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환상과 현실 사이
영군진의 울부짖는 소리에 시위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 대인, 걱정 마십시오. 이자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아 절대로 왕비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잘 단속하겠습니다.”
우항이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광기 가득한 영군진을 훑어본 뒤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윽…….”
포박당한 채 마차에 던져진 영군진은 분을 못 이기고 꿈틀거렸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비록 고문을 당하진 않았지만, 모든 걸 잃은 고통으로 그는 가엾은 몰골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 * *
목운요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장부를 다 보고 내려두었다.
“사야, 폐하께서 하운방과 불선루 관리자를 뽑는 즉시, 이 자료를 드리면 될 거예요.”
월왕이 그녀의 손을 잡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요아, 힘들게 이루어 낸 걸 양보해야 하는데 아쉽진 않느냐?”
목운요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특히 하운방은 정말 많은 심혈을 기울였거든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저희 혼례식 때 백성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었지만, 저 혼자 힘으로는 부족함을 느꼈어요. 그러니 하운방과 불선루 모두 조정에 넘겨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어떻게 보면 복을 쌓는 일인지도 모르죠.”
월왕은 그런 목운요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앞의 여인이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못 될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그때, 목운요가 그의 목을 끌어안아 당기더니 입술을 살며시 포갰다.
월왕은 순간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숨이 차오를 때까지 진하게 마음을 주고받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얼굴이 벌게진 목운요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치며 투덜거렸다.
“사야, 오늘 밤은 혼자 주무세요.”
그에 월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밤이 되고, 목운요의 장난은 진짜가 되어 버렸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전하시길, 폐하께서 급히 궁으로 소환하셔서 오늘 밤 늦을 테니 먼저 주무시라고 하십니다.”
금란의 말에 목운요는 놀란 눈을 했다.
“한밤중에 입궁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얼핏 듣기론 어딘가에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앙)가 났다는데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새로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니, 각 지역의 동향에 유난히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연달아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불길한 징조라며 오해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금란이 물러나자, 목운요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치고 침상에 누웠다. 방 안에는 촛불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밤이 깊어진 탓인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영군진을 떠올렸다. 정말 그도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오른 걸까? 물론 생각이 났더라도 지금의 상태로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순간 목운요의 눈에 서슬 푸른 빛이 맴돌았다. 오늘 막 황릉에 도착한 영군진을 죽인다면 너무 눈에 띌 수도 있으니, 며칠 더 기다리는 게 상책일 것이다…….
마음을 먹은 목운요는 잠시 뒤척이다 곧바로 잠이 들었다.
* * *
같은 시각, 성 밖으로 말 한 마리가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키가 훤칠한 남자는 검은색 장옷을 걸친 채, 밤길을 헤치며 황릉으로 향했다.
자시경, 황릉을 지키고 있던 시위가 말발굽 소리에 횃불을 높이 들며 큰 소리로 물었다.
“거기 누구냐!”
검은색 장옷을 벗자 숨겨져 있던 준수한 외모가 드러났다.
시위는 놀란 눈으로 인사를 올렸다.
“월왕 전하를 뵙습니다.”
월왕이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영군진은 어디 있느냐?”
“현재 방에 갇혀 있습니다.”
“심문할 게 있으니 조용한 방 하나를 비우거라.”
“예.”
시위가 곧장 떠났다.
황릉에 도착한 이후에도 영군진이 목운요에 대해 큰 소리로 지껄여 댄 탓에, 시위들은 그의 입을 계속 틀어막은 채였다.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벗긴 시위가 장검으로 그의 목을 겨냥했다.
“월왕 전하께서 심문을 하실 테니 큰 소리 내지 말거라.”
영군진이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를 갈았다.
“영군월……!”
바로 그자가 자신을 망치고 목운요까지 빼앗아 간 장본인이었다. 그자만 없었더라면 자신은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는 황자였을 테고, 목운요의 사랑도 한 몸에 받고 있었을 것이다.
이내 영군진이 시위들에 의해 방으로 들어갔다. 뒤돌아 서 있는 월왕을 노려보던 그에게 문득 기억의 조각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목운요와 함께했던 순간들은 유난히 또렷하고 선명했다. 매 순간이 마치 정교한 그림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워, 더욱더 그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런 행복을 빼앗아 간 영군월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월왕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영군진을 향해 물었다.
“운요를 만나고 싶으냐?”
영군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처음부터 운요는 내 사람이었어! 그런데 네가 빼앗아 간 거다!”
그 모습을 보며 월왕의 머릿속에 목운요가 말했던 꿈이 떠올랐다.
설마 두 사람의 꿈이 똑같은 걸까? 아니면 그녀가 말한 것들이 꿈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인 걸까……?
월왕은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혀 오며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윽고 그가 두 손으로 영군진의 목을 졸랐다.
“증거라도 있느냐?”
하지만 영군진은 되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질투가 났구나? 하하, 목운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그녀는 날 위해 다도도 배우고 칠현금도 켰거든. 넌 아마 들어 본 적 없을걸? 그 소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인 것을…….”
월왕은 속으로부터 차오르는 화를 주체 못 하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점점 조여 오는 목에 영군진은 얼굴이 뻘겋게 상기되었지만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널 사랑하지 않아……. 그녀가…… 사랑하는 건…… 나야……. 내 거라고…….”
회귀 전의 기억들이 이번 생의 기억들과 마구 섞이면서 영군진은 점차 현실을 분별하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 모든 게 사실이 될 것만 같았다.
월왕은 더욱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 손에 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전혀 중요치 않은 물건인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반면 영군진은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자 그제야 두려움이 밀려와 혼신의 힘을 다해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월왕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네가 어떻게 그 일들을 알게 되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다만, 알게 된 이상 죽어야 한다.”
화근이 될 수도 있는 영군진을 이대로 살려 둘 순 없었다. 아무리 패가망신한 신세라지만, 언제 어떻게 발밑에 들러붙어 상대를 넘어뜨릴지 모르는 일이다.
“영군…… 월……. 난 네…… 셋째 형님이다…….”
영군진이 마지막 힘을 다해 월왕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목을 조르고 있는 두 손은 미동도 없이 점점 더 조여 왔다.
월왕이 냉소를 지었다.
“난 부황의 친자식이 아니라 너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영군진의 뻘겋게 충혈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그때,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눈앞이 암흑으로 내려앉았다.
그의 머릿속에 목운요와 사랑의 맹세를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평생을 사랑하며,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게…….”
늘 그랬듯이 그녀가 환한 웃음으로 화답하는 걸 보고 싶었지만, 눈앞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월왕이 이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목운요가 말했던 것들이 전부 꿈이라면 영군진을 좀 더 살려 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꿈이 아닌 현실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즉, 영군진이 정말 목운요를 첩으로 들였고, 그녀의 진짜 신분을 알고 난 뒤에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것이다.
월왕이 차가운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영군진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여봐라.”
“네, 전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위는 바닥에 쓰러진 영군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평온한 기색이었다.
“영군진이 급사했다고 내일 소식을 알리거라.”
황제한테는 귀띔을 해 두었기에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예.”
* * *
월왕은 차가운 밤바람을 뚫고 월왕부로 돌아갔다.
그동안 살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짙은 불안감만이 남아 있었다.
그 일들이 정말 현실이라면, 목운요는 과연 영군진을 깨끗이 잊었을까? 왜 자신은 한 번도 그녀가 연주하는 칠현금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걸까?
영군진이 죽기 전에 한 말들이 자신을 약 올리기 위함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그는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있을까 봐. 그리고 자신이 그녀에게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안정감을 줄 수 없을까 봐.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성 공공이 말발굽 소리에 곧장 대문을 열어 주었다.
“왕야, 오셨군요.”
월왕이 말에서 내려 장옷을 옆에 있던 시위에게 건네며 물었다.
“요아는?”
“왕비 마마께선 벌써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성 공공도 그만 들어가서 쉬게. 난 요아한테 가 볼 테니.”
“예.”
월왕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성 공공은 내심 걱정이 앞섰다. 누가 봐도 그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하품을 하던 우항이 표정이 심상치 않은 우의를 툭툭 치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우의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찼다.
“멍청이를 보고 있었어.”
우항이 흥미를 보이며 두리번거렸다.
“어디, 어디?”
우의가 그런 그를 뚫어져라 보더니, 무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한참 뒤에야 멍청이가 자신이란 걸 깨달은 우항이 우의를 뒤쫓아가며 소리쳤다.
“지금 나보고 멍청이라고 한 거냐? 거기 안 서?!”
이를 본 성 공공이 무섭게 호통쳤다.
“조용하지 못할까! 내일부터 내 밑에 와서 일하게 할 것이다!”
성 공공의 협박에 우항은 곧장 입을 다물고 조용히 우의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