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계략에 걸려든 월왕?
북강 사신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월왕 전하, 하지만 민간 풍습에 따르면…….”
“본 왕은 시간은 귀하오. 계속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참이오? 어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이만 가 보겠소.”
다시금 민간 풍습을 들먹이려는 사신의 말을 월왕이 단칼에 잘라 냈다.
결국 도오는 손을 휘저어 실언을 한 사신을 물리었다.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여봐라, 공주 전하를 모셔 오거라.”
이윽고 붉은 면사포를 내려 쓴 혁련이락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했다.
혼례의 진행은 북강 사신이 도맡았다. 혁련이락이 나타나자 그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길시가 되었으니 혼례를 거행하겠습니다.”
하나 혼례당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축하하는 소리도, 풍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에 혁련이락은 이를 악물었다. 이게 어디 혼례식이란 말인가! 문득 월왕이 목운요와 혼인하던 날의 그 시끌벅적한 경사스러움이 떠올랐다.
붉은 융단이 황궁에서부터 월왕부까지 깔린 데다, 길 양옆으로 신이 난 얼굴의 백성들이 촘촘하게 서 있었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비단 꽃으로 어여쁘게 치장까지 해서 한겨울의 춘삼월이 따로 없었다.
“천지신명께 절을 올리시오.”
혼례 진행자가 목청을 높여 알렸다.
그 소리에 혁련이락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다시 교태롭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오늘 밤, 월왕의 마음만 빼앗아 오면 충분히 전세 역전을 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에 가서 웃는 사람이 누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법.
바닥에 무릎을 꿇은 혁련이락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절을 올렸다.
그러나 월왕은 꼿꼿이 서서 영군진의 위패를 찾기 바빴다.
“천지신명께 절을 하라 하지 않소. 어서 영군진의 위패를 가져오지 않고 뭣들 하는 게요?”
도오가 껄끄러운 기색을 그대로 내비쳤다.
“월왕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께서도 영군진 대신 전하께서 혼례 올리는 걸 윤허하셨사옵니다. 잊으신 건 아닐 테지요.”
“물론 잊지 않았소. 하나 폐하의 뜻은 본 왕더러 대신하라는 것이었소. 그러니 본래 신랑이 자리해야 이치에 맞지 않소. 영군진은 이미 죽었으니 그 위패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오. 도 대인, 우리의 민간 풍습을 그리 잘 알면서 이걸 모르진 않을 테지요?”
도오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월왕은 위패를 가져오지 않으면 절도 올리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하는 수 없이 도오는 수하를 시켜 영군진의 위패를 가져오게 했다.
그제야 월왕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야 옳지. 영군진, 자네의 혼례일세. 신랑이 신부 옆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여봐라. 이 위패를 북강 공주의 품에 안겨 드리거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항이 위패를 혁련이락에게 떠넘겼다.
만족스레 웃은 월왕은 방석에 앉는 대신 그 옆에 선 채로 대강 고개를 숙였다.
비협조적인 월왕의 태도에 북강 사신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월왕 전하, 이건 우리 공주 전하를 무시하는 처사이옵니다.”
월왕이 콧방귀를 뀌었다.
“혼례까지 치르는 마당에 혁련이락은 더 이상 북강의 공주가 아니라 평민 영군진의 처일 뿐이오. 호칭을 제대로 붙이시오. 한데 자네는 누구기에 본 왕에게 이리 무례하게 구는 것이오?”
그와 함께 우항이 앞으로 나서서는 장검을 빼들었다. 그 예리한 검 끝이 북강 사신들을 향해 번쩍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대력조 관원들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월왕과 북강 대신들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도오가 볼을 움찔하더니 얼른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월왕 전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북강으로 돌아가면 대왕께 보고해 필히 죄를 묻도록 하겠습니다. 혼례는 길시가 정해져 있으니 늦어져서는 안 됩니다. 계속 혼례를 진행해 주십시오.”
그제야 월왕이 우항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장검이 칼집에 내리꽂혔다.
도오는 일순 월왕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의 기세는 위엄이 넘쳤고 살기가 등등했다. 전장에서 죽음의 신이 되어 활개 치는 그의 모습이 뇌리를 번뜩 스쳤다.
혼례를 진행하는 북강 사신도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닦아 내고는 소리쳤다.
“부모님께 절을 올리시오.”
혁련이락은 속상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절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월왕이 제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다.
“영군진은 이미 평민이 된 몸이라 부모도 없는 신세요. 그러니 본 왕이 절을 하는 건 예법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지 않겠소? 다들 불만은 없을 테지요?”
도오가 애써 평정을 가장한 채 손을 모아 올리며 말했다.
“어찌 불만이 있겠사옵니까.”
월왕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내 북강 사신이 부부 맞절을 외치자, 월왕의 눈짓에 따라 우항이 혁련이락의 손에 들린 위패를 낚아채 방석에 놓았다.
“영군진, 마지막 절은 직접 올리게나. 살아생전 온갖 못된 짓은 도맡아 했으나, 혼례를 올리고 부디 한 가닥 선한 마음이라도 품었으면 좋겠구나. 내세에는 좋은 사람으로 살거라.”
절대 월왕의 눈 밖에 나지 말아야겠다! 고개를 숙인 대력조 관원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생각했다.
한편 북강 사신들은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건 영혼 혼례의 대역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입은 살아서 이것저것 구실은 잘도 갖다 붙였다만, 이는 필시 북강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처사임이 분명했다.
“혼례가 마무리되었으니 이만 가 보겠소.”
월왕이 소맷자락을 휙 하니 내젓고는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에 놀란 도오가 황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월왕 전하, 혼례가 아직 끝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가려 하시옵니까?”
내리뜬 월왕의 눈에 섬뜩한 빛이 스쳤다.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 아니었소?”
“전하, 신부와 함께 신방에 가시어 붉은 천을 걷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월왕이 냉소를 흘렸다.
“붉은 천을 떼고 싶으면 스스로 하면 될 것 아니오. 그게 싫으면 평생 달고 살든지.”
“월왕 전하!”
도오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영군진을 대신해 오늘 혼례를 마치라고 하명하셨습니다. 이는 폐하의 명을 어기는 처사임을 모르시옵니까?”
순간 월왕의 눈에서 아까보다 더한 한기가 새어 나왔다.
“좋소.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완수하리다.”
혁련이락은 다시 위패를 집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참는 게 최선이었다.
월왕이 결국 신방에 발을 디뎠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초가 은은하게 타고 있었고, 향긋한 꽃향기가 방 안 가득 그윽했다.
그런데 그 향에서 어쩐지 단내가 어렴풋이 풍겨 왔다. 목운요가 애호하는 춘란의 향이었다.
그 순간, 월왕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혁련이락은 붉은 천을 제 손으로 걷어 올리고는 기쁨 가득한 눈망울로 월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월왕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세게 저었다. 하지만 시선이 점점 더 흐릿해졌다.
“……설마, 약을 쓴 것이냐?”
혁련이락이 얼른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그녀는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전하, 소녀를 지키기 위해 어찌할 수 없었사옵니다. 소녀, 영군진에게 시집가고픈 마음을 단 한 번도 품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월왕 전하뿐이었사옵니다.”
월왕은 이제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혁련이락…… 내 너를…….”
“전하.”
혁련이락이 월왕을 부축해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제 혼례복을 하나하나 풀어 헤쳤다. 이제 붉은색의 반투명한 비단옷만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월왕 곁에 앉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전하, 소녀를 부디 가엾이 여겨 주시어요.”
월왕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자 혁련이락은 진하게 미소 지었다. 월왕이 돌부처가 아닌 이상 눈앞에 있는 자신을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었다.
혁련이락의 손이 그의 허리춤에 닿으려는 순간, 팔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퍽 소리와 함께 그녀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월왕은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에는 혁련이락을 향한 혐오감이 가득했다. 그는 욕을 하는 것도 아까운 듯 그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이런 수를 예상하고 미리 해독제를 챙겨 온 게 다행이었다.
“월왕 전하!”
혁련이락이 분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토로했다.
“소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하를 흠모했사옵니다. 이번에 대력조에 온 것도 전하와 함께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전하께서는 이미 다른 여인과의 혼례를 준비하고 계시더군요.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영군진을 택한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애타는 부르짖음에도 월왕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전하, 사모합니다. 진심으로요. 절 믿어 주시옵소서.”
그때, 월왕이 발을 멈추었다.
혁력이락은 기대감으로 만면에 화색이 가득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이어 들려온 그의 말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 안 가득 피 맛이 느껴졌다.
“목운요가 그리도 좋으십니까? 목운요가 무엇이기에 소녀를 이리도 매몰차게 내치시옵니까?”
월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에 혁련이락이 바닥에 엎드려 하염없이 통곡하였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혼례복을 집어 들어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대체 왜, 왜!”
그 순간, 문가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그녀는 월왕이 되돌아오는가 싶어 얼른 고개를 들었다.
하나 기대와 달리 도오가 호위 둘을 대동하고 들어오고 있었다. 혁련이락은 황급히 옷으로 몸을 가리고는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도 대인, 이게 무슨 짓이죠? 당장 나가세요!”
하지만 도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뒤에 선 호위에게 손짓할 뿐이었다.
호위들은 곧장 혁련이락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