대한 불경 중의 불경이옵니다. 월왕과 월왕비를 엄벌하시어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시옵소서.”
사실 이런 일은 그저 모른 척 넘어갔을 뿐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월왕비의 회임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돼 버려 황제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해진 상태였다.
황제에게서 찬바람이 쌩하고 불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어찌 믿을 수 있겠나. 월왕에게 그 정도 분별은 있네.”
“폐하, 한낱 소문이라고는 하오나 철저하게 조사하셔야 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네. 시일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질 걸세.”
황제가 호응하지 않으니 관원들도 더 주장할 도리가 없었다.
관원들이 모두 물러나자, 황제는 곧장 월왕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시진가량 언성을 높여 다투었다.
이내 월왕이 분을 참지 못하고 대전에서 나왔다. 어찌나 실감 나게 분노를 터트리던지 보는 이들은 감히 다가서지도 못하였다.
한편, 장공주는 공주부로 목운요를 불러들였다. 외손녀가 보고 싶어 곁에 며칠 두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이들은 월왕비의 회임 소문이 사실이라는 데에 더 무게를 싣고 있었다.
* * *
칠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황후 민방화는 궁중 연회를 열고, 삼품 이상의 관원들과 그 가족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공주부에서 장공주, 허연한과 함께 차를 마시던 목운요도 황후가 보내온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외할머니, 같이 가시겠어요?”
“난 괜찮다. 그보다 항시 조심하렴.”
장공주도 목운요와 월왕의 계책을 알고 있었다. 위험한 작전이라 내심 염려가 되었지만, 북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 놓으세요. 황후 마마께서 첩자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계시니 변고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절대 방심해서는 아니 된다. 명심해.”
장공주는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재차 당부했다.
“도오, 그자를 결코 얕잡아 봐서는 안 돼. 북강 왕이 가장 아끼는 신하가 아니더냐.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야. 그리고 그림자 호위도 경계를 늦추지 않게 단단히 일러두렴. 알아듣지?”
“네. 그럴게요. 심려 끼쳐 드리는 일 없을 거예요.”
장공주의 말을 마음에 새긴 목운요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 * *
칠석 당일.
금란과 금교가 목운요의 옷매무새를 세심히 만져 주고 있는데, 선령이 찾아왔다.
목운요의 몸을 한 바퀴 빙 돌려 차림새를 구경한 그녀가 말했다.
“정말 곱네. 나도 이런 옷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채의에게 하나 지어 놓으라고 할게.”
선령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공짜로 입을 수야 없지. 옷값으로 이 명의께서 맥을 한번 짚어 드리리다.”
그녀가 목운요의 손목에 손가락을 살며시 올리고는 짐짓 심오한 표정으로 맥을 짚었다.
그에 목운요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연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목운요가 선령을 끌어 앉힌 뒤 금란과 금교에게 차를 내오도록 했다.
“그래, 어떻습니까?”
선령이 의아한 얼굴로 목운요의 얼굴을 응시했다. 왼팔 진맥을 마친 그녀가 오른팔에 손을 올리고는 맥을 가만히 느꼈다.
“너, 정말 회임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목운요는 헛웃음이 나왔다.
“전부 거짓 소문이야. 그걸 믿었어?”
“아니야, 회임이 맞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선령이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임신 징후를 알리는 맥이 실제로 느껴진 것이다.
농담이라 여겼는지 목운요의 얼굴에는 계속해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러다 진지한 선령의 얼굴에, 얼른 제 손목을 지그시 눌러 보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데?”
“의술은 이제 실력이 비슷하지만, 진맥은 아직 내가 한 수 위야. 확실해. 정말 회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