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진흙 구덩이
월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목소리에는 노기가 어려 있었다.
“북강에서 쓴 약에 취해 저는 혼절을 했고, 깨어나 보니 공주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이건 북강에서 저를 음해하려는 계략임이 분명합니다.”
“폐하.”
도오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호소했다.
“폐하, 그 비수가 선황의 하사품이라면 월왕은 평소 중히 보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물건을 누가 훔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이뿐이 아닙니다. 월왕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영군진의 대역을 수행하면서도 줄곧 비협조적이었습니다. 이건 엄연한 항명 행위입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공주 전하를 겁탈하려다 공주 전하께서 격렬하게 저항하시자,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월왕이 냉소를 흘렸다.
“도오, 내가 혁련이락을 죽이는 걸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군.”
“어디 직접 보아야만 알겠습니까? 방 안의 증거들이 이런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추리 능력이 아주 대단하군. 설마 본 왕한테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폐하, 우항이 방에 있던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태의가 조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분명 미약의 흔적이 발견될 것입니다.”
“우항을 들라 하라.”
안으로 들어선 우항이 인사 올린 뒤, 초를 내려놓고는 한쪽으로 물러섰다.
부름을 받은 태의는 초를 꼼꼼하게 살폈다. 잠시 후 그가 의아한 듯 말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초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사옵니다.”
월왕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태의를 응시했다.
“제대로 확인한 게 맞나?”
태의가 움찔하더니 다시 물건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역시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확실히 이상이 없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도오의 눈에 차가운 조롱이 스쳤다.
“월왕 전하, 이래도 우기시겠습니까?”
도오의 일 처리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월왕은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이를 살며시 깨문 월왕이 착 가라앉은 낯빛으로 말했다.
“폐하, 태의들을 더 불러 주십시오.”
황제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그리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지.”
곧 또 다른 태의가 등장했다. 몇 번이고 검사를 해 보았지만 그의 결론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우항이 가져온 물건은 멀쩡했다.
그에 북강 사신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폐하, 월왕은 오만하기 이를 데가 없사옵니다. 북강과 대력조의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고 공주 전하를 살해하였으며, 소신들을 죽여 입을 봉하려 했습니다. 부디 월왕을 엄하게 다스려 공주 전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월왕, 아직 할 말이 있는가?”
“폐하, 월왕비에 대한 제 일편단심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신은 대력조와 북강의 평화를 적극 지지하는 바입니다. 상황이 그리 긴박하지만 않았어도 결코 칼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북강 사신들은 더욱 분개했다.
“폐하, 월왕은 거짓을 고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있던 대력조의 관원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제의 한숨이 깊어졌다. 난처한 기색의 황제가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 일은 확실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 좀 더 신중히 파헤쳐 보는 것이…….”
“폐하, 공주 전하께서 이리 비참하게 목숨을 잃으셨으니 저희 대왕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월왕이 서늘하게 웃었다.
“지금 폐하를 협박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의견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공주 전하께서 살해당하셨으니 그 범인을 엄벌에 처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저희 북강이 대력조에 비할 바는 아니나 함부로 얕볼 나라도 아닙니다. 반드시 결론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알겠소. 이 사안에 대해 북강 왕과 논의해 보겠소. 월왕은 그동안 조정 일에서 잠시 손을 떼고 쉬도록 하게. 북강 사신들은 물러가 치료부터 하시오.”
황제가 월왕을 당장에 벌하지 않자 북강 사신이 강력하게 불만을 터트렸다.
“폐하, 월왕이 사람을 죽인 증거가 이리 명백하온데도 어찌하여 그냥 두시는 것입니까!”
“물러가라 했소.”
황제의 말에 금위군이 소란을 피우는 북강 사신을 에워쌌다. 결국 북강 사신들은 대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월왕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휙 하니 대전을 빠져나갔다.
얼굴이 팽팽하게 땅겨진 월왕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도오는 미리 심어 놓은 첩자를 불러들였다.
“월왕부 쪽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월왕은 곧장 월왕부로 돌아간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인께서 입궁하여 월왕과 시시비비를 가리시는 사이, 월왕비가 그 소식을 듣고는 의덕 장공주를 알현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다시 월왕부로 돌아갔습니다. 장공주부에서도 특이한 동향은 없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되짚던 도오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북강에게 더없이 유리하게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북강 사신들이 황급히 도오를 찾아와 방금의 일을 두고 갑론을박하였다.
“도 대인, 황제는 월왕을 처벌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습니다. 증거가 이렇게 확실한데도 흐지부지 넘기려는 게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도 대인, 대왕께 당장 서찰을 보냅시다. 황제가 월왕을 엄벌하도록 압박을 넣으라고 간청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월왕을 끌어내리지 못하면 공주 전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사신으로 뽑혀 온 이들은 대개 도오의 심복이었다. 그렇기에 도오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애초에 월왕의 자리를 박탈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고생한 이유가 뭡니까? 공주 전하까지 희생시키면서 말입니다.”
“황제가 즉위하는 데엔 월왕의 공이 컸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이제 그를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도오가 음험한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월왕을 단숨에 없애면 대력조 황제의 눈엣가시를 없애는 것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월왕이 살아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월왕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월왕은 살아 있을 때 쓸모가 더 큽니다.”
“월왕이 불충한 마음을 품을 때까지 계속 몰아붙이잔 말씀이시죠? 우리는 옆에서 구경하며 실속만 챙기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월왕은 결코 순순히 있을 위인이 아닙니다. 게다가 영군릉을 통해 들은 정보에 의하면 그는 선황의 친자식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지금 황제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죠. 그러니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반란밖에 더 있겠어요?”
“하나 월왕은 황제에게 지극 정성이지 않습니까? 저항의 기미도 없고…….”
“용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제껏 참고 있는 걸 보면 월왕이 아직 덜 당했나 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쉬운 지름길이 있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사신들이 일제히 귀를 기울이며 빛나는 눈빛으로 도오를 바라봤다.
“바로 월왕비를 이용하는 겁니다.”
“월왕비라면 월왕이 탄핵 상소를 받으면서까지 들인 여인이 아니요? 보통 아끼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 월왕비가 월왕의 역린인 셈입니다. 그리고 아주 귀한 정보를 하나 얻었습니다. 잘만 이용하면 대력조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도 있어요.”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거칠었다.
“대인, 대체 무슨 정보입니까? 우리는 뭘 하면 되고요.”
“정보가 확실해지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대왕께 서찰을 보내려면 마침 시간이 걸리니 일단 기다려 봅시다. 그냥 있기 적적하시면 황제를 알현해 호소라도 하세요. 대신 태도의 강약을 잘 조절하셔야 합니다.”
물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다 황제가 선수를 쳐서 북강에 선전 포고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황제는 갓 즉위하여 세력 기반이 그리 공고하지 못해요. 그러니 무모하게 전쟁을 벌일 리가 없습니다. 한데 황제가 움직여 줘야 우리도 월왕의 반란을 부추길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대인, 월왕이 우리 동료들을 죽였잖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그를 돕는 건…….”
도오가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왜 그리 생각이 짧으십니까? 우리 계획이 성공하기만 하면 대력조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겁니다. 황제와 월왕이 완전히 등을 돌렸을 때가 비로소 역병을 옮겨 올 적기라고요. 그때가 되면 지금의 원한을 백배, 천배로 대갚음해 줄 수 있습니다.”
“역시 대인은 비상하십니다.”
도오가 수염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럼 이제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 * *
월왕부 내 서재에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성 공공을 비롯한 하인들은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소식을 들은 목운요는 금란과 금교를 대동하고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성 공공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목운요를 맞았다.
“왕비 마마, 전하께서 궁에서 돌아오신 후로 줄곧 저러고 계십니다. 제발 좀 말려 주십시오. 저러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쩝니까.”
“알았네. 다른 하인들 데리고 물러나 있게.”
목운요가 이내 서재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문으로 물건이 날아들었다. 뒤이어 월왕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다 꺼지라 하지 않았느냐!”
“사야, 저예요.”
방 안에서 때려 부수는 소리가 뚝 그쳤다. 잠시 뒤 문이 스르륵 열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월왕에게선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안색도 말이 아니었다. 깨진 도자기에 베였는지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사야…….”
“운요.”
월왕은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
“안은 너무 엉망이니 후원으로 가지.”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