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기막힌 우연
그림자 호위들이 작은 관을 들고 와 조심스레 봉황 무늬 관 옆에 내려 둔 뒤 물러났다.
황릉에 묻힌 관 안에는 태상황이 입었던 용포만 들어 있고, 진짜 시신은 이 작은 관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목운요와 월왕이 두 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때, 울음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월왕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걸 지켜보는 목운요의 가슴도 찢어질 듯 아팠다.
월왕은 한참 후에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상을 치르느라 그는 무척이나 야위어 있었고, 눈 밑에는 그간의 피곤함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다.
“어릴 땐 대체 왜 그 작디작은 냉궁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이해가 안 돼, 성 공공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물어봤었다. 궁 바깥의 세상은 어떠한지,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지…….”
월왕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다 모친이 황자와 비빈들을 살해하여, 대력조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아닌 죄인이고 살인자이며 심지어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황릉에 묻힐 자격조차 없는 황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야…….”
월왕을 둘러싼 짙은 슬픔의 기운이 느껴져 목운요도 덩달아 마음이 아파 왔다.
“하지만 초상화에 그려진 모습만으로도 난 모친이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모친이 절대로 살인자가 아닐 거란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내고 누명을 씻어 주고 싶었지만…… 내가 궁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구나. 그렇게 월서로 오게 되었고,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었지만 그 신념 하나로 다 버텨 냈었다……. 결국 부황의 입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지…….”
“사야, 황후 마마께는 이곳이 비좁은 황릉보다 백배는 나았을 것입니다.”
이토록 정성스레 만들어진 묘실과, 황릉이 아닌 황후의 곁을 지키고 싶다는 태상황의 유언만으로도 충분히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이렇게 함께 서로를 지킬 수 있는 게 두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행복일지도 몰랐다.
“너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 후에야 비로소 이런 감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단다. 운요, 우린 절대로 부황과 모후와 같은 일을 겪지 않기로 하자. 죽어서 함께하는 것보다 생전에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꾸나.”
“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두 사람은 다시 인사 올리고 향을 올린 뒤 묘실에서 나왔다.
무거운 돌문이 닫히자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곳을 완전히 봉할 방법은 없느냐?”
목운요가 유일에게 물었다.
“이 장치는 전 그림자 호위들이 설계한 것으로, 장치만 망가뜨리면 그 누구도 다시 열지 못할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거라.”
“예.”
두 사람이 산을 내려올 때쯤, 위에서 장치가 파괴되는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월왕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다가 다시 목운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요아, 가자.”
“네.”
그렇게 황제와 황후 사이의 비밀은 영원히 땅속에 묻혀 버렸다.
* * *
다음 날 아침, 며칠 동안의 피로가 쌓인 탓에 목운요는 해가 중천이 떠서야 잠에서 깼다.
옆을 보자, 월왕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지탱한 채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깼어?”
“사야, 왜 깨우지 않았어요?”
“너무 단잠을 자길래 차마 깨우지 못했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금란과 금교가 문을 두드렸다.
“왕야, 왕비.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요.”
금란과 금교가 생글생글 웃으며 목운요의 세안을 도왔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가져다드릴까요?”
점심 식사? 목운요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라 깜짝 놀랐다.
월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목운요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가져오거라. 난 식사 후에 궁에 다녀올 테니 고모님과 시간을 보내다 오거라.”
“네.”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입맛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기운을 내기 위해 간단히 요기를 한 뒤 각자 헤어졌다.
마차에 타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목운요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죠?”
금란이 알아보러 다녀오더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진왕부 시녀인데, 진왕 전하를 만나러 감옥에 가 달라고 비 마마께 청하고 있습니다.”
“시녀가 감옥의 일을 알고 있다니, 형부에서 단속 좀 해야겠네요. 순천부 심 대인한테 넘겨요.”
목운요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왕에 대한 복수를 일단락한 지금,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예.”
* * *
장공주부에 도착한 목운요는 산책 중인 허기와 장공주를 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요아, 외할머니를 뵙습니다.”
“어서 오너라. 네가 키운 동백꽃이 예쁘다며 허기가 칭찬 중이었단다.”
“허 소저 마음에 든다면 이따가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가셔요. 온실에 예쁜 꽃이 넘쳐난답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목운요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함께 안 오셨네요?”
“발목을 삐끗해서 방에서 쉬고 있단다.”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아침에 모란꽃에 물 주러 갔다가 그만 넘어졌는데, 마침 시녀들도 동행하지 않았다지 뭐니. 다행히 허비가 지나가다 발견해서 데리고 왔더구나.”
“크게 다치진 않으신 거죠? 외할머니, 허 소저와 마저 산책하세요. 전 어머니한테 다녀올게요.”
“그래, 다녀오거라.”
목운요는 곧장 허연한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벽응거(碧凝居) 내, 허연한이 침상에 기대어 탁자 위에 놓인 옥패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목운요의 방문에 그제야 그녀가 희색을 보였다.
“요아, 어서 오너라.”
목운요는 곧바로 허연한의 발목을 살피며 물었다.
“어머니, 대체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별일 아니다. 바닥이 미끄러워서 그만 넘어졌을 뿐이야. 조금 부은 것 외에 큰 이상은 없다.”
목운요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어머니, 방금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셨던 거예요?”
허연한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탁자 위에 놓인 옥패를 보며 말했다.
“아까 다쳤을 때 허 대인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는데, 그분께서 이 옥패를 떨어트리셨더구나. 돌려줄 겸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하는데 무얼 드리면 좋을지 고민 중이었다.”
“제가 대신 준비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쉬기만 하세요. 점심 식사는 하셨나요?”
“그럼.”
허연한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금이 차를 올리며 말했다.
“부인께서 입맛이 없으시다며 죽 반 그릇밖에 안 드셨습니다.”
“아플 때일수록 식사를 든든히 하셔야죠. 제가 직접 만들어 올 테니 쉬고 계셔요.”
“요아, 정말 괜찮다.”
“제가 안 괜찮아요.”
목운요가 웃으며 방을 나서자, 사금과 사기도 허연한을 침상에 눕힌 뒤 방을 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금란과 금교는 낮은 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두 분은 비 마마를 따라 주방으로 가 봐요. 여기는 저희가 지킬게요.”
“예.”
사금과 사기는 이미 예상한 듯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들어선 사금과 사기가 곧장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뒤따라온 사서와 사화도 약속이라도 한 듯 바닥에 꿇어앉았다.
목운요는 손을 씻으며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만사에 세심하고 신중하다고 생각하여 어머니를 맡긴 건데, 오늘 일은 정말 실망스럽구나.”
사금과 사기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목운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무릎 꿇는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으니 그만 일어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봐. 대체 왜 어머니께서 다치셨을 때 그 누구도 곁에 없었던 거지?”
사금과 사기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대답했다.
“부인께서 허 소저에게 간식을 가져다주라고 사서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사서가 이어서 말했다.
“간식을 전한 뒤 돌아오는 도중에, 곡 마마께서 장서고에 가서 책 한 권을 찾아오라고 하셔서 반 시진 정도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사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사이 부인께서 산책을 하고 싶다고 하셔서 사화는 남게 하고, 소인과 사기가 함께 마당에 나갔습니다. 모란원을 지날 때 부인께서 직접 가꾸시겠다며 소인에게 거름을 가져오라고 분부하셨고, 사기 혼자 부인 곁에 남게 되었습니다.”
목운요가 사기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근데 왜 자리를 떠난 거지?”
“장공주 전하께서 사람을 시켜 부인께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하셨는데, 심부름하던 시녀가 모란원에 계신 부인을 발견하여 이야기를 전달했고, 부인께서 소인더러 음식을 벽응거에 갖다 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소인도 혼자 있을 부인이 걱정됐지만 부인께서 괜찮다고 하셔서……. 그 후 다치신 겁니다…….”
가만히 듣고 보면 모든 게 우연의 일치 같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과연 이토록 교묘한 우연이 몇 번이나 있을까?
그들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던 목운요는 어딘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연이든 아니든 간에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돼.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절대로 어머니를 혼자 두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사실 이번 일로 가장 근심 걱정이 컸던 게 바로 그들이었다. 그나마 발을 삐끗한 정도로 그쳐서 다행이지, 혹시 자객이라도 만났더라면 그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절대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사서는 남아서 날 도와주고, 나머지는 어머니한테 가 보렴.”
“예.”
목운요는 여전히 뭔가 께름칙했다. 비록 어머니 신변 보호를 위해 그림자 호위 한 명을 두긴 했지만, 위급한 순간이 아닌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한 탓에, 이번에 어머니를 구한 사람이 허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게 정말 우연의 일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