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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409화 (409/442)

409화 가당치도 않은 제안

목운요는 한가로이 칠현금을 켜고 있는 와중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월왕이 의자를 가져와 목운요 옆에 앉더니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요아, 손을 다칠 수도 있으니 그만하자.”

월왕은 생각할수록 자신이 했던 행동이 얼마나 유치했는지 깨닫고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의심을 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목운요가 절대로 그를 위해 칠현금을 켜지 않을 거란 영군진의 망언과 달리, 그녀는 그를 위해 일부러 칠현금을 연마하기까지 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월왕은 속으로 내심 뿌듯했다. 유치하다는 걸 잘 알지만 도무지 제 감정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한데 북강의 목적이 무엇인지 가늠이 가느냐?”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공주를 이미 죽은 자한테 시집보내려는 속셈이 수상하네요.”

* * *

아니나 다를까. 혼례 준비가 한창일 무렵, 북강 사신 중 우두머리가 갑작스러운 제안을 꺼냈다.

“폐하, 영군진이 이미 죽었으니 이 혼례는 명백히 영혼 결혼인 셈이지요. 어떻게든 이 음기를 없애야 대력조나 북강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다만,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 건가?”

황제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도오를 보며 물었다.

도오는 황제의 그런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대력조의 민간 풍습에 대해 알아본 바로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죽은 자의 친족이 대신 혼례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영군진을 대신해 공주와 혼례를 올릴 가장 적합한 사람은 월왕 전하라고 생각합니다.”

도오의 말에 월왕이 곧장 차가운 눈으로 도오를 쏘아보았다.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대신들의 얼굴에도 노기가 떠올랐다.

월왕을 대신해 울분을 토하는 것이 아니었다. 감히 대력조 황실의 존엄을 모욕한 북강 놈들의 짓거리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월왕 전하는 우리 대력조에서 아주 중요한 분이십니다. 지엄하신 왕야께서 평민 따위를 대신해 혼례를 올리시다니요. 어찌 그런 가당치도 않은 말이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혼약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하기에 신의를 중시해 그런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순전히 우리 대력조를 욕보이려는 수작입니다.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폐하, 이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요구입니다. 소신들의 뜻을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대신들의 강한 반발에도 도오는 태연하기만 했다.

“대력조를 욕보이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민간 풍습을 따르고자 할 뿐이옵니다. 폐하와 대신들께서 믿지 못하시겠거든 직접 조사해 보셔도 좋습니다. 월왕 전하와 영군진의 신분이 천양지차라지만, 혈연인 것은 사실이옵니다. 월왕 전하께서 영군진을 대신하여 혼례당에 드시는 건 한낱 평민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두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도록 사악한 기운을 없애는 것이 그 목적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존귀하시다고는 하나, 대력조까지 발아래로 두시는 건 아닐 테지요.”

황제의 눈빛이 자못 심각해졌다.

“월왕의 의견은 어떠한가?”

월왕은 차갑지만 정중한 자세로 답했다.

“폐하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황제가 미간을 좁히고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물론 황당한 일임은 틀림없소. 하나 대력조의 미래를 위해 월왕이 수고를 좀 해야 할 듯싶군.”

월왕은 다소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다시 숙이며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실을 위해 결단을 내린 월왕에게 금 백 냥과 진주 백 말을 하사하겠다.”

황제의 표정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그는 대의를 헤아릴 줄 아는 월왕의 태도에 흡족해하는 듯했다.

대신들은 ‘과연’,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황제가 월왕을 견제하려고 수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그들은 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그저 착각이려니 넘기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황제의 성정이 선황을 꼭 빼닮은 데다, 월왕이 한결같은 충성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형제지간을 두고 대신들은 선황과 의덕 장공주의 전설이 된 미담을 다시금 떠올렸다.

한데 그들의 예상과 달리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월왕을 탄압하는 데 급급했다.

조회가 끝나자 대신들이 무리를 지어 밖으로 나섰다. 여러 목소리가 분분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폐하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 혼사를 수락하시다니.”

월왕은 어엿한 황제의 형제인 친왕이었다. 그런 그가 죽은 자를 대신해 혼인을 하다니. 제아무리 형제라 해도 소름이 끼칠 노릇이었다.

“한데 월왕비가 의덕 장공주의 외손녀 아닙니까? 장공주 전하께서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폐하는 선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공주 전하를 존경해 모시기는 하나, 완전히 제 사람처럼 신임하지는 않지요. 게다가 장공주 전하는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분이시니 폐하와 척을 지지는 않을 겁니다. 어찌 됐든 폐하께서 윤허하신 사안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영군릉이 있지 않습니까. 그 역시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으니 그를 이용하면 북강 놈들이 약이 올라 치를 떨었을 텐데, 왜 굳이 월왕 전하를 꼭 짚으셨는지 당최 이해가…….”

“그만들 하세요. 누가 듣겠습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금교는 놀란 나머지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목운요에게로 황급히 내달렸다.

목운요를 도와 비단에 붉은 염료를 바르던 금란은 헐레벌떡 달려오는 금교를 발견하고는 얼른 꾸지람을 했다.

“왕비 마마께서 계시는데 얌전히 굴지 못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금교는 순간 말이 목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목운요의 면전에서 이 사실을 전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금교가 안절부절못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목운요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금교, 무언가 큰일이 난 모양이군요.”

“왕비 마마, 소인이…… 소인이 들은 얘기로는…….”

목운요의 의아한 표정에 금교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꿇어앉은 금교가 최대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북강 사신들의 청에 따라, 영군진 대신 월왕 전하께서 북강 공주와 혼례를 올리신다고 합니다.”

목운요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모아 주먹을 쥐었다. 그 바람에 정성 들여 발라 놓은 것이 엉망으로 번져 버렸다.

“사야께서 북강 공주와 혼인을 한다는 말이냐?”

금란이 얼른 끼어들어 금교의 말을 거들었다.

“왕비 마마, 민간 풍습에서는 영혼 혼례를 치를 시 가까운 혈족이 죽은 자를 대신해 혼례당에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북강 사신도 이 얘기를 하는 듯해요. 월왕 전하께서는 혼례당에만 드실 겁니다. 정말 북강 공주와 혼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고요.”

금교는 자신이 뱉은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라고 느꼈는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의 말이 저 뜻입니다. 영군진 대신 혼례를 마무리하실 거예요.”

그제야 목운요가 찌푸렸던 미간을 풀었다. 하지만 심기가 불편한 티는 역력했다.

그때, 궁녀가 찾아와 전갈을 알렸다.

“왕비 마마, 황후 마마께서 즉시 입궁하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목운요는 한쪽에 있는 대야 물에 붉은 염료가 묻은 손을 씻어 내면서 서늘한 음성으로 답했다.

“알겠다.”

“비 마마…….”

금란이 말을 끝맺지 않고 멈추었다. 목운요를 궁으로 불러들인 목적은 분명 단순치 않으리라.

황제는 월왕에게 영군진의 대역으로 혼례당에 들라며 그의 체면을 깎아내렸다. 그런데 월왕이 환궁하기도 전에 월왕비를 불러들인다? 그녀에게 압력을 넣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위로라도 하려는 것일까?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마차를 준비해요. 사야께서 돌아오시면 사실대로 고하도록 하고요.”

“네.”

* * *

소양궁에 당도한 목운요는 황후를 앞에 두고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왕비 왔는가. 인사는 그만하면 되었네.”

황후의 기색은 더없이 온화했지만, 다분히 거리를 두는 격식을 차린 말투였다.

“월왕의 일을 좀 얘기하려고 보자 했네. 폐하께서 월왕에게 영군진을 대신해 북강 공주와 혼례당에 입장하라고 명한 일은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은 북강과 우리 대력조의 미래가 걸린 사안이네. 자네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니 충분히 이해할 테지?”

목운요가 눈을 들어 올렸다.

“황후 마마, 민간 풍습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 영군진의 형제가 월왕 전하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맏형인 영군릉이 제격인 듯합니다.”

황후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곁에 있던 궁녀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삼켰다.

황후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이내 손을 저어 궁녀들을 물리었다.

궁녀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좀 전까지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후 민방화가 목운요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운요, 방금 자네를 놀라게 한 건 아니겠지?”

목운요가 작게 웃어 보였다.

“마마, 어찌 그리 매서우십니까. 지금도 심장이 쿵쾅거립니다. 선물이라도 하사하여야 이 놀란 가슴이 진정되겠습니다.”

“그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직접 골라 보게. 소양궁 물건을 전부 들어내지만 않는다면야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네.”

그러면서 민방화가 찻잔을 목운요에게 건넸다.

“오늘은 내가 악역을 맡아서 궁녀들이 자네에게 차를 올리지 않을 걸세. 대신 이걸 마시게. 방금 우려낸 거야.”

목운요도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찻잔을 들어 살며시 향을 음미하던 그녀의 눈가에 진한 웃음이 걸렸다.

“역시 절 아시는 건 마마뿐입니다. 불선루에도 차가 그득하지만, 저는 이 하명향로가 제일 좋습니다.”

민방화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월왕이 자네를 푸대접하는 줄 알겠네. 그건 그렇고, 북강 사신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별안간 월왕을 걸고넘어지는 건 또 무슨 속셈인지.”

미간을 좁힌 민방화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일전에 황제가 그녀에게 은밀히 한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과 월왕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상황을 꾸며, 북강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계책이었다.

황제가 월왕을 곤란한 처지에 몰고 난 뒤 민방화가 목운요를 득달같이 불러들인 것도 외부에 보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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