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음모
한 시진 정도 기다린 끝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월왕은 우항과 우의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서 있었고, 성 공공은 옆에서 우산을 들고 있었다. 바람이 워낙 세다 보니 네 사람 모두 비에 홀딱 젖어 있었다.
목운요가 뛰쳐나오려고 하자 월왕이 다급히 말렸다.
“요아, 비 맞으면 안 되니 거기 있거라. 내가 가마.”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 나와 월왕을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월왕의 젖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월왕은 걱정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요아, 괜찮다.”
목운요는 그런 그를 노려보며 손을 바삐 움직였다.
수건으로 몸을 다 닦아 준 뒤엔 새 옷을 갈아입게 하고 침상에 눕혀 맥을 짚었다.
월왕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따랐다.
“요아,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
“폐하께서 정말 무릎 꿇는 벌을 내리신 거예요?”
맥에 큰 이상이 없자 목운요도 그제야 안심이 됐다.
월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미리 말해 주지 않았느냐? 북강을 유인하기 위해 형님과의 불화를 만들어 낼 거라고. 그러려면 어느 정도 고생은 염두에 둬야 한다.”
사실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의 계획이라는 추측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월왕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네 마음을 이렇게나 아프게 하다니, 이번 작전은 기필코 성공해야만 할 것 같구나.”
월왕이 웃으며 목운요를 품에 안았다.
“무릎을 한참 동안 꿇어서인지 온몸이 아파 요아가 챙겨 줘야겠다.”
목운요가 퉁명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챙겨 줄까요, 사야?”
“일단은…… 너무 추우니 이불 안을 따뜻하게 덥혀 주면 좋겠구나.”
월왕이 목운요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문질렀다. 며칠 동안 따로 자다가 겨우 동침할 기회를 얻었는데,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됐다.
그에 목운요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월왕의 허리를 세게 꼬집었다.
“더 좋은 걸로 덥혀 드리죠.”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월왕을 뒤로하고, 목운요는 뜨겁게 달군 탕파 두 개를 가져왔다.
한여름에도 후끈후끈한 이불 속 온기에 월왕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꾀 좀 부리려다 호되게 당하고 만 것이다.
월왕의 서러운 눈빛에도 끄떡없던 목운요는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자 그제야 이불을 젖히고 그의 무릎을 들여다보았다.
“비 오는 날에 석판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제대로 요양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몸을 사리지 않는 월왕이 목운요는 심히 걱정이었다.
그녀는 탕파를 월왕의 무릎에 대고 한참 동안 찜질한 뒤, 침을 놓고 나서야 안심했다.
월왕은 목운요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나머지 그녀를 품에 와락 안았다.
“요아, 네가 있어서 참 행복하구나.”
어려서부터 워낙 고생하고 자라서인지, 죽을 정도가 아닌 이상 웬만한 상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런 작은 상처에도 마음 아파해 줄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했다.
목운요는 손으로 월왕의 이마를 밀며 품에서 벗어났다.
“사야, 결혼한 뒤로 점점 더 질척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하지만 월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녀를 껴안았다.
“질척댄다 해도 요아는 이제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뻔뻔스러운 그의 태도에 목운요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월왕이 무사히 돌아와서 긴장이 풀린 목운요는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어 버렸다.
월왕도 그녀와 체온이 하나가 되는 걸 느끼며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 * *
단오 소동은 다행히 근위병이 제때 도착하고, 선령이 데려온 의원들 덕분에 사망자 없이 마무리되었다.
관원들은 월왕의 공이 컸다고 입을 모았고, 순천부 부윤 심병괴는 특별히 상주서까지 올려 월왕에게 상을 내릴 것을 청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황제는 상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월왕을 불러 크게 혼을 냈다. 뿐만 아니라 조회 때마다 이 일을 빌미로 월왕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며 호통쳤다.
관원들은 모두 어리둥절해했지만, 심병괴와 몇몇 정직한 관원 외에는 그 누구도 차마 월왕을 옹호해 나서진 않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북강 사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웠다.
이번 사신단의 우두머리는 도오(凃獒)라는 자였는데, 북강 왕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 중 하나로 무척 침착한 성격을 지닌 이였다.
“도 대인, 대왕께서 무조건 역병 처방전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대력조 황제는 어떻게든 주지 않으려는 심산입니다.”
“원하는 게 있는 자가 더 자세를 낮춰야 하는 법입니다. 북강을 위해서라면 저희가 고생하는 것 따위야 감수해야지요.”
“고생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이렇게 굴욕을 다 겪고도 처방전을 얻지 못할까 봐 그게 걱정입니다. 차라리 역병을 대력조에 옮기는 게 어떨까요? 그럼 대력조에서 의원들을 보내 치료할 것이고, 그 틈을 타 저희도 처방을 얻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현명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황제가 변경의 백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처방전을 내주지 않는다면요? 혹은 일부러 시간을 끌기라도 한다면 북강은 막강한 손실을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떡하면 좋습니까?”
사신이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공주 전하와 연락이 닿아야 합니다. 공주 전하의 반역 사실로 인해 대력조가 현재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이 국면을 전환해야 합니다.”
“공주 전하의 반역죄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쉽지 않을 텐데……. 심지어 구금당한 공주 전하의 호위 중 일부가 자백까지 한 마당에…….”
“강제로 무마시키는 건 당연히 안 되지요. 하지만 공주 전하께서 대력조와 통혼을 맺기로 한 건 사실이지요.”
사신들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영군진이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데다 지금은 죽었거늘…….”
“사람은 죽었지만, 혼약은 살아 있습니다. 대력조 풍습에 의하면 약혼을 한 이상 남편을 따라야 하니, 따지고 보면 공주 전하께선 더 이상 북강 사람이 아닙니다.”
사신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혁련이락 공주와 북강 왕은 사이가 각별했다. 도 대인은 공주의 혼약을 빌미로 역병 처방전을 얻어 내려는 것 같은데, 혹여라도 북강 왕이 노하기라도 한다면 그들 누구도 그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도오가 지레 겁먹은 사신들을 보고 냉소를 지었다.
“저희 모두가 북강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고 있는데, 공주로서 북강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 또한 당연지사 아닙니까.”
“대인……. 대체 어쩔 생각이십니까?”
“전세를 역전하려면 일단 대력조로 하여금 북강에 신세를 지게 해야겠지요. 곽씨 가문 사람들이 준비해 둔 밀정 중에 아직 쓰지 않은 자가 몇이나 되죠?”
“얼마 없습니다. 궁 안에 세 명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거의 다 제거되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들을 시켜 월왕을 면밀히 감시하여, 황제와의 사이가 정말로 틀어진 건지 알아보게 하십시오.”
“월왕이요?”
“예. 두 사람이 정말 틀어진 거라면 저희에게 있어서는 큰 기회입니다. 월왕은 영군진이나 영군릉같이 실권이 없는 자들과는 달리, 월서의 팔만 장병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요. 게다가 의덕 장공주의 외손녀를 왕비로 맞아 엄청난 민심을 얻었으니, 그가 움직여 준다면 대력조가 누구 손에 들어갈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황제와 월왕 두 사람 사이가 유별나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대력조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예로부터 지금까지, 황제의 등극을 도운 공신 중 천수를 다한 자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입니다.”
* * *
궁 안에 숨어 있던 밀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소탕에도 살아남았다는 건 그만큼 은밀히 숨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목운요는 유일이 전해 온 쪽지를 월왕에게 전했다.
“사야, 이것 좀 보세요.”
“곽씨 가문이 생각보다 대단하군. 복수를 위해 백 년 가까이 계획하고, 부와 명예도 과감히 포기하다니.”
“자신의 신조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죠. 곽씨 가문처럼요.”
“그자들이 대력조에 충성을 다했더라면 필시 대단한 쓰임을 받는 큰 인물이 되었을 텐데, 아쉽구나…….”
전조 대신 중에서도 귀순한 이는 꽤 있었다. 유독 곽씨 가문만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북강으로 망명해 복수를 다졌으니, 그 뚝심이 대단하면서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북강 사신들이 사야와 폐하께서 함께 꾸민 고육지책에 신경 쓰기 시작한 듯하네요. 물론 정말로 믿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요.”
“믿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걸려들었을 거다. 전에 네가 서신으로 북강과 영군진의 연합을 성사시켰듯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기만 해도 어떻게든 그 속을 꿰뚫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월왕은 마치 아주 사소한 얘기를 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목운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운요도 덩달아 입가가 올라갔다.
“북강이 곽씨 가문이 남겨 둔 밀정을 움직였다는 건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니 앞으로가 중요하겠네요. 사야와 폐하께선 사람들이 완벽히 속아 넘어갈 정도로 진짜처럼 꾸미셔야 해요. 외할머니와 어머니께는 제가 미리 말씀드려 놓을게요.”
“그래.”
* * *
그 후로 북강 사신들은 역병 처방전 얘기는 쏙 빼고, 북강과 대력조의 통혼을 서둘러 달라며 재촉했다.
영군진은 이미 죽어 없고, 혁련이락의 죄명도 정해지지 않은 마당에 통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두머리인 도오를 비롯한 사신단들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결국 황제는 북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영군진의 진왕 봉호 회복은 거절했다. 그 말인즉, 북강 공주는 대력조의 평민에게 시집가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 되는 것이다.
이에 북강 사신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대력조 관원들도 질세라 그럼 없던 일로 하자며 반박했다.
황제는 냉담한 표정으로 결정적인 한마디를 했다.
“당신들 말대로 이 혼사는 선황제께서 허락하신 일이고 어명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하오. 하나 마찬가지로 영군진을 평민으로 강등시킨 것도 짐이 직접 내린 어명인데, 어찌 한번 뱉은 말을 쉽게 다시 주워 담을 수 있겠소?”
북강 사신들도 더 이상은 우기지 못하고 그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영군진의 신분 회복은 물 건너갔지만, 진왕부는 여전히 남아 있어 혁련이락은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반역 죄명에 대해서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없던 일로 무마하려는 듯했다.
북강 사신들은 기회를 틈타 혼례도 치를 것을 요구했고,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