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410화 (410/442)

410화 끝없는 욕심

“북강에서 월왕을 끌어들인 것도 분명 폐하와 월왕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계략일 것이네.”

그러나 목운요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지금으로서는 북강의 속셈을 간파할 재간이 없으니 말을 아끼는 수밖에 없었다.

“마마,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만 출궁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민방화는 손을 뻗어 목운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운요, 당분간 자네 속을 태울 일들이 많을 거야.”

“마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상황이 진정되면 은자나 몇 냥 챙겨 주시면 되지요.”

그에 민방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

“대장공주(大長公主, 천자의 고모)께서 자네를 돈벌레라고 하시더니, 오늘 보니 그 말이 딱 맞네.”

목운요는 그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군자도 도를 지켜 재물을 가까이한다 했습니다. 화초나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은자를 좋아하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그래그래. 자네를 말로 어떻게 이기겠나.”

민방화는 목운요가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외부에 시늉을 할 만큼 적당히 시간도 끌었다고 생각해 목운요를 돌려보냈다.

한편, 서릉에는 이러쿵저러쿵한 소문들이 벌써 나돌기 시작했다.

황후가 월왕비를 입궁시켜 긴 시간 대화를 나눈 뒤, 월왕비가 병이 났다는 것이었다.

어디 이뿐인가. 장공주 쪽에서 조용한 것도 황후를 보러 갔다가 문전박대당하는 바람에 화병으로 드러누워서라는 소문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거기에 황제를 둘러싼 풍문까지 나돌았는데, 월왕과 월왕비가 황제의 압박을 못 이기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하운방과 불선루를 헌납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뜬소문에 다들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얘기가 점점 그럴싸하게 꾸며지면서 믿는 사람이 날이 갈수록 늘었다.

목운요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에 금 부인은 다급히 그녀를 찾아갔지만, 외부인의 접견은 불가하다는 정중한 통보만 받았다. 어쩔 도리가 없는 금 부인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 * *

삼 개월의 상을 다 치른 진왕부에는 붉은 비단과 오색 천이 내걸려 나부끼고 있었다. 짐짓 보면 경사라도 난 모양새였다.

북강 공주 혁련이락은 도오와 만남을 가졌다.

진왕부에 갇힌 신세였지만 그녀의 몸은 아주 건강해 보였다. 다만 심적으로는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도오를 보고는 희색이 만면하여 물었다.

“도 대인, 오라버니가 날 구하러 보낸 건가요?”

도오는 앞으로 다가가 절을 올렸다. 아주 정중한 몸가짐이었지만 말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대왕께선 공주 전하께서 이곳에서 하신 처사에 상당히 실망하셨습니다.”

당황한 혁련이락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도오는 오라버니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기에 아무리 그녀라도 멋대로 위세를 부릴 수 없었다.

“계획에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유왕과 월왕이 암암리에 대책을 세웠을 줄이야. 정말이지 저도 놀랐다고요…….”

“공주 전하께서 하신 경솔한 행동 때문에 대왕께서 다시금 사신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사죄를 위해 두둑한 선물도 같이 보내셨지요. 지금 북강의 형세가 몹시 위태롭습니다. 백성들이 대왕의 통치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데다 반역의 기미까지 보입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역병 처방전을 구해서 북강의 소란을 막아야 합니다.”

“오라버니께서 무슨 분부라도 내리셨나요?”

“제게 뒤처리를 맡기셨습니다. 이리저리 고민해 봐도 공주 전하께서 대력조 황실과의 혼약을 지켜 내시는 게 방도일 듯합니다.”

번쩍 고개를 쳐든 혁련이락이 격렬하게 분노하며 받아쳤다.

“죽은 사람과 혼례라도 치르라는 건가요?”

영군진과 좋은 척 지내는 것도 부아가 치밀었는데, 이제는 죽은 영혼과 혼약까지 이행하라니. 이건 그녀를 농락하는 처사였다. 쓸모를 다한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것 아니겠는가.

“공주 전하, 북강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은 반드시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나 영군진은 이미 죽고 없어요. 게다가 평민으로 신분이 박탈되지 않았습니까? 나는 엄연한 북강의 공주예요. 설마 북강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을 나더러 하라는 건 아니겠죠?”

순간, 고개를 살며시 내린 도오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그 말씀은 혼약을 거역하시겠다는 겁니까?”

“당연하지요.”

“알겠습니다. 하나 공주 전하께서 제 계획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영군진과 혼인할 일은 없으니 그건 염려 마십시오.”

그 말에 혁련이락이 분노를 가라앉혔다.

“계획이 있나요?”

“영군진 대신 월왕이 공주 전하와 혼례당에 들 것입니다. 이미 황제의 윤허도 떨어졌지요. 그러니 이 기회를 잘 잡으셔야 합니다.”

“월왕이요?”

혁련이락은 놀란 토끼 눈이 됐다. 심장도 두방망이질 쳤다.

“지금 워, 월왕이라고 했나요?”

도오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미 저승에 간 평민과,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월왕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공주 전하께서도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혁련이락은 기쁜 속내를 감추려 했지만 입꼬리가 주책없이 자꾸만 올라갔다.

“하지만 월왕은 제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고 들었어요. 첩은 들이지 않겠다고도 했다는데…….”

“공주 전하는 북강 제일의 미색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혁련이락이 손으로 살며시 제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알았어요. 도 대인, 염려 마세요. 약부터 얼른 구해 볼 테니까요.”

“전하, 어서 준비를 하시지요. 곧 때가 됩니다.”

“좋아요.”

도오가 나가자, 혁련이락은 거울 앞에 앉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흥분한 기색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북강의 여러 공주 중에서도 신분이 가장 존귀했다. 선대 북강 왕후의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현재 북강 왕과의 사이도 돈독한 덕이다.

사실 이번 대력조와의 혼사도 그녀가 원치 않으면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력조에 갈 기회를 앞에 두고 혁련이락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북강 왕을 찾아가 직접 통혼을 청하기까지 했다. 이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그녀의 속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월왕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는 창 한 자루와 말 한 필로 북강의 수백 군사를 무찌른 용맹한 사나이였다.

월왕이 북강 장수의 목을 잘라 산비탈로 굴려 보냈을 때, 북강 백성들은 잔뜩 겁에 질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조아렸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이 들면서도 외려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월왕이야말로 영웅이었고, 전쟁의 신이었다.

하지만 대력조에 당도해 보니 불행히도 그는 이미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게다가 혼인을 올리기 직전이었다.

결국 그녀는 제 연정을 숨긴 채 북강의 실리를 고려해 영군진을 부군으로 선택했다. 하나 벽에도 발리지 않는 무른 진흙처럼 영군진은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완전히 패배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기사회생의 기회가 왔다. 혁련이락은 그녀 마음속 영원한 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목운요를 제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혁련이락은 공들여 치장한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거울에 비친 눈썹이 교태를 흘리며 들썩이고 있었다. 곱게 분을 바른 얼굴에 떠오른 수줍은 미소와 달리, 가슴 깊은 곳은 세차게 요동쳤다. 그녀가 뛰는 심장을 달래려는 듯 가슴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월왕 전하…….”

* * *

목운요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월왕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런 월왕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전하, 곧 혼례인데 어서 가셔야지요.”

그 말이 월왕의 감정을 충동질했다. 그가 목운요를 끌어당겨 와락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목운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이내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월왕은 제 입술에 장난을 치는 그녀의 손을 살짝 깨물었다.

“부인은 어째 질투도 하지 않는 거지?”

깨물린 손가락을 빼내려는데 월왕이 세게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질투해요, 질투해.”

월왕의 재촉에 못 이겨 한 말이었다. 그는 북강 공주와 정말 혼례를 치르는 게 아니었다. 그저 혼례를 대신 치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목운요 입장에서는 시기심이 일어날 까닭이 없었다.

반면 월왕은 모든 상황이 탐탁지 않았다. 벌레를 한 움큼 삼켜도 지금보다는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요아가 손수 만든 음식이 먹고 싶다.”

월왕은 어리광을 부려서라도 답답한 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다.

그에 목운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다녀오시면 직접 만들어 드릴게요.”

“그리고…… 옷도 하나 지어 주겠나? 요아가 만들어 준 건 한 벌뿐이라 그리 아껴 입었는데도 이미 낡아 버렸어.”

순간 목운요의 마음이 짠해졌다. 그녀는 자수 놓는 걸 즐겼고, 가까운 이에게 옷을 만들어 주는 걸 기쁨으로 삼았다. 그런데 정작 월왕의 옷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전하의 옷은 전부 제가 지어 드릴게요. 아주 근사한 걸로요.”

말도 참으로 예쁘게 하는 목운요였다. 어느새 귀까지 붉어진 월왕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요아, 우리 오늘 밤에…….”

이내 목운요의 양 볼이 불타는 것처럼 발그레해졌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부끄러운 나머지 괜스레 성을 냈다.

“어서 진왕부로 가 보세요. 더 꾸물대시면 국물도 없어요.”

“허락한 걸로 알고 이만 가 보지.”

월왕은 기어이 목운요의 볼에 입까지 맞추고는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목운요가 볼을 매만지며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 * *

진왕부는 화려하게 장식돼 경사 분위기를 한껏 내고 있었다.

북강 사신들은 월왕이 도착하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오셨습니까?”

월왕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했다. 그들과 정겹게 인사를 주고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른 시작합시다. 끝나고 급히 가야 하오.”

“분부대로 하지요.”

자리를 채운 대력조 관원들은 냉랭한 기운을 내뿜는 월왕을 보고 절로 탄식을 내뱉었다. 망자를 대신해 이런 짓을 하려니 저 속이 오죽할까!

그사이 북강 사신들이 신랑의 예복을 내왔다.

“월왕 전하,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월왕은 냉소를 머금으며 조롱을 퍼부었다.

“오늘 혼례의 주인공은 영군진이오. 그러니 이 옷은 위패에 감싸 놓으시오. 평민이 된 주제에 북강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니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소. 분명히 기뻐할 것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