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400화 (400/442)

400화 마지막 소원

“그나저나 운요, 이씨 가문에 대한 증거 수집은 거의 다 끝나 가는 거지? 그럼 곧 그들을 처리할 수 있는 거야?”

“증거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중이야. 그들이 반역에 가담한 건 명백한 사실이니 증거가 없더라도 괜찮아. 다만 북강 공주가 골칫거리인 거지.”

“내가 듣기론 북강 사신들이 반역 가담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며 어떻게든 화를 피하려고 발버둥 친다더군.”

선령이 분개하며 씩씩거렸다.

북강 공주와 진왕이 몰래 결탁해 잔인한 방법으로 유왕비 배 속의 아이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선령은 두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지경이었다.

목운요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자, 선령이 다급히 물었다.

“운요, 설마 폐하께서 그자를 놓아줄 생각이신 거야?”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북강에서 이번에 축하의 뜻을 표하러 다시 사신을 보낸다는 소문이 있어. 선물과 함께 혁련이락이 벌인 일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한다고 하는데, 북강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혁련이락이 화를 피할 수도 있을 법해.”

“말도 안 돼…….”

선령은 어이없어 펄쩍 뛰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목운요가 되레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까지 분해할 필요 없어. 혁련이락의 신분이 특별한 건 사실이니까. 폐하께서 등극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사건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는 게 가장 일 순위지. 그리고 폐하라면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람들을 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에 시간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소저,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금란이 문밖에서 작은 소리로 알렸다.

그에 목운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장공주부로 갈 건데 같이 갈래?”

“난 새로운 연구가 한창이라 사양할게.”

“그래.”

태상황이 승하한 뒤, 장공주도 황궁에서 나와 장공주부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연일 고열에 시달리며 열흘 넘게 병상에 누워 있다가, 목운요와 허연한이 몇 날 며칠을 곁에서 돌본 덕분에 최근 들어서야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내린 목운요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에는 따뜻한 봄바람을 맞아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고, 졸졸 흐르는 냇물이 사방을 에워싸 각양각색의 연꽃들도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꽃을 찾아온 나비들의 날갯짓에 보이는 곳마다 생기가 넘쳐 보였다.

장공주가 머무는 영화거에 도착한 목운요는 문 앞에 서 있는 시녀를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손님이라도 온 것이냐?”

“예, 허 소저께서 오셨습니다.”

허기? 그러고 보니 안 본 지 한참 된 것 같기도 했다.

안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청아한 목소리와 차분한 말투가 듣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했다.

목운요가 안으로 들어서자 곡 마마가 바로 인사 올렸다.

“소인, 군주를 뵙습니다.”

이젠 월왕비 신분이 되었지만, 장공주부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군주라 불렀다.

침상에 기댄 채 허기와 담소를 나누던 장공주도 웃으며 반겼다.

“요아, 어서 오너라.”

“허기, 월왕비를 뵙습니다.”

허기의 호칭에 목운요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허 소저, 예를 거두세요. 꽤 오랜만인 것 같은데, 연주로 돌아가 계셨나요?”

허비가 장공주의 수양아들이다 보니, 두 사람은 서로 자매로 호칭했었다. 그런데 지금 허기가 월왕비라 칭했으니, 목운요도 신분에 맞게 허 소저라 부른 것이었다.

“네. 할머니께서 위독하셔서 잠시 다녀왔습니다. 다행히 건강이 회복되셨고 부친께서도 최근 서릉으로 배정되어 이번에 같이 돌아왔습니다.”

목운요는 그녀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장공주를 향해 물었다.

“외할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졌다. 이제 안 와도 된다 하지 않았느냐. 그동안 궁 안의 일 처리에 나까지 돌보느라 너무 홀쭉해졌구나.”

장공주는 유난히 가냘파 보이는 목운요가 심히 걱정되었다.

그에 목운요는 장공주의 손을 잡아 주며 안심시켰다.

“외할머니, 그럼 절 위해서라도 얼른 건강을 회복하세요. 그러면 저도 훨씬 마음이 놓일 테니까요.”

“그러마.”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으나, 태상황의 승하는 장공주 마음속에 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 장공주의 마음을 잘 아는 목운요는 최선을 다해 건강을 살펴 주면서도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네진 않았다. 가끔은 슬픔을 감추기보다 털어 내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많이 좋아졌단다. 허기가 와서 말동무해 준 덕분에 기운도 나는구나. 그러니 어서 가서 볼일 보거라.”

태상황은 임종을 앞두고 삼년상이 아닌 삼 개월만 상을 치르라고 당부하였다. 하여 제사 예절이 삼 개월로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첫 한 달 동안은 황제가 백관을 거느리고 태화전을 지켜야 했는데, 황후 혼자서 도저히 감당이 안 돼 목운요도 옆에서 함께 도왔던 것이다.

“딱히 처리할 일이 없으니 걱정 마세요.”

목운요가 장공주의 맥을 짚어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어머니께서 오늘은 뭘 준비하셨나요? 저도 이참에 맛 좀 봐야겠어요.”

장공주는 그런 목운요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왕비 된 사람이 여전히 식탐 많은 아이같이 굴다니, 누가 볼까 두렵구나.”

“외할머니-”

목운요가 장공주의 팔을 부둥켜안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장공주는 덩달아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즐거워 보이는 장공주의 모습에 곡 마마도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인께서 어떤 맛있는 요리를 하고 계시는지 소인이 바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려요, 곡 마마.”

목운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허기가 나섰다.

“저도 같이 가 볼게요. 비록 요리는 서툴지만 도와드릴 순 있으니까요.”

“아가, 먼 길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쉬거라.”

“아니에요. 전하께서 무사한 걸 직접 확인했으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아버지 대신 효도한다 생각해 주세요.”

“그래, 그럼 다녀오거라.”

완곡한 허기의 태도에 장공주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네.”

두 사람이 방을 나가자 장공주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요아, 내가 당부한 일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

“그림자 호위들한테 지시를 내렸어요. 태상황이 하관(下棺, 관을 묻는 것)하시기만 하면 순조롭게 잘 진행될 겁니다.”

“그래. 두 사람이 살아생전에 함께하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해야지.”

목운요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잘 해결될 거예요. 다만, 폐하께는 정말 숨길 생각이신 건가요?”

“굳이 알릴 필요는 없으니 우리만 아는 비밀로 해 두자꾸나.”

“네.”

그 시각, 주방에선 허기가 나서서 시녀들에게 식사를 나르라며 지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허연한이 곡 마마에게 물었다.

“곡 마마, 허 소저는 언제 돌아온 거죠?”

“오늘 서릉에 도착하자마자 장공주 전하를 뵈러 오셨답니다.”

허연한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요아보다 나이가 많은 걸로 아는데, 곧 혼사가 오가겠네요?”

“안 그래도 장공주 전하께서 국상이 끝나는 대로 혼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셨으나, 허 소저께서 거절하시더군요.”

허연한은 문득 생각이 많아졌다.

허 소저는 월왕을 마음에 품은 이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불쑥 나타나니 저도 모르게 걱정이 앞섰다.

“곡 마마, 사람을 시켜 허 소저의 속내를 한번 떠보세요.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한 걸 보니 뭔가 불안하네요.”

딸아이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 소저가 월왕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면 다행이겠지만, 혹시라도 전에 품었던 마음이 여전한 거라면 절대로 뜻대로 되게 할 순 없었다.

“예.”

날로 발전해 나가는 허연한의 모습에 곡 마마는 작게 미소 지었다.

* * *

사십구 일 동안의 상례가 끝나고, 웅대한 장송 행렬이 황궁에서 출발해 황릉으로 향했다.

길 양옆에서 백성들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하였고, 순천부 관리들은 상황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용포 차림의 영군유는 월왕과 함께 좌우로 태상황의 관을 짊어진 채 걸음을 옮겼다. 목운요도 황후 민방화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관이 무사히 황릉으로 옮겨지자 백관들은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자리를 지키며 각자 애도를 표했다.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자, 인파들도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고 황릉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인적이 드문 동릉 산에서 횃불이 켜지더니 목운요와 월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일이 은밀히 나타나 알렸다.

“주인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월왕을 쳐다보았다.

“사야.”

월왕도 한참 동안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그림자 호위가 장치를 힘껏 밀자, 바위 한 면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크고 높은 묘실이 나타났다.

그에 월왕은 목운요의 손을 힘껏 잡았다. 목운요도 입술을 깨물며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태상황이 승하한 뒤, 장공주는 월왕과 목운요를 불러 태상황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목운요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자초지종을 알고 난 뒤 그제야 이해가 갔다.

태상황이 차가운 황릉에 묻히기보단, 한평생 빚을 진 황후의 옆을 지키고 싶다고 생전에 유언을 남긴 것이다.

월왕과 목운요는 손을 맞잡고 묘실로 향했다.

묘실이지만 내부 장식은 궁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길게 들어선 등이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동릉 산 중턱에 이런 묘실이 숨겨져 있고, 이곳에 태상황이 한평생 사랑했던 여인이 묻혀 있을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목운요의 시선이 중앙에 놓인 봉황 무늬 관에 멈췄다. 바로 선대 황후, 즉 월왕 생모의 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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