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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402화 (402/442)

402화 영군진의 망언

반 시진 걸려 식사가 완성되었다.

허연한은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을 보니 저도 모르게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요아의 손맛이 여전하구나.”

두 모녀만 있는 자리다 보니 두 사람은 편안하게 식사하면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허연한이 화제를 허비에게로 돌렸다.

“요아, 듣자 하니 폐하께서 허 대인을 형부로 전임시키셨다더구나.”

“네. 형부 시랑으로 임명되었는데 실권을 장악한 관직이죠.”

“그렇구나…….”

허연한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허비는 목운요한테는 외삼촌이었다. 그는 온화한 인상에 학자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인물이었는데, 장공주가 그를 수양아들로 삼은 것도 그런 성정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운요가 허연한 때문에 걱정하는 동안, 황궁 내에서 월왕도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폐하, 전 운요와 함께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 조정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폐하도 이에 동의하셨거늘, 어찌 갑자기 말을 바꾸시는 겁니까?”

월왕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하운방과 불선루를 조정에 넘기겠다는 상주서를 전하러 입궁했건만, 황제의 반응이 전혀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위엄 넘치는 표정으로 월왕의 말을 듣고 있다가 손짓으로 서립 등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곤 정전 문이 닫히자마자 편안한 말투로 말했다.

“아우, 이것 좀 봐. 어젯밤부터 이 상주서들이랑 씨름했는데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아. 자네가 조정에 관심이 없는 건 잘 알겠으나, 형제로서 절대로 보고만 있어서는 안 돼.”

황제가 계단에 앉으며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월왕은 이 상황이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형님, 제왕으로서 이런 흐트러진 자세를 취하는 건 좀 아니지요.”

“제왕은 항상 단정하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법이 있느냐? 그리고 어차피 우리 둘뿐인데 이때라도 편하게 있어야지, 안 그래? 아우, 말 돌리지 말고 부디 잠시만 날 좀 도와주게. 조정이 안정되고 나면 절대 붙잡지 않을 거야. 맹세하지.”

월왕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요아와 함께 남해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남해야 가면 되지.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야. 아우, 잘 생각해 봐. 부황의 상을 치르는 삼 개월 동안은 어차피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상 기간이 끝나면 칠월이라 남해에 도착하면 구월이 될 텐데 혹시라도 그사이 제수씨가 회임을 하면 그 먼 길을 어찌……. 어험, 아무튼 제수씨 생각도 해야지.”

월왕이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의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형님, 지금 어떻게든 절 남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죠?”

국상 기간에는 남녀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애초에 회임을 할 수가 없었다.

“난 사실 그대로 말한 것일 뿐, 대체 이 형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후,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 나누시죠.”

월왕은 하는 수 없이 승낙을 표했다.

그에 황제는 두 눈이 반짝이며 크게 기뻐했다.

“정말이지? 잘 생각했다! 그럼 근위병을 아우한테 맡기겠네. 북강 사절단이 곧 서릉에 도착한다는데, 아무래도 목적이 불순한 것 같으니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대비를 잘해야 할 것이야.”

“예, 서릉을 무사히 잘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또한 영군릉과 영군진을 황릉으로 보내 부황 앞에서 제대로 사죄하게 할까 해.”

부황이 화병으로 피를 토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월왕도 그 의견에는 찬성이었다.

“다만 그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부황의 건강이 그리 빨리 악화되지 않았을 텐데, 그 정도 처벌은 너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걱정 마. 이건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까.”

황제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두 사람의 죄질은 죽여서도 용서가 안 될 만큼 악랄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하나 죽일 방법은 널리고 널렸다.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둘이 서로 죽이게끔 하면 그만인 것이다.

* * *

월왕부로 돌아온 월왕은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옥패를 보고 있는 목운요의 모습에, 덩달아 옥패를 살폈다.

난초와 선학 무늬가 새겨진 옥패는 딱 봐도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무늬는 분명 남성용이었다.

“요아, 나에게 주는 선물인 것이냐?”

월왕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든 목운요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사야, 이건 허 대인의 옥패예요…….”

그녀가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어쩐지 머릿속이 아까보다 더 복잡해진 듯했다.

“요아, 간단한 답례품을 보내 주면 그만인 일이다. 허비, 그자의 목적이 뭔지 궁금하다면 다른 이를 시켜 알아보면 될 것을, 왜 혼자 끙끙 앓는 것이냐?”

늘 그랬듯이, 허연한과 연관된 일이라면 목운요는 평소와 달리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았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께서 허 대인을 좋게 보신 것 같아서요. 오늘도 몇 번이나 그분에 대해 얘기하시고…….”

게다가 허비도 일찍이 부인을 잃은 신세였다…….

월왕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렸다.

“요아, 내가 듣기론 허비 그자가 세상을 떠난 부인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어, 그동안 새로 부인을 들이지도 않았다고 들었다.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아버님에 대한 마음이 깊으신데, 과연 그리 쉽게 다른 사람한테 호감을 가질까?”

그 짧은 시간 안에 허비에 대해 남다른 감정이 생겼다는 건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그래요. 일단 좀 더 지켜보죠. 아무리 생각해도 허비가 그때 마침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봐요. 안 그래도 사람을 시켜 곡 마마께 자초지종을 물으라고 했으니, 정말 우연이라면 그만이지만 혹시라도 계획된 일이라면…….”

목운요에게 있어 허연한은 마치 역린과도 같았다. 누군가가 건드리는 순간 그녀는 절대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목운요의 마음을 잘 아는 월왕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목운요는 곧장 금란을 시켜 허비에게 옥패와 답례품을 함께 보냈다.

“사야, 오늘 폐하를 뵙고 오셨죠? 별일 없으셨나요?”

“아무래도 서릉에 한동안 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구나.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정적이지 못한 데다, 북강 사절단이 곧 도착한다고 하니 폐하를 도와 당장 눈앞의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다.”

월왕의 한껏 미안해하는 표정에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애초에 급하게 떠날 생각도 없었어요. 외할머니께서도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신 게 아니고, 국상 기간도 아직 남았으니 급할 거 없어요.”

“그래.”

목운요의 미소를 보고 월왕도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오랜만에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된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목운요가 한창 하운방과 불선루 장부를 보고 있는데, 우항이 서재에 들어와 알렸다.

“왕야, 왕비. 밖에 시위가 찾아왔는데 영군진이 왕비를 뵙고자 한다고 합니다.”

월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감 중인 영군진 말이냐?”

“예. 오늘 점심 즈음에 폐하께서 영군릉과 영군진 두 사람의 황자 신분을 박탈하고 황릉을 지키도록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곧 출발하는데 영군진이 꼭 왕비를 만나야 한다며 난동을 부리면서 망언을 내뱉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월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이냐?”

우항이 머뭇거리며 난처해했다.

“어서 말하거라!”

“영군진이 말하길…… 이번 생에 월왕비를 아내로 맞아 평생 함께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유감이며,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월왕비를 금지옥엽처럼 아껴 주고 평생을 사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월왕의 분노를 직감한 우항은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감히 이런 망언을 내뱉다니, 진왕이 아무래도 곱게 죽고 싶지 않았나 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목운요는 손에 힘을 주었다.

영군진은 회귀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 바로 자신을 월왕부로 보냈었다…….

설마…… 그때 일이 생각난 것일까?

월왕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목운요를 보더니 손짓으로 우항을 내보냈다.

“요아, 괜찮느냐? 그런 헛소리 따위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

목운요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사야. 미치광이가 한 말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죠. 황릉에 도착한 뒤에는 무슨 말을 하든 들어 주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래.”

목운요의 단호한 태도에 월왕도 한시름 놓으며 밖에서 대기 중인 우항한테 말했다.

“영군진이 계속해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입을 막은 채로 데려가라고 전하거라. 왕비를 모함하는 건 중죄이거늘,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였던 걸 생각해서 이번 한 번만 봐준다고 전해라.”

“예.”

* * *

마차에 앉아 있던 영군진은 밖에서 우항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곧장 창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때, 손등 위로 채찍이 내리쳐지며 선명한 핏자국을 남겼다.

“왕비께서 하찮은 평민을 만나러 와 줄 거란 기대는 하지도 마라.”

영군진은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마저 꺼지자, 막무가내로 마차 밖을 나가려 했다.

그에 시위들이 곧바로 곤봉으로 그를 제압한 뒤 우항에게 사죄했다.

“나리, 용서하십시오. 정신 나간 미치광이입니다.”

“내 말을 그대로 전하긴 했느냐? 그 말을 듣고도 날 만나러 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두 다리를 잃은 후 영군진은 매일 밤 목운요와 단둘이 지내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의 목운요는 그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흘렸다. 영군진은 그런 그녀의 애모를 온전히 즐겼고, 심지어 꿈속에서 그녀와 아이까지 가졌다. 모든 것이 마치 꿈처럼 황홀하기만 했다…….

그는 이건 분명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목운요를 가질 사람은 월왕이 아닌 자신이며, 월왕이 자신한테서 목운요를 빼앗아 간 것이라고!

하나 지금, 목운요는 자신을 만나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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